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로망은 현실이 된다_김현정

2024.09.21 | 조회 1.09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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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Unsplash의Abby Rurenko
Unsplash의Abby Rurenko

마당 있는 집

마당 있는 이층집은 나의 오랜 로망이었다. 마당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한가롭게 책을 읽는 상상만 해도 나른한 행복감이 밀려들었다. 아주 어렸을 때 주택에 살았던 기억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 시절의 기억은 희미한 조각으로 드문드문 남아있을 뿐이다. 2년간 캐나다에서 살 기회가 생겼을 때 남편과 나는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주택을 택했다. 한국의 아파트에 살면서 딱히 불편한 건 없었다. 오히려 커뮤니티 시설이라든가 택배 보관 시스템 같은 아파트의 편리한 서비스를 마음껏 누리는 편이었다. 그래도 “집에서는 뛰면 안 돼” 같은 훈계를 늘어놓을 필요가 없고 문만 열면 마당이 나오는 주택에서 아이를 키워보고 싶었다.

캐나다에서 첫 1년을 보낸 집은 오타와의 한적한 교외 마을에 자리 잡은 타운하우스였다. 윗집이나 아랫집은 없지만 옆집과는 벽이 붙어 있는 구조였다. 완전히 독립된 형태가 아니라는 게 아쉽긴 했지만 꽤 괜찮은 집이었다. 뒷마당이 넓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넷이서 야외용 테이블을 꺼내놓고 바비큐를 해 먹기에는 충분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그릴 위에서 두툼한 스테이크가 익어가는 냄새를 맡으며 웃고 떠들다 보면 순도 100%의 행복감이 느껴졌다. 눈이 무릎까지 쌓일 정도로 폭설이 내린 날이면 마당으로 우르르 몰려 나가 미끄럼틀도 만들고 굴도 팠다. 부츠 속으로 눈이 푹푹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이글루를 만들어보겠다며 눈 속을 뒹굴기도 했다. 네댓 평쯤 되는 뒷마당은 거의 콘크리트 블록으로 덮여 있어서 관리도 쉬웠다. 마당이 주는 낭만을 누리기에 제격인 곳이었다.

앞마당은 달랐다. 모퉁이에 있는 집이라 앞마당은 제법 넓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쯤은 앞마당의 잔디를 깎고 굴러다니는 낙엽도 주워 담아야 했다. 마당 있는 집에서 사는 일이 그저 낭만적이지만은 않다는 현실을 슬슬 자각할 무렵, 길고 긴 오타와의 겨울이 시작됐다. 그곳의 겨울은 혹독했다. 하루걸러 하루씩 눈이 내렸다. 탐스럽고 예쁜 눈이 하늘하늘 내리기도 했지만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굵은 눈발이 마구 쏟아지는 날도 많았다. 폭설이 내리는 날이면 각자 몸집에 맞는 눈삽을 하나씩 들고 집 앞에 모였다. 시작은 늘 넷이었지만 마지막까지 남는 건 남편뿐이었다. 아이들은 항상 처음에는 신나서 삽을 들고 뛰쳐나갔지만 금세 나가떨어졌다. 삽질을 시작한 지 딱 10분이면 아이들은 너무 춥고 팔이 아프다며 꽁무니를 뺐다. 김이 펄펄 나는 핫초코를 끓여다 주면 소꿉놀이를 하듯 차가운 눈밭에 앉아 호로록 마시고는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따금 어는비도 쏟아졌다. 영어로 ‘프리징 레인(freezing rain)’이라고 불리는 어는비는 우박과는 달랐다. 분명히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 물방울인데 물체나 지면에 닿는 순간 얼음으로 돌변했다. 하늘에서 어는비가 후드득 떨어지면 탕후루에 입혀진 설탕 코팅 같은 얇은 유리막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 비가 그치고 해가 뜨면 얇은 얼음 막으로 뒤덮인 세상은 투명한 수정 구슬같이 신비롭게 반짝였다.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잃고 있다가 뒤늦게 만만치 않은 현실을 깨닫기 일쑤였다.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는 무거운 얼음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땅으로 고꾸라졌다. 운전을 하던 중 어는비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갓길에 차를 세우는 일도 더러 있었다. 자동차 앞 유리를 덮은 얼음을 조심스레 깨고 허리가 아프도록 눈을 치우면서 집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힘들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마당 넓은 집

캐나다 생활 1년 만에 토론토로 이사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두 번째 집을 구할 무렵엔 담장 밖에서 바라보는 삶과 담장 안에서 직접 경험하는 주택 생활이 상당히 다르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바깥에서 들여다볼 때는 마당에서 커피를 마시고 꽃을 가꾸는 삶이 한없이 여유롭게만 느껴졌다. 마당 있는 집에서 1년을 살면서 지루한 노동과 뜨거운 땀방울 없이는 느긋한 커피 타임도, 아름다운 정원도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달았다. 두 번째 보금자리를 구할 때도 여전히 마당 있는 주택을 원하긴 했다. 다만 집을 가꾸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쏟아붓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들이 뛰어놀 공간은 있지만 너무 많은 노동을 요구하지는 않는 그런 집이면 딱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간관계에서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치우치면 힘을 가진 쪽은 ‘갑’, 힘이 없는 쪽은 ‘을’이 된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의 세입자는 ‘을’도 아닌 ‘병’이나 ‘정’쯤 되는 존재였다. 사람들은 전염병의 공포에 떨며 이웃과의 접촉을 줄일 수 있는 교외 주택가로 몰려들었다. 교외 주택의 인기가 치솟자 집주인들은 마치 인재를 뽑는 회사 대표처럼 깐깐하게 세입자를 골랐다. 집을 구하는 사람이 직업, 소득 현황, 통장 잔고 같은 온갖 개인 정보를 빼곡히 적어 넣은 서류를 제출하면 여러 후보의 서류를 받아 든 집주인이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세입자를 선택했다. 우리 가족처럼 시민권이나 영주권 없이 오직 다른 나라 여권만 가진 외국인은 가장 인기 없는 세입자였다.

집을 비워줘야 할 날이 가까워지는데 이사 갈 집은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그쯤 되니 우리의 희망 사항 같은 건 모두 사치처럼 느껴졌다. 몇 번의 낙방 끝에 간신히 빌린 집은 마당이 아주 넓었다. 메이플이라는 예쁜 이름의 동네는 영화 <트루먼 쇼> 세트장처럼 단정했다. 집 외관도 근사했다. 좀 낡긴 했지만 널따란 마루도, 탁 트인 창도, 시원한 테라스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치고는 꽤 괜찮은 집이라고 기뻐하며 뒷문을 여는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집주인이 이미 두어 달쯤 비워둔 집이라는 이야기를 미리 들었기에 어느 정도 짐작은 했었다. 그래도 마당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름 모를 잡초들이 마당을 점령하고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과 이따금 쏟아지는 시원한 빗물을 자양분 삼아 잔뜩 웃자란 모양이었다. 평범한 잔디깎이로는 어떻게 해볼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태였다.

 

잔디 깎는 남자, 잡초 뽑는 여자

천신만고 끝에 찾은 집이 정글 같은 꼴이라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비보를 전해 들은 남편 친구가 상업용 잔디깎이를 싣고 집 앞에 나타났다. 딱 봐도 성능 좋게 생긴 매서운 잔디깎이의 날카로운 칼날은 무엇이든 베어버릴 기세로 윙윙 돌아갔다. 마당에 있는 풀을 모두 베어버릴 듯 득의양양하게 덤벼드는 그를 멈춰 세우고는 사방을 둘러봤다. 처음에는 뒤죽박죽 엉망진창처럼 느껴졌던 마당이 제법 근사해 보였다. 마당 뒷문 근처의 경사진 땅에는 기다란 옥수숫대를 닮은 풀이 주르륵 서 있었고 호박처럼 생긴 열매가 달린 풀도 보였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씨앗이 얼떨결에 뿌리를 내린 듯 각양각색의 꽃이 규칙이라고는 없이 저마다 엉뚱한 곳에 피어 있었다. 하나로 뭉뚱그려 잡초라고 부르기에는 미안할 정도로 다채로운 풍경이었다.

뒷마당에 비밀의 화원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예쁜 식물들이 마음껏 자라도록 내버려 두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북미의 주택가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다. 주택에 사는 사람은 행인이 미끄러져 다치지 않도록 집 앞의 눈을 제때 치워야 하고 동네 분위기에 맞춰 마당을 열심히 관리해야 한다. 잔디깎이를 둘러멘 남편 친구의 재촉에 비밀의 화원을 만들고 싶다는 철없는 꿈은 내려놓고 뒤로 물러섰다. 캐나다에 터전을 잡고 산 지 수십 년째인 그는 뭐 별일도 아니라는 듯 기계를 둘러매고 뒷마당의 풀을 쓱쓱 베어냈다. 잔디깎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정강이보다 높이 자란 풀을 걷어냈다. 간신히 밑동만 남은 풀에서 후덥지근한 여름 공기를 타고 향긋한 풀 내음이 올라왔다. 잘려 나간 풀을 모두 종이봉투에 집어넣고 마당을 둘러봤다. 확실히 잡초가 잔디보다 많았다. 사납게 풀밭을 휘젓는 칼날을 피해 살아남은 키 작은 보랏빛 꽃과 구석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민들레를 보니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정글 같았던 뒷마당이 제법 그럴듯한 공간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 부부는 다시 마당 가꾸기에 열을 올렸다. 풀이 좀 높이 자랐다 싶은 날이면 남편은 어김없이 잔디를 깎았고, 나는 틈이 날 때마다 마당으로 나가 잡초를 뽑았다. 나름대로 애썼지만 옆집 마당에는 비할 바가 안 됐다. 폴란드 출신의 노부부가 가꾼 옆집 마당은 잡지에 나와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흠잡을 데 없이 잘 관리된 잔디와 정해진 자리에 예쁘게 핀 각양각색의 꽃, 적재적소에 놓인 아름다운 조각상이 옆집 마당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담을 맞댄 옆집의 완벽한 마당에 비하면 우리 집 마당은 아마추어, 그것도 초보자의 솜씨가 느껴지는 어설픈 마당이었다.

그래도 잔디 깎는 남자와 잡초 뽑는 여자가 가꾼 마당은 꽤 흥미진진했다. 마당 한 귀퉁이에 놓아둔 깻잎 화분은 물만 줘도 쑥쑥 자랐다. 해가 뜨거운 날 호스를 치켜들고 물을 뿌리면 키가 2미터쯤 되는 무궁화나무 위로 무지개가 생겨났다. 회갈색이 도는 깃털을 가진 새 한 쌍이 마당에서 제일 튼튼한 나무에 둥지를 튼 일도 있었다. 새들은 마당에 뿌려놓은 쌀알을 주워 먹으며 한동안 알을 품었다. 마침내 알을 깨고 새끼들이 세상 밖으로 나온 날,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새끼들은 처음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입을 벌려 어미가 주는 먹이만 겨우 받아먹던 새끼들의 동작이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마침내 새끼들이 날갯짓에 성공하자 어미 새는 새끼들을 이끌고 하늘 높이 날아갔다.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던 건지 마당을 한 바퀴 도는 새 가족을 향해 우리도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잘 가꿔진 마당이라거나 당당하게 자랑할 만한 마당은 절대로 아니었다. 버려진 수풀 같았던 마당을 그래도 뛰어놀 만한 공간으로 바꾸는 일이 쉽지도 않았다. 그래도 상상과는 전혀 다른 마당을 포기하지 않고 보잘것없는 솜씨로 날마다 쓸고 닦은 끝에 나의 로망과 조금은 닮은 마당을 얻었다. 아이들은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틈날 때마다 마당으로 달려 나가 온몸이 흠뻑 젖도록 뛰어놀았다. 마당이 눈으로 덮인 날에는 서로 눈썰매를 끌어주며 넓은 마당을 마음껏 누볐다. 마당을 가꾸느라 제법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지만, 땀과 노력으로 일군 마당이었기에 그곳에서 얻은 평범한 행복이 더욱 값지게 느껴졌다.

 

 

* 글쓴이 - 김현정

제법 긴 시간 경제/경영 서적을 번역해 왔다. 책을 좋아해 공부도 내팽개치고 독서에 빠져 살던 학창 시절, 한 여성의 인생 여정을 그린 소설 <조개줍는 아이들>을 읽고 번역가의 꿈을 키웠다.

책이 좋아서 마흔 권이 넘는 책을 번역하고 나니, 이제 내 글도 쓸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긴다.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 마음과 세상을 향한 관심을 날실과 씨실처럼 엮어 브런치, 오마이뉴스,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다. 오래오래 글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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