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여행하는 마음
“그날 새벽 바다가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나네요. 새벽에 건조 중인 군함의 갑판 위에 올랐을 때, 수평선을 보면 무언과 ‘확’ 풀리는 느낌이 들었죠. ‘이만하면 됐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전 판사였다. 그리고 법무부에서 법을 만들거나 소송을 지휘하는 역할을 했다. 대표적으로 민법에 ‘동물이 물건이 아니다’라는 조항이나 ‘데이터’, ‘인격권’ 등을 넣는 개정안, 출생통보가 안된 아이를 보호하는 ‘출생통보제’ 법안 등이 그가 만든 것이다. 그런데 그가 가장 삶에서 인상 깊은 순간들을 이야기할 때, 그는 새벽에 건조 중인 선박 위를 오른 일을 말했다. 그는 법원과 법무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놀랍게도 ‘군함’을 만들기도 했다.
“삶에서 100% 행복한 순간을 말하라면, 저는 법무관 때가 떠오릅니다. 당시 세상은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원하는 강의를 언제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죠. 그때 저는 대학로에서 무료 문학 강의를 해준다는 얘기를 듣고, 3시간씩 차를 몰고 가서 강의를 들었었어요. 진짜 소설가를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게 너무 신기했고, 주변에는 모두 법조인이다 보니 문학을 하는 사람도 없었죠. 그런데 그렇게 차를 달려 강의장에 도착하면, 마치 세상의 모든 현실과 세속은 사라지고, 내가 진짜 원하는 ‘다른 세계’가 마치 펼쳐져 있는 듯했어요. 마냥 행복했죠.”
tvN <알쓸범잡>에 출연한 것으로도 널리 알려진 정재민 전 판사는 법무관이었고, 판사였고, 법무부에서 법을 만든 것도 맞다. 그러나 그는 군함을 만들기도 했고, 소설가이기도 했다. 세계문학상 등 전업소설가도 받기 어렵다는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삶을 특정한 직업군으로 분류하는 건 쉽지 않다. 해당 글에서도 그를 ‘전 판사’라고 지칭하긴 하지만, 전직 방위사업청 과장이나 현직 소설가 등 무엇으로 지칭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는 삶의 여러 순간들을 이야기했다. 그 중에는 법무심의관 일을 하면서 법을 만들 때의 즐거움, 또 외교부에서 국제소송매뉴얼을 만드는 것의 보람, 국방부에 일할 때 외국에서 협상하던 일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나는 그가 마치 세상의 수많은 나라를 여행하듯, 다양한 세계들을 여행하는 사람 같다고 느꼈다. 그는 군함이 건조 중인 바다 위로, 문학이 있는 대학로로, 국제재판소가 있는 네덜란드로,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는 국회로, 그렇게 부단히도 ‘떠나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부단히도 새로운 세계를 여행하는 듯한 그 마음의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상황의 틈새를 뚫고 나가는 마음
그는 판사로 10년 이상을 근무했지만, 사실 자신이 청소년기 때만 하더라도 판사라는 직업을 원했던 적은 없었다고 했다. 다만, 그저 당시에는 부모님과 주위 친척들부터 사람들이 공부를 ‘잘하면’ 법대를 가고, 할 수만 있다면 판사를 하는 게 당연한 분위기였고, 그런 ‘상식’에 따라 어느덧 자신도 법조인의 길을 걷고 있었다고 했다.
“중학생 때 어머니가 암 판정을 받고, 집이 여러모로 많이 힘들었어요. 저는 막연히 무언가 창의적인 것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어머니는 항상 제게 법조인이 되라고 하셨었죠. 어머니는 사법시험을 치기 3일 전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시험에 방해될까 봐, 제게 그 사실을 비밀로 하셨죠.”
나는 이 인터뷰의 제목처럼 그의 밀착된 ‘마음’이 궁금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삶에서 중요했던 건 마음 보다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신이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항상 상황의 한계 안에서 마음도 고려했다고 했다. 법조인의 길을 걷게 된 것도 그 시대 분위기, 주위 어른들의 조언 등 주변 ‘상황’의 힘이 컸던 셈이다.
“법을 그다지 하고 싶지 않았는데도, 법 공부를 계속한 다른 이유도 있어요. 그건 제가 다소 이것저것 하고 싶어하는 편이라, 오히려 나의 성향과 다른 성격의 직업에, 특히 섣불리 행동하기 보다는 판사처럼 남의 말을 잠자코 경청해야 하는 직업에 저를 억지로 잡아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죠. 나를 잡아두는 게 나의 성숙과 균형 있는 성장에 유익하겠다고 생각했달까요. 막상 계속 해보니 또 그렇게까지 싫지도 않았고, 할 만하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는 어떤 마음만을 내세우기 보다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상황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방식으로 살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하나 생각해볼 것은, 그것이 그렇다고 결코 단순히 상황에 늘 ‘순응’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만약, 그가 늘 상황에 순응하기만 했다면, 군함을 만들었던 전 판사이자 현직 소설가 같은 ‘이상한’ 수식어구가 그에게 붙을 리 없다. 나는 그가 상황이라는 울타리 사이사이를 날카롭게 응시하며 그 틈새를 발견하는 묘한 ‘마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법고시생이던 대학 시절이었어요. 대학에서 독일어 수업을 듣고 있는데, 교수님께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에 대해 물었던 적이 있었죠. 저는 청소년기 때 그냥 소설이 좋아서 많이 읽었었는데, 이 <유리알 유희>가 무엇인지 도저히 모르겠더라고요. 교수님이 답하길, ‘유리알 유희는 소설이다.’라는 것이었어요. 인류가 만든 종합 예술의 끝이 유리알 유희이고, 그게 소설의 메타포라는 것이었죠.”
그는 그때부터 사법고시 준비를 하면서도, 소설을 썼다고 했다. 당시 어머니는 암 투병 중이었고, 그는 법대생이었다. 그 ‘상황의 틈’으로 그의 마음이 뚫고 나갔다. 내게는 마치 마음이 빛이 되어 어둠의 틈새를 뚫고 나가는, 그런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는 사법연수원생 시절에도 소설을 썼다. 판사를 하면서는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와 <혼밥판사>라는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그는 계속 글을 썼다. 그는 마음보다 상황이 중요했다고 했지만, 내 생각에는, 그의 마음은 때론 상황과 어우러지면서도, 때론 상황을 뚫고 나왔을 것이다. 벽을 뚫고 나오는 빛, 그 이미지를 떠올리면, 어쩐지 그의 마음에 한 발 더 다가간 느낌이 든다.
판사를 그만둘 결심
언젠가 나는 그에게서 “폐소공포”라는 말이 들은 적이 있었다. 사실, 그는 나의 첫 직장이었던 법무부 법무심의관실의 상사였고, 그러다 보니 그와 자연스럽게 점심을 먹거나 이야기할 일들이 있었다. 그냥 상사가 아니라 부처의 ‘장’이었는데, 나는 꽤 당돌하게 이런 질문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혹시 판사라는 남부럽지 않은 직장을 그만두신 이유가 있으셨나요?” 당시 들었던 이야기와 이번 인터뷰에서 들은 이야기를 합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대답이 된다.
“판사 일에서 느낀 점도 많고 좋은 점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저는 일종의 ‘폐소공포’ 같은 기분을 느꼈어요. 판사는 미래가 정해져 있거든요. 서울, 수도권, 지방을 돌게 되는 판사의 인사도 예측 가능성이 높아서 나의 5년, 10년 미래를 보여주는 선배들이 눈앞에 지나다니죠. 일하는 방식도 5년, 10년이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요. 어딘지 뻔한 인생에 갇힌 듯한 느낌이 들었던 거죠.”
회사를 다니다 보면, 주위에 있는 직장 상사를 보면서 ‘저게 나의 미래겠구나.’하는 생각을 누구나 한번쯤 해보게 된다. 나 또한 그랬다. 그럴 때, 그 모습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그렇게 나의 미래가 확고부동하게 정해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 ‘정해진 미래’로부터 누군가는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그 또한 정해진 미래가 아닌, 자기가 만들어 나가는, 예측할 수 없는 삶을 바랐다.
“사건은 끝이 없죠. 컨베어벨트에 실린 것처럼 사건은 끝없이 들어오는데, 어느 순간, 내가 평생 이렇게 끝없이 사건들만 처리하며 법원에 갇혀 있는 걸 내가 ‘진짜 원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뭐가 됐든, 판사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 때 안보, 법, 경제, 국제적인 문제들이 유기적으로 얽혀 있으면서 무언가를 만드는 방위산업청의 공고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죠.”
여기에서 나는 다시 그의 상황을 뚫고 나가는 마음의 빛이라는 것을 본 느낌이 든다. 어떻게 보면, 법조인의 세계에서 판사가 된다는 건 그 자체로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판사가 되고 나면, 단독부 재판장이 되고, 그러고 나면 부장판사가 되고, 그 이후에는 서울에 올라오고, 고등법원으로 가는 식의 ‘엘리트 코스’랄 게 있다. 그도 그 길을 그저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 그는 저 수평선을 향해 나서는 새벽의 빛이랄 게 보였다. 그는 그 빛을 따라가기로 마음 먹는다.
“주변에서는 다들 ‘부장판사’를 달고 그만두라고 했어요. 보통 16년차의 판사 생활에 ‘부장’이 되는데, 독립적이고 높은 지위를 얻는 것이죠. 그런데 저는 오히려 ‘부장’이 되기 전에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부장판사가 되는 순간, 영원히 판사로 살 것 같았거든요. 너무 몸집이 커져서, 다른 자리에서는 받아주지도 않을 것 같았달까요. 그래서 저는 부장이 되기 전 15년차에 국방부 방위사업청의 과장이 되기로 했습니다. 과장이라면, 조금 더 직원들과 지지고 볶으면서, 조금 더 젊고 역동적인 마음으로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언뜻 들으면 쉬운 일처럼 보여도, 내게는 그것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처럼 느껴졌다. 삶에서 가장 큰 용기가 필요할 때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 우리에게 당연히 주어질 것을 포기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질 수 있었던 보다 큰 독립성과 높은 위계가 주어지는 안정적인 지위를 거부했다. 대신 더 벅찬 삶을, 컨베어벨트에서 벗어난 삶을 바랐다.
“저는 항상 사는 듯 살고 싶었어요.”
그는 ‘사는 듯 사는 것’을 추구한다고 했다. 그게 무어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마치 ‘재즈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답하기 힘든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그래도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조금 더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 진짜 삶을 사는 것, 상황을 비집고 나오는 마음의 힘을 조금 더 믿으면서 용기를 발휘하는 것, 그리하여 이윽고 상황이 자신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곧 상황이 되어가면서, 상황과 마음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어떤 상태에 이르러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벽을 부수고 나아가는 마음
“만약 어느 예언가가 제 인생의 미래를 보여준다고 하면, 저는 절대 안 볼 겁니다. 그러면 삶이 하나도 재미없을 것 같거든요. 인생이 뻔히 보이는 건 싫어요. 한번 뿐인 삶이니, 다양한 풍경을 보고 싶어요.”
어린 시절, 우리는 벽에 난 작은 구멍으로 세상을 본다. 무한하게 펼쳐진 세상을 상상하며 꿈을 꾼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는 조금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간다. 그러면서 점점 상상하고 꿈꾸는 힘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대개 그 세상조차 하나의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다. 그 다음에는 그 벽을 볼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다시 그 벽에 난 구멍을 찾을 수 있는 사람, 또 그 너머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 마지막으로 다시 그 벽을 부수고 나가는 사람으로 나뉜다. 정재민은 그 중 마지막 부류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생 때는 우울증 같은 게 있었어요. 왜 사는지 모르겠더라고요. 기본적으로는 다 덧없다고 생각해요. 공직 생활을 23년 하면서 공익에 봉사하며 보람도 많이 느꼈지만, 돌아서면 또 아무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해요. 1년만 지나면 또 다 덮여서 물 밑의 일이 되고, 어찌 보면 그냥 백지죠. 그런데 저는 그게 좋아요. 매년 그렇게 백지로 새해를 시작하고 싶어요. 지난 시절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그는 매번 백지에 새해를 그려나가듯 삶을 살았다. 그런데 그의 삶을 한발 뒤에서 보면, 그 궤적이 참으로 독특하고도 멋진 그림을 그려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거대한 모래 벌판 위에서 샌드 페인팅을 하는 예술가가 그려졌다. 그는 눈앞의 백지 같은 모래 위에 자신의 궤적을 그려나갈 것이고, 그의 앞에는 늘 모래 벌판만이 놓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 본다면, 그 그림은 티벳 승려의 만다라처럼 근사한 그림이 되어 있을 것만 같다.
어쩌면 우리가 삶에서 지녀야 하는 태도도 그런 것일지 모른다. 대단하고 거창한 그림을 그리고야 말겠다는 마음 보다는, 눈앞의 백지에 충실하며 나아가는 것, 어떻게든 새로운 용기를 내는 것, 마음으로 눈앞의 벽을 부수고 나아가는 것, 그런 나날들을 이어가다 보면 인생의 그림이란 저절로 그려져 있을 것이다.
판사이자 소설가였고, 외교부와 국재재판소를 거쳤으며, 군함을 만들고, 법을 만들던 그는 이제 또 다른 백지 앞에 선다고 했다. 오랜 공직 생활을 끝으로,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기존에 있던 로펌에 들어가는 대신, 새로운 형태의 로펌을 직접 창립해보고자 한다고 했다. 일사불란한 큰 조직이 유지되기 어려운 시대, 개인이나 작은 조직이 서로 느슨한 연대를 통해 자유와 힘을 동시에 추구하는 이런 시대 흐름에 맞는 새로운 방식의 로펌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그가 또 어떤 벽을 부수고 나갈지, 그의 마음은 어떤 구멍을 찾아내어 삶을 펼칠지 궁금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의 마음은 이 세상에 그에게 맞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고야 말 것 같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벽은 또 무엇인지, 나도 그처럼 그 벽의 구멍을 찾아내고, 그 너머를 상상할 수 있고 싶다고 생각했던, 참으로 귀중한 인터뷰였다.
* '정지우의 밀착된 마음' 인터뷰어 - 정지우
작가 겸 문화평론가, 변호사. 20대 때 <청춘인문학>을 쓴 것을 시작으로, <분노사회>,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 <이제는 알아야 할 저작권법> 등 여러 권의 책을 써왔다. 최근에는 저작권 분야 등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20여년 간 매일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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