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함께 외할아버지를 만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아마 다섯 살이나 여섯 살 정도 되었을 것이다. 엄마는 뇌성마비 때문에 수시로 몸이 뒤틀리고 굳었다. 그것 때문에 두통이나 관절염, 몸살 같은 온갖 병을 달고 살았다. 그래서 엄마는 몇 번인가 내 손을 잡고 병원을 찾아가 주사를 맞고 약을 타왔다. 내과 의사인 외할아버지의 병원이었다. 할아버지는 엄마를 익숙하게 진찰했지만 엄마는 할아버지의 병원을 잘 가지 않았다. 엄마가 아픈 몸에 나까지 데리고 집을 나서는 일이 힘들었던 탓인지, 할아버지가 엄마 오는 것을 꺼렸던 탓인지, 출가외인이 친정 드나드는 걸 흉잡는 시절이라 그랬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엄마와 으리으리한 할아버지의 병원을 다녀오는 일은 드물게 신이 나는 일이었다.
할아버지를 만나고 오는 날마다 엄마는 아픈 표정보다 기분 좋은 표정을 더 많이 지었다. 나는 그런 엄마를 보는 것이 좋았다. 뿐만 아니다. 할아버지를 만나고 오는 날이면 엄마는 노점 리어카에서 무언가를 사서 손에 쥐어 주고는 했다. 그것이 번데기일 때도 있었고 삶은 고디(다슬기)일 때도 있었고 볶은 은행일 때도 있었다. 그걸 이미 다 먹어봤다는 엄마가, 심지어 그걸 사서 내 손에 쥐어주는 엄마가 그렇게 멋있어 보이고 뿌듯할 수가 없었다. 내가 첫째를 임신하고 나서 입덧 때문에 아무 것도 삼키지 못할 때에도 고디와 은행만큼은 맛있게 먹을 수가 있었다. 신문지를 접어 만든 봉투에 그 특별한 것을 담아서 건네받을 때의 설렘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엄마와 그러고 외출할 수 있었던 날이 몇 번이 채 되지 않았을 텐데 엄마가 나의 엄마라서 황홀했던 그 순간이 어지간히도 몸 속 깊이 각인이 된 모양이었다.
엄마는 그날 시내 지하상가 옷집 유리창 앞에서 내 손을 잡은 채로 걸음을 멈추었다. 통유리 너머로 찰랑찰랑한 소재의 홈드레스 몇 벌이 걸려 있었다. 웬일로 엄마가 그 중 하나를 가리키며 가격을 물었다. 잿빛 소용돌이 무늬가 하늘하늘한 원피스였다. 옷집 아줌마 등살에 밀려 거울 앞에 서 보더니 엄마는 다른 옷을 더 둘러볼 생각도 않고 지갑을 꺼내 계산을 하겠다고 했다. 옷집 아줌마가 엄마를 보고 예쁘다고 예쁘다고 정신없이 수선을 피워서 그런 것 같았다. 몸만 안 이랬으면 참 이쁜 사람인데, 하는 말을 덧붙이면서 혀를 끌끌 차더니 곧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다. 엄마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울음이 나려고 하는 스스로가 너무 선량하고 대견해서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손가락이 굳은 엄마가 지갑에서 돈을 제대로 꺼내지 못하자 낼름 지갑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서 돈을 꺼내 가기도 했다.
그래, 이 날은 참 예외적으로 기분이 나빴다. 엄마와 손을 잡고 길을 나설 때마다 사람들은 대놓고 우리를 구경했다. 엄마를 한번 보고, 나를 한번 보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 나는 그 중에 몇몇을 골라잡아서 그이가 고개를 돌릴 때까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쏘아보았다. 내가 만든 일종의 경기였다. 상대방이 내 반응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다던가, 엄마가 그런 나를 보며 기특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주고 나면 분이 좀 풀렸다. 그런데 그날, 엄마가 옷집 앞에 멈춰서면서 전격적으로 지하상가의 구경거리가 된 그 시점부터는 심사가 아주 뒤틀려버렸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경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가? 요란하게 혀를 차던 옷집 아줌마 때문이었나? 아니다. 어쩌면 번데기도, 고디도, 은행도 아닌, 엄마 옷을 산 엄마 때문에 화가 났을 지도 모르겠다. 유일하게 엄마를 위해서 뭔가를 산 그 날이 나에게는 할아버지 병원을 다녀오고도 유일하게 기분 나쁜 날이 되어버렸다.
어떤 남자의 눈빛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술에 취했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들었으니까. 게슴츠레한 눈으로 엄마를 노려보던 그 남자. 옷집을 나서고 얼마 뒤 엄마에게로 다가와 세게 부딪힌 그 남자가 엄마의 성기를 지칭하는 어떤 단어를 내뱉었던 것 같은데 정확하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이날 일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심란해지는 건, 그 남자가 엄마의 몸을 만졌는지,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위협만 했는지를 확실히 모르겠다는 거다. 굉장히 모욕적인 말을 지껄였던 것 같은데 엄마는 불쾌한 표정을 짓기만 할 뿐 눈을 내리깔고 다짜고짜 내 손을 잡아당겨서는 집으로 빠르게 걸었을 뿐이다. 곧 따라올 듯이 우리를 지켜보던 그 남자는 다행히 자기 갈 길을 갔다.
엄마는 집에 돌아온 이후로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나에게 당부를 했다. 그리고 잿빛 소용돌이 무늬가 하늘하늘한 원피스는 옷장 서랍 안에 들어가서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인가 사람들 눈을 피해 엄마가 입지 않는 새 원피스를 꺼내어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곱씹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엄마 참 예뻤는데, 아빠가 알았더라면 또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피웠을까, 아깝다, 속상하다, 뭐 이런 생각들이 마구 뒤섞였다가 서랍을 닫고 나서는 잊고 마는 식이었다. 엄마가 외할아버지한테 용돈을 조금 받은 것, 돈 못 버는 남편에게 그 돈을 모조리 고하고 갖다 바치지 않은 것, 옷 한 벌을 사서 입어본 것, 사람들이 대놓고 구경하고 혀를 찬 것, 이상한 남자가 다가와서 갑자기 추행을 한 것, 그리고 말 못하는 것……. 어지러웠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지도 모른다. 엄마가 나의 엄마라서 황홀한 순간 사이에 엄마가 나의 엄마라서 억울하고 화가 나는 순간이 시작되었던 것이. 내가 기억하는 한은 그렇다.
그 즈음 언젠가 엄마는 나를 꽤 유명한 만둣집에도 데리고 간 적이 있다고 했다. 바쁜 때가 아니었는지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조리 몰려와서 우리 두 사람이 만두 먹는 광경을 또 대놓고 지켜보았다고 한다. 나는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데 엄마는 그때 내가 했던 말을 두고두고 반복하고는 했다.
“가라! 다 가라!”
별 말도 아닌데 엄마는 그 말을 흉내 내면서 매번 웃었다. 몰려왔던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는 웃음을 터뜨리면서 “그래. 그래. 이렇게 몰려와서 쳐다보면 제대로 못 먹지. 미안하다. 안 볼게. 간다. 많이 먹어라.”하고 자리를 비켰다는 것이다.
“가라! 다 가라!”
어렸을 때는 어렵지 않던 그 말이 크면서 점점 더 어려워졌다. 남들이 엄마를 보는 시선으로 엄마를 보고, 나를 보도록 길들여지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날 엄마가 내 말을 듣고나서 두고두고 기뻐했던 것은 내가 남들이 보는 눈에 잠식당하거나 동요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피해의식으로 위축되거나 움츠러들기는커녕 나는 구경거리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소리치는 아이의 주장이 반가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기억도 하지 못하지만 엄마만큼은 잊지 않고 기억하던 그때 그 순간은 어쩌면 길들여지지 않은 나의 시선을 되찾도록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룹홈에서 보내는 깜깜한 밤, 아이들이 흔들리는 마음을 안고 혼자만의 앓이를 할 때 길들여지지 않은 시선으로 화답하는 이모가 되도록 이끌지도 모르겠다.
‘보이지 않는 가슴’
그룹홈에서 일하는 보육사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그룹홈에서 일하는 나의 이야기가 당신과 우리의 이야기로 나누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영
아동그룹홈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입니다. 내 시간의 45%는 네 아이와 함께 그룹홈에서 보내고, 나머지 55%는 내가 낳은 두 아이와 남편이 있는 집에서 보냅니다. 집과 일터, 경계가 모호한 두 곳을 오가며 겪는 분열을 글쓰기로 짚어보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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