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랫집 여자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건 재작년의 초여름, 그 여자가 우리 빌라 정원에서 혼자 책을 보고 있던 모습 때문이었다. 2층인 우리 집과 1층인 아랫집은 거의 동시에 이사를 왔다. 어느 날 내가 주방 베란다 창문을 열었는데 그 여자가 우리 빌라의 작은 정원에서 나무들에 둘러싸인 채 간이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나는 '무슨 책을 읽고 있는 걸까? 나도 저렇게 저기 앉아서 책을 보고 싶다' 고 생각하면서 책 표지를 흘끔흘끔 살폈다. 그리고 아랫집 여자와 한번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왠지 대화가 통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년이 지난 지금까지 말 한마디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어쨌거나 책 읽는 사람이 귀한 시대에 책 읽는 이웃이 반갑게 느껴진다.
나는 결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책을 읽고 있으면 무슨 책이냐고 묻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 책이 그 사람에게 어떤 즐거움을 주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나와 같은 책을 읽은 사람이 있다면 그 책이 어땠는지 질문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반대로 내가 어떤 책을 읽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와 "그 책 재밌죠?"하면 그 사람이 뇌리에 인상 깊게 박힌다.
오래전 어느 날 카페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다가 갑자기 벅찬 감동이 내 안에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세상의 수많은 작가들이 온 힘을 다해 나를 돕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작가들은 내게 진실을 알려주려고 했다. 나는 그들의 진심을 느꼈다. 그들과 연결되었다. 그건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다.
어떤 책을 읽다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바로 다음 문장을 읽어나가지 못하고 책을 테이블 위에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흥분한 상태로 펜을 들어 하얀 냅킨 위에다 이렇게 썼다. 세상에, 작가들이 나를 돕고 있어. 이 놀라운 사실을 이제야 알았어.
책이 주는 기쁨과 흥분, 감동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책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 느낀 것들을 말할 사람이 없어서 좀 외로웠던 것 같기도 하다. “넌 개츠비가 왜 그랬다고 생각해?” “완전 고리오 영감이네.” 같은 말을 막 던져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친구를 나는 아직도 꿈꾸고 있다.
*글쓴이 - 진솔
어린이들과 책 읽고 이야기 나누는 독서교실 선생님입니다. 초등 아이 키우는 엄마이기도 합니다.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에 '오늘도 새록새록'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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