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른 일곱, 지극히 평범한 회사원 집안의 둘째딸로 태어난 지은이라는 사람이 적어도 7가지가넘는 ‘업(業)’이라는 것을 넘어가는 과정 속 시간, 비용 두려움이라는 존재와 싸우며 부캐(부캐릭터)를 얻어간 순간의 이야기들.
직장을 다니다 학생으로 돌아가면 자유가 저 멀리서 달려와 내 품에 안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기대는 대학원을 들어갈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때부터 파도를 만난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공부를 하는 데는 시간뿐 아니라 ‘돈’이라는 짝꿍이 함께 따라왔기 때문이다. 직장인에게 모닝커피와 점심값만 해도 최소 생활물가는 하루 만원이 기본이었다. 친구와 약속이라도 잡을 때라면 만원짜리 최소 세네 장은 필요했다. 많지는 않았지만 월급이라는 돈은 삼십 대 초반에게 먹고픈 음식, 보고픈 친구들, 가고픈 여행을 가게 해 주는 열쇠였다. 그 열쇠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면? 삶을 지탱해준 소소한 행복들이 휘리릭 사라질 것만 같았다. 취직한 이후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다 갑자기 손을 벌리기도 난감한 시점이었다.
직장에서 학교로 가는 길에 꿈 같은 환상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길은 만들어졌다. 지나 다니던 문이 잠겼다고 해서 문 앞에 우두커니 서있을 수는 없었다. 마음 놓고 공부만 하는 ‘학생’이 될 수 없음을 인식한 순간 공부와 병행할 수 있는 일을 후다닥 구했다. 새로 취직한 회사에서는 이전 회사만큼 월급을 받을 수 없었지만, 업무 중에 눈치껏 공부를 할 수 있는 약간의 시간과 칼퇴근이 따라왔다. 새 직장에서는 학교와 일을 병행하는 순간을 이해해 주었고, 새로운 직업을 완전히 구할 때까지 회사를 다닐 수 있는 선택권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그렇게 재정적 불안함은 조금 누그러졌고, 또 다른 문을 열 수 있는 작은 열쇠가 손에 올려진 듯했다. 매일 아침 얼음이 가득 찬 카페 아메리카노 대신 스틱 커피를 휘휘 저어 마시는 날이 늘어났지만 나름대로 평온을 찾아갔다. 직업을 바꾸기 위한 투자가 쌓여갈수록 취직과 연결되는 자격증도 하나 둘 늘어갔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처음 계획한 순서대로 흘러가는 듯했다. 그때까지, 나의 미래는 탄탄대로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변수는 상상도 못한 방향에서 다가왔다.
삼 년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대학원 졸업을 하고 새로운 일을 조금씩 늘려가며 막연히 꿈꾼 상상을 눈 앞에서 하나씩 이루던 시기였다. 몇 달 뒤면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새로운 직업에 빠져들기 위한 준비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 아빠의 몸에 암이라는 세포가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집안 분위기가 어수선해졌고, 내 마음속에는 ‘얼른 일해야 해’라는 마음이 ‘괜찮을 거야’라는 마음을 밀어내고 있었다. 변수가 만들어낸 큰 바람의 파동은 쓰나미처럼 몇배로 커져 또 다가왔다. 몇 달 뒤 코로나라는 지독한 감기가 온 세상에 퍼져버린 것이다. 나의 새로운 직업은 오프라인, 그것도 1:1 대면이 80%이상을 차지하는 상담이라는 ‘업(業)’종이라 코로나 직격탄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렇게 혹독한 감기가 나의 꿈을 무너뜨리는 듯했다.
코로나라는 이름의 새로운 변수라는 허들 앞에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코로나는 곧 한발 내딛으려는 나의 발목을 꽉 붙잡아 버렸다. 초기 계획대로라면 길어도 1년 안에 언니와 전공을 살려 상담 센터를 차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모든 준비는 일시중지가 되었다. 팬데믹이라는 변수 앞에서 나는 한없이 무기력한 존재였다. 그 가운데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마냥 눈물만 뚝뚝 흘리기는 어려웠다. 학교를 다니고 자격증을 따느라 수중에 조금 모아둔 돈은 거의 떨어진 상태였다. 아빠의 암을 내 손으로 낫게는 할 수 없지만 좋다는 음식을 다 구해와 아빠를 살려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만 했다. 그렇게 다시 백지가 된 상황에서 B노선을 찾아보았다.
사람들에게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힘이 주어진다고 한다.
다니던 회사에서는 코로나 직격탄과 가족이 아픈 순간을 맞닥뜨린 내게 안정을 찾을 때까지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독이며 새로운 길을 찾다 보니 오프라인 대신 온라인에서 일터를 찾을 수 있었다. 온라인 상담은 휴대폰과 컴퓨터만 있다면 장소에 구애없이 일할 수 있었다. ‘당장은 코로나 시기만 버텨 보자’라는 마음으로 까만 밤, 또다른 하루의 시작 버튼을 눌러 온라인 상담을 시작했다. 그렇게 새로운 업의 세계에 조금씩 빠져들었다.
우연히 열린 문을 통해 전까지 몰랐던 넓은 세상을 만났다
온라인 상담을 하며 나는 내가 살던 세상이 너무나도 좁았음을 알게 되었다. 자격증을 딸 때까지 만났던 상담 내담자들은 멀어도 내가 사는 지역에서 한시간 거리에 살고 있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랜선으로 연결된 세계에서는 시공간의 경계선이 처음부터 없었다. 매일 밤, 온라인을 통해 지구 반대편에 거주하거나 직업의 경계까지 훌쩍 뛰어넘은 이들을 만났다. 비록 직접 만난 것은 아니었지만 일에 몰입하는데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직장인이라는 직업인에서 상담사라는 직업인으로 나아가는 하루하루를 채워가다 보니 어느 새 달력 열두장은 샤라락 넘어갔다. 불안 속에 시작한 일이었지만 경험이 차곡차곡 쌓여 갈수록 불안이라는 희뿌연 구름 덩어리는 물이 되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본캐와 부캐의 경계선을 하루에도 여러번 넘나들었다. 낮에는 회사원으로 밤과 주말에는 상담사라는 캐릭터로 살아갔다. 그 누가 나에게 “직업이 무엇인가요?”라 물어보았을 때는 ‘그냥 이런 저런 일 합니다’로 대답했다. 코로나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내 마음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 갔다. 물론 예상치 못한 변수가 삶을 흔들어 놓을 때는 그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두려움은 가끔 찾아왔지만, 변수와 허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캐릭터는 나의 하루를 조금씩 버텨내고 또 다른 내일을 기다리게 만들어 주었다.
다시 되돌아보면 완벽한 계획이란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다. 자유를 꿈꾸며 선택한 공부라는 과정에서는 ‘일’이라는 필요충분조건이 따라왔고, 또 다른 일을 시작해도 기존의 일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엇을 해야 할 때 완벽이라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는 유연함이라는 것이 새로운 계획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삼십대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쌓아가며 조금씩 채워졌다.
* 지은이
서른 일곱의 호기심쟁이 입니다. ‘직업(業)’을 넘어가는 과정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 그리고 두려움이라는 존재와 싸운 기억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은 ‘스타트업 코파운더(co-founder), 상담심리사, 학생’을 병행하며, 순간의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에서 '부캐의 발견'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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