차가운 아메리카노 말고 루이보스 계열의 향긋한 과일 차, 맵찔이지만 매운 음식을 사랑했던 내가 생전 안 먹던 황태국이나 투명한 국물의 콩나물국, 신나고 방방 뛰는 다리엔소(Juan d’Arienzo)의 곡보다 나긋하고 다정한 살라만카(Fulvio Salamanca)의 음악. 뱃속에 아기가 생기고 난 뒤의 변화이다. 임신하면 입맛도 체형도, 많은 것이 바뀐다고 하는데 음악 듣는 취향까지 달라질 줄이야. 거기에 같이 춤을 추고 싶은 사람들도 달라졌다.
보통 탱고를 추러 밀롱가에 가면 1시간 동안 ‘탱고-탱고-발스(valse 혹은 왈츠라고 생각해도 좋다. 동당당 동당당 3/4박자), 다시 ‘탱고-탱고-밀롱가(상대적으로 가장 빠른 템포의 음악, 2/4박자)‘의 음악이 순서대로 나온다. 각각 3~4곡이 한 세트(탱고 4곡, 발스 3곡, 밀롱가 3곡)로 묶여서 나오기 때문에 한 번 같이 춤을 추기 시작하면 대개 10분 정도는 한 사람과 함께 춤을 춘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탱고를 춰온 사람이라면 매번 달라지는 음악에 따라 춤을 추고 싶은 상대도 확실한 편이다. 나의 경우에는, 빠른 곡은 날쌔고 신나는 리듬감을 가진 사람과 추고 싶고, 차분한 곡에는 음악보다 상대에게 충분히 집중해주는 다정한 사람과 추고 싶고,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뭐든 상관없이 온몸에 힘이 넘치는 사람과 추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나는 임신하고 난 뒤부터 유독 ‘착한 사람’하고 추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음악을 들어도 음악보다는 상대방이 우선이고, 화려한 동작을 힘있게 완성하는 데에 집중하기보다는 바로 상대에게 집중해주는 사람 말이다. 물론 임신 전에도 아무리 탱고 실력이 좋아도 내 움직임에 귀 기울여 주지 않는 사람하고는 추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임신 후에는 이 경향이 조금 더 심해졌다. 아마 혹여라도 임신 후에 호르몬 때문에 느려진 몸의 움직임이나 과도하게 분비되는 릴렉신 호르몬이 걱정되어서가 아닐까 싶다.(순산을 돕기 위해 임신부터 산후 6개월까지는 관절이나 인대를 부드럽게 해주는 릴렉신 호르몬이 분비된다고 하는데, 혹여 몸이 과도하게 이완되어서 다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는 듯하다.)
이렇다 보니 요즘 춤 신청을 주고받다 보면 거의 대부분이 기본 자세인 아브라소가 느슨하고 편안하거나, 음악이나 탱고 동작보다는 나의 느릿한 거북이 걸음에 맞춰 주는 사람들과 추게 되는 것 같다. 또 한편으로는 춤을 잘 추든 못 추든, 자신의 실력을 걱정하느라 조급한 사람보다 다른 건 다 중요하지 않으니 내 앞에 있는 이 상대방과 ‘함께’ 편안하고 나긋한 시간을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추는 게 즐겁다.
탱고를 추고 돌아오는 길에 남편과 내가 주고받는 단골 질문이 있는데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나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카프리썬 하나 사들고 차에 타서 시원하게 마시며 남편에게 물었다.
“오늘은 누구랑 춘 게 제일 좋았어?”
남편은 요즘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상대방과 축을 맞추면서 걷는 게 재미있다고 했다. 전에는 모든 음악을 박자에 맞게 리드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상대방에 따라 서로에게 가장 편안한 자세가 뭘지 찾는데 집중하다 보면 그 과정이 즐겁다고 했다. 남편도 내게 똑같이 물었다. 보배는?
“나는 ㅇㅇ님.”
남편은 평소와 다른 내 대답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누구, 누구, 누구 늘상 말하는 예측 가능한 이름들을 댔을 터였다. ”역시 착한 분들하고 추는 게 가장 마음도 편하고 행복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니 한밤중에도 40분은 걸리는 집에 금세 도착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결국 탱고도, 사랑도, 일도 대부분 마찬가지 아니냐는 방향으로 흘렀다. 아무리 훌륭한 다른 남자라도, 잠꼬대로 임신한 내 다리 붓기 걱정하는 사랑스러운 남편 만한 사람이 없고, 대외적으로 명망있고 유능하지만 팀원을 등한시하는 차가운 냉혈한보다는 어느 정도 할 일을 잘하면서도 주변을 챙기고 배려할 줄 아는 팀원이 내게는 더 소중하고 귀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탱고 대회에서의 높은 순위보다, 박자감이 메트로놈 뺨치는 것보다, 아무래도 가장 좋은 건 상대를 향한 배려가 아닐까 싶다. 속 편하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만날 수 있는 황태국 같은 사람, 카페인에 심장 벌렁거리는 차가운 아메리카노 말고 상쾌하고 고요한 루이보스 계열의 과일 차 같은 사람의 매력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밤이다.
* 글쓴이 - 보배
탱고 베이비에서 탱린이로 변신 중. 10년 정도 추면 튜토리얼 단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여, 열심히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청년>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Brunch: https://brunch.co.kr/@sele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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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야
결혼 전 스윙과 블루스를 매일 밤 추며 즐거웠던 기억을 회상하게 되는 반가운 글이네요~:) 이제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즐겁지만 그때 함께 췄던 배려가 지금의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게 해준 것 같아 아련합니다.
보배
우와. 블루스하고 스윙도 정말 매력적인 춤 같아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삶으로 가셨군요. 저도 곧 그렇게 되려나요. 저는 언제까지 탱고를 출 수 있을까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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