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새 대신 화분을 키울래요_슬기로운 고딩생활_은호랑이

2022.04.06 | 조회 7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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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새 대신 화분을 키울래요_슬기로운 고딩생활_은호랑이

새 학기가 시작되고 약 한 달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나에게 익숙했던 장소와 얼굴들을 몹시도 그리워하는 중이다. 도심에 위치한 서울시 소재 몇몇 학교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학교가 그러하듯, 이번 새 학교의 위치는 마치 큰 산이 두 팔 벌려 학교를 자기 품의 한가운데에 껴안고 있는 듯, 산과 매우 가깝다. 이럴 때 점심 식사 후 부른 배를 통통 쳐가며 살찌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함께 둘레길을 걸어줄 동지가 없다는 사실은 아쉬운 정도가 아니라 몹시 외롭기까지 하다.

나는 교감 선생님이 계시는 가장 큰 교무실에서 여러 비담임 선생님들과 함께 근무하고 있다. 각 학년 담임 선생님들은 한 교무실에 모여 학년 관련 업무를 처리한다. 그래서인지 큰 교무실에 있다보면 행정실 직원이 된 것 같기도 하고, 더 정신 줄을 심하게 놓아버리면 내가 마치 지하철에 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무질서한 모습으로 일어서 어디론가 떠났다가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아무 말 없이 앉는 사람들. 그러다 또 고개를 들어 현재 자신의 장소를 확인하듯 시계를 보고 떠나가는 동료 교사들이 타인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지하철에 머무는 행인 같은 내 이 마음은 언제쯤 사라지게 될까? 역시나 나에게 한달은 짧았지싶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학생들이 생각보다 영어라는 과목을 싫어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나는 전교생의 핸드아웃을 매일 걷어, 매일 검사하는 수고로움을 자처하고 있는 중이다. 검사 도장만 찍는 것이 아니라 어떤 아이에게는 질문의 답을, 어떤 아이에게는 응원의 메시지를, 또 어떤 아이에게는 약간의 놀림과 농담을 섞어가며 나름의 교감을 시도하고 있다. 이 일은 나의 일과 중 가장 성가시면서 동시에 가장 재미있고, 또 감동을 준다. 아이들은 관심을 주면 주는 만큼 쑥쑥 큰다. 꼭 말할 수 있는 화분이 있다면 아이들 같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좋은 대학을 많이 보내는 고등학교를 명문고라 이야기한다. 실제로 충실한 생활기록부를 쓰기 위해서는 학교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활동들-과목별 경시대회, 탐구대회, 봉사활동, 방과후 수업 등-이 제일 중요했던 시절이 불과 얼마 전까지였다. 얼마만큼 ‘그러한 것들’에 열과 성을 다하는 교사와 학교를 만나는지에 따라 생기부의 페이지 쪽수가 달라졌고, 소위 말하는 훌륭하고 모범적인 학생이란 생활기록부가 다채롭고 풍부하여 마치 화려한 공작새와도 같은 학생을 가리키기도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요즘 교육계는 다시 학생과 교사, 학부모 모두를 괴롭게 만들었던 복잡한 평가지표를 대폭 축소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교사 추천서와 자소서가 폐지되고, 학생부 종합전형에서 반영되는 생활기록부의 내용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각 교과 선생님께서 써주시는 ‘과목세부특기사항’, 담임 선생님이 학년 말에 써주시는 ‘행동발달특기사항’을 제외하고 거의 사라졌다시피 한 것이다. 더 이상 스스로 동아리를 만들어 부장이라는 감투를 쓰지 않아도 되고, 옆 친구에게 질세라 끊임없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 제출하지 않아도 되며, 교사가 되고 싶은 학생들에게는 당연히 여겨졌던 몇백 시간의 교육 봉사활동도 의미 없게 되었다. 아마 비교적 최근에 고등학교를 졸업했거나 고등학생의 자녀 혹은 지인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 고등학생들이 얼마나 과로한 삶을 살았는지 미처 몰랐을지도 모른다.

요즘 대입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서류평가라지만, 학생들의 생활기록부를 수치화하여 평가하는 것이 아니기에 대입에 관심 있는 당사자들도 사실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것인지 당혹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생활기록부의 서류평가는 ‘정성평가’로 이루어지고, 평가 요소는 이에 맞춰 미리 공개되고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 변화는 평가 요소 중 ‘전공적합성’을 ‘진로역량’으로 바꾸고, ‘인성’과 ‘발전가능성’을 ‘공동체역량’으로 통합한 점이다. 역량이라는 단어가 연거푸 눈에 띈다. 사전을 찾아보니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힘’이라고 풀이된다. 아직 고등학교 교과목들을 배워가기만도 버거울 수 있는 학생들에게 대학의 세부 전공 적합성을 생활기록부를 통해 증명해 내라는 말 자체가 애초에 어불성설이 아니었을까. 이제 아이들은 좋아하는 일에 돌진할 수 있는 능력과 공동체 내에서 살아남은 본인만의 저력을 보여줄 차례이다.

단어 한 두 개가 바뀐 것이 무슨 큰 차이가 있겠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듯, 우리 모두가 다같이 노력해나가고 있다는 점을 알아줬으면 한다. 비록 나 한 명의 교사가 이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바는 없다 하더라도, 화려한 깃털을 뽐내는 공작새 같은 학생들을 키워 나가는 것이 나의 일이 아니라는 것에는 참으로 진심이다. 학교에는 사랑과 관심을 받으면 어떤 것으로도 성장할 수 있는 쌍떡잎식물 같은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한 명의 빠짐도 없이 실제로 모두가 갖고 있고, 사실 어쩌면 그들이 보여줄 수 있는 전부일 수도 있는 그것. 아이들의 쌍떡잎이 나의 속삼임을 들으며 행복하게 커가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곳을 좀 더 빨리 애정할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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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소개 - 은호랑이

서울 현직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고딩들과 소통한지 10년이 넘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언제나 accessible한 존재이고자 노력합니다.

페이스북 - http://facebook.com/eunho.kim.7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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