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하고 발랄한 여행자 0번 바보
타로카드 0번은 시작과 출발을 상징합니다. 소년은 왼손에 장미꽃을 쥐고 있고, 세상을 다 가진 듯 가슴을 활짝 펴고 있어요. 오른쪽 어깨에는 배낭을 메고 있는데 봇짐이 가벼워 보입니다. 괴나리봇짐이라고 아시나요? 나그네가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싸서 등에 지고 다니던 보따리. 아마도 하루치의 식량 정도이나 여벌 옷 한 벌 정도 들어있지 않을까요.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아도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걸 뜻하는 듯합니다. 그의 머리 위에는 태양이 빛나고 있어요. 찬란한 금빛 햇살이 세상을 비추고, 그 모든 것을 누리고 있는 듯해요. 벼랑 끝에 서서 위태로워 보이는 것은 바라보는 사람의 감정일까요? 오히려 그는 호기심과 여유가 넘칩니다. 과연 그는 어디로 떠나려고 하는 걸까요?
저는 0번 카드를 매우 좋아합니다. 타로카드 수업을 시작할 때 0번에 대한 이야기를 한 시간도 넘게 합니다. 어디론가 떠날 때 존재감이 확장되는 걸 느끼게 됩니다. 낯선 곳에 발을 딛는 순간 눈은 반짝여요. 뭐든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싶어집니다. 경험만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말이죠.
0번 타로카드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FOOL. 바보, 어리석다는 뜻이죠. 흔히 어떤 사람을 바보라고 할까요? 뻔히 실패할 줄 알면서도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사람, 상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바보같다’고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린 바보 같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요. 꼭 어떤 일을 경험한 후에 ‘아... 내가 그 때 그걸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라고 후회합니다. 혹은 ‘그걸 했었어야 하는데, 왜 선택하지 않은 걸까.’하고 미련을 갖곤 합니다.
어떤 일이 지나가고 난 후 후회합니다. 물론 만족스럽거나 성공적이라고 여길 때도 있죠. 무언가를 알게 되는 건 철저히 경험적이다. 그래서 과거의 현자들은 모두 여행을 떠난 것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혁명가 체 게바라도 작가 톨스토이나 체호프도, 예술가 고흐도, 실학자 연암 박지원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행을 통해 책 속의 앎 이상의 것을 얻게 됩니다.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곳을 떠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죠. 한 곳에 머무르며 정착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 떠나는 것이 더 힘들어졌습니다. 가진 것 많고, 호화로운 아파트에 사는 노인일수록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이곳에서 누리는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가진 것을 내려놓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에요.
저는 여행을 떠날 때 짐을 간소하게 갖고 다니는 편이에요. 해외 여행을 처음 갔을 때는 트렁크 가득 엄청난 짐들을 채웠습니다. 혼자 다닐 때에도 매일 갈아입을 옷과 치장할 소품, 화장품까지 다 들고 다녔어요. 혹시 춥거나 덥거나 비가 올 것까지도 대비하여 완벽하게 짐을 싸야만 했어요.
하지만 여행을 하면 할수록, 떠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짐은 줄어들게 되더라구요. 이틀이나 삼일 정도는 옷을 갈아입지 않아도 충분히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속옷이나 양말은 빨아 입으면 충분했어요. 얼굴에 바르는 것은 로션이나 크림 정도. 머리감고 세수하고 몸을 씻는 건 올인원 비누 하나면 해결이 되더라구요. 그 뿐만이 아니에요. 맛집이나 여행지의 온갖 정보를 샅샅이 뒤져서 계획적인 여행은 자연히 관심 밖으로 멀어졌어요. 여행갈 장소를 성급하게 결정할 때도 많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혹은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목적지를 변경하는 일도 수두룩해졌어요. 출발과 도착 그 사이의 시간을 내 마음대로 채워나갈 수 있다는 즐거움이 커지더라구요.
여행을 통해 배운 것 중 하나는 용기입니다. 적은 짐만으로도 충분히 살게 된다는 것, 예상치 못한 상황을 헤쳐나갈 힘과 지혜를 얻게 돼요. 의도하지 않은 일을 통해 얻게 되는 결과가 놀라울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타인의 여행 후기와 맛집 후기만 의존한 채 떠나게 되면 내 힘으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 방해가 될 때가 있었어요. 문제해결력도 자연스레 커집니다. 몇 년 전 태국 방콕에서는 갖고 있는 현금이 다 떨어지고, 신용카드 현금인출까지 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어요. 막막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구요. 하지만 차근차근 생각하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고민했어요. 문득 페이스북 친구들이 생각났습니다. 제 게시판에 글을 올렸어요.
“저는 지금 방콕에 있어요. 그런데 현금도 떨어지고, 신용카드도 막혀버려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입니다. 혹시 제가 있는 곳 근처에서 여행하고 있는 분이 계실까요?”
그런데 정말이지 10분도 안되어서 답글이 온 거에요.
“언니. 제 친한 친구가 방콕에서 여행중인데 계신 곳이랑 가까운 것 같아요. 만나서 돈을 빌린 다음에 저한테 갚으셔도 될 것 같아요”
이러한 회신이 왔어요. 저는 '그랩'(동남아시아의 공유차량서비스)을 이용하여 오토바이를 타고, 돈을 빌려줄 지인을 찾으러 달려갔어요. 얼마나 아슬아슬한 일이었는지 몰라요. 그럼에도 무언가를 해냈다는 자신감과 용기가 내면에서 샘솟는 기분이었습니다. 사실 인생에서의 문제는 나를 성장시키는 하나의 배움입니다. 문제가 없다면 사는 게 편하고 쉬울 수 있겠죠. 하지만 문제와 시련을 통해 배우고 성장합니다. 여행은 어쩌면 삶의 면역력을 키우는 일이 됩니다.
자유의 상징, 혁명과도 같은 삶을 살았던 체 게바라는 남미 전역을 여행하면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았습니다. 오토바이 한 대로 친구와 여행을 떠나면서 가난한 사람들, 아픈 사람들, 고통스러운 민중들을 만났습니다. 돈 한 푼 없이 마을에서 먹을 것을 얻어 먹고, 사람들과 만나 어울렸어요. 남미의 아름다운 대 자연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고 해요. 그리고 자신이 결국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습니다. 민중을 위한 혁명가로서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심 말이죠.
물론 저는 체 게바라와 같은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할 용기나 힘도 부족합니다. 하지만 단 하나 믿는 것이 있어요. 바로 낯선 경험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것이에요. 경험 이전의 나와 경험 이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입니다.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 바라보게 될 세상의 풍경, 원치 않는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성장할 수밖에 없겠죠.
그렇게 때문에 바보는 바보가 아닙니다. 바보인 것처럼 보이지만 엄청난 힘과 잠재력과 가능성을 지닌 존재였어요. 무모한 여행같은 일이 우리의 삶에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타로카드 78장 중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그릇과 같은 0번 바보 카드가 마냥 사랑스럽습니다. 언제나 가볍게 살 수 있는 0번 바보의 삶을 지향하고 싶습니다.
몽골속담 중 ‘생각만 하고 앉아있는 똑똑한 사람보다 돌아다니는 바보가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몽골인들이 오래 전부터 믿고 신뢰하는 속담같은 말이죠. 무언가를 계획하고 규정짓기보다는 시간과 공간의 흐름에 맡기는 인생은 유목민답죠. 길이 없는 곳을 달려가는 여행같은 삶, 결국 죽을 때까지 내가 만들어가는 길만 있을 뿐이죠. 그래서일까요. 2020년 출간한 여행 에세이 『바람의 끝에서 마주보다』는 한 달간 아이와 몽골 여행을 하면서 보냈던 시간의 기록입니다.
글쓴이 : 김소라 작가
『바람의끝에서마주보다』 『사이판한달살기』 『맛있는독서토론레시피』 등 다양한 책을 썼습니다. 글쓰는 생활여행자로 살고 있으며 수원에서 작은 책방 ‘랄랄라하우스’를 운영합니다. 경쟁하지 않는 교육을 지향하며 모든 삶에서 배움을 찾아나가려 합니다. 고등학생인 아들은 삼척에 있는 ‘삼무곡청소년마을’이라는 비인가 대안학교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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