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분도 넘게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 중앙에 있는 주문대를 지나 빵 진열대로 갔다. 마음먹은 ‘초코 소금빵’이 솔드아웃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쭈뼛거리다가 물었다. “이건 다 나갔나 보네요.”, “네, 아침에 한 분이 엄청 많이 사가셔서요.” 그 집에서 먹어본 유일한 빵이었다. 그래서 천천히 다른 빵에 대해 읽어본 후, ‘버터 소금빵’을 골라 들었다.
이 집에 이사 온 1년 5개월 전부터 한 달에 두어 번 정도 가곤 했던 동네 카페가 얼마 전 실내 리모델링을 했다. 전보다 의자가 더 편해지고, 열 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커다란 테이블도 생겼다. 보통 이런 크고 길쭉한 테이블에서는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거나 책을 읽기가 좋다. 가구뿐 아니라 전체적인 톤도 바뀌었다. 전에는 단정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푸근하다. 그래서 전보다 자주 가게 된다. 지난주에도 연이틀을 포함 세 번이나 다녀왔다.
그랬더니 카페 점원의 얼굴을 기억하게 되었다. 1년 넘도록 다녔다고는 하나 어쩌다 한 번 가는 것이었기에 전에는 주문을 받고 나에게 커피를 만들어주는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었다. 생각해보면 마음 안쪽 어디쯤에서 그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기를 바랐던 것 같기도 하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왠지 그곳에서의 시간이 철저히 자유롭고 싶었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주에 나눈 짧은 대화는 평소 그런 나의 습관같은 마음을 한번쯤 바꿔놓을 만큼 힘이 컸다.
한 번씩 친구들을 만날 때 말고는 대부분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러 카페에 간다. 요즘 말하는 ‘카공족’이다. 최근 종종 뉴스 기사에 나처럼 카페에서 혼자 노트북을 사용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혼자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커피 한 잔 시켜놓고는 오랜 시간 일을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와이파이 서비스를 이용하고 노트북 충전을 한다. 기사는 그런 비용까지 다 따져봤을 때 커피 한 잔 가격으로 3시간에 한 번은 테이블이 순환되어야 수지타산이 맞는다고 알려주기도 한다. 최소한의 비용만을 지불하고 그 공간을 지나치게 이용하는 양심 없는 사람, 그래서 카페 입장에서 폐를 입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그래서 나만의 원칙을 만들었다. 커피 한 잔에 두 시간 이상 앉아있지 않기. 두 시간이 지나고도 여유 자리가 꽤 있으면 음료나 디저트 하나를 더 주문하기. 그리고 비어 있는 자리가 없을 때는 정리해서 나오기.
그날은 카페에 여유가 있긴 했다. 주말에는 아침에 조금 부지런해지면 어느 곳에서든 한가함을 누릴 수 있는데, 그날도 그랬다. 카페에는 나 말고 한 두 테이블에만 손님이 있었다. 꽤 넓은 공간이라 그 정도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하지만 민폐 카공족에 대한 기사를 여러 번 접한 후부터는 아무리 자리가 많아도 두 시간이 넘어가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비록 손님을 쫓아낸 셈이 되는 적극적 피해를 준 건 아니어도, 한 번씩 노트북 충전을 하고 있자니 마치 카페의 전기를 축내는 것 같아서다. 그럴 때는 차라리 돈을 더 쓰고 마음 편하게 있는 편이 낫다. 그래서 그날도 아직 배가 고프지는 않지만 소금빵을 사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내게 모자란 음료를 대신해 적당한 온도의 물을 깨끗한 컵에 따라주는 점원은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았다. 알아봐 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품고 마음을 쓴 것은 아니었지만, 혼자서 조심하고 있음을 누군가 알아차릴 때의 고마움이 나의 마음에 채워졌다. 그 자리에서 그렇게 신경써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내 맘대로 전해 받은 것 같기도 했다. 따뜻하게 데워진 소금빵을 맛있게 먹는 방법도 전수받은 후 자리로 돌아와 앉아서 쓰던 글을 마저 썼다. '지금은 마음 편하게 앉아 하던 일을 해도 된다'는 응원까지 내 멋대로 받아 챙겼다.
그날 이후로 가끔 생각한다. 이 카페가 오래 그 자리에서 문을 열고 커피와 빵을 팔아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나도 오래 여기 살고 싶은 이유가 한 가지 생긴 것 같다. 가끔은 내게 영원히 터를 잡지 못하는 이주민의 습성이 생겨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우리 가족은 이미 여러 사정에 의해 오랫동안 아주 많이 이사를 다녔던 터라, 한 집에 오래 사는 것에 대해서 크게 욕구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게 집은 공간의 편리를 기준으로 여겨지는 면이 있다. 그런데 계속 이곳에 살면 좋겠다는 마음 하나가 고개를 든 것이다. 그런 마음이라는 것이 낯설고 신기했다. 반갑기도 했고. 그 카페에 단골이 되고 싶은 걸까. 그런 대화를 백 번을 해야 카페 식구들과 친해질 것인 나이지만, 단골이라는 단어는 왠지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힘을 가진 것 같다.
사람을 기대하는 곳
카페, 사람들이 모여서 커피를 사서 마시는 이 공간은 15세기에 처음 생겼다고 한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늘 그러하듯 그곳에는 놀이가 있었다. 그 시대에 즐겨하는 게임들을 하거나 대화를 나누고, 노래와 음악과 춤이 함께 했다. 그러다 보면 만남이 있는 사교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사업이 이루어지거나 정치 토론의 장이 되기도 했다. 누군가 일부러 그런 목적으로 만든 공간이 아니라, 커피를 매개로 사람들이 모이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다. 카페의 역사에 대한 기록들은 그래서 ‘사람은 사회적 존재’라는 철학적 대명제를 납득하게 해준다. 커피라는 음료가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것도 그렇다. 만약에 커피가 철저하게 개인의 취미, 골방에서 혼자서만 즐길 수 있는 기호식품이었다면, 그래서 카페라는 공간에서 함께 모여서 마시는 음료가 되지 못했다면, 지금의 커피가 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나처럼 커다란 가방 안에 볼 것들을 잔뜩 싸들고 와서 테이블 위에 마치 칸막이인양 노트북 화면을 펼쳐 세워두고 앉은 사람조차도 그렇다. 누군가는 내게 왜 도서관이 아닌 카페에서 책을 읽느냐고 묻는다. 너무 조용한 공간은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 움직거리는 모든 소리를 조심하게 되고, 다른 곳에서 나는 작은 소리에도 금방 집중이 흐트러지기 때문에 백색소음이 적당히 있어서 좋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매우 자주 카페는 백색이 아닌 총천연색 소음으로 뒤섞이는 곳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일을 하기 위해서는 방해 요소가 많다 할 수도 있다.
내가 찾은 답은 ‘사람을 기대하고 그곳에 간다’는 것이었다. 글을 쓰는 일을 하는 나는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없다. 아무리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좋아하지만, 모든 시간 혼자이고 싶을 리는 전혀 없다. 평소 가족과 함께 허물없이 좋은 시간을 보내며 사는 편인데, 그건 그거고 집 밖에서 사람들과 섞이는 시간은 식사만큼이나 생존에 필수다. 하지만 없는 직장 동료를 갑자기 만들 수는 없다. 동기생을 만나기 위해 학교에 들어갈 수도 없다. 그런 나에게 카페는 사람을 기대하는 장소다. 내가 일을 하는 그 시간에 옆에서 뒤에서 다른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아 일을 하는 사람, 두서넛이 모여 앉아 서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을 기대하고서 나는 그 무거운 가방을 싸들고 카페로 간다. 물론 아주 가끔 집중이 안 되는 때를 대비해 이어폰은 필수 지참이고.
빈도수가 더 많아서 그렇지, 일하러 가는 것 말고 진짜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카페에 가는 것도 좋아한다. 커피를 즐기는 동호회 회원이 아닌 우리는 단지 함께 커피를 마시려는 목적으로 카페에서 만나지는 않는다. 집도 사무실도 아닌 곳, 적당히 편안하게 앉아서 꽤 쾌적한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기 위함이다. 그래서일까. ‘커피’ 하면 떠오르는 것들은 고독뿐만 아니라 용건, 고민, 위로, 사랑, 즐거움, 여유 등이다.
얼마 전 오래된 친구들을 만나 함께 커피를 마시며 사는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문득 내가 어느새 세상에서 제일 편한 표정을 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몸에 들어간 힘도 점점 풀어졌다. 앉아있는 의자와 내 앞에 허락된 테이블 공간 안에서 점점 미끄러지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한번 씩 고쳐 앉기도 했다. 그러다 아예 드러 누울까봐서. 친구들과 있을 때 내 마음 속에서 카페라는 공간은 방바닥으로 둔갑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준비한 사람들과 찾아든 사람들
카페에는 내가 데려간 나, 내 친구들 혹은 일로 만나야 할 사람들 말고도 또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자 카페를 운영하는 바리스타 정인한의 책을 읽고 그 사실을 더욱 잘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과 함께 일하는 점원들을 ‘이 공간을 지키는 지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제대로 된 커피를 추출하기 위해 커피를 내리는 사람이 과도한 압박을 받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라고 한다.
카페를 운영하는 마음이 담긴 그의 글들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 내가 카페에 사람을 기대하고 간 것에 대해서 생각이 이어진다. 그 자리에 더 있고 싶어서 추가로 소금빵을 주문하는 내게 물 한 잔을 권해준 동네 카페 점원도 생각났다. 커피를 앞에 두고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그곳에 찾아들어가는 일, 그런 이들에게 커피 한 잔을 대접하는 일이 일어나는 곳. 그곳에서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고객과 점원의 삶의 일부가 함께 만난다. 할 일 혹은 나눌 이야기를 담고 들어오는 사람들, 커피를 내리고 마음의 여백을 준비한 사람들이 공존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서로를 생각하고 배려하며 보내는 그곳에서의 시간들은 즐거움과 의미로 채워진다.
가끔 상상해 본다. 우리가 사는 근대의 도시 형태 이전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어떤 장소에서 서로를 기대하고 모였을까.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대로 고대 그리스 로마의 광장에 모여 있고, 삼국시대 풍속화에서 본 대로 그늘진 곳이나 공터에 삼삼오오 둘러 앉아 있었을까. 그때는 공간의 부족으로 인한 제한이 없어서 좋았을가. 커피라는 음료를 매개로 카페 공간이 생긴 지도 600년이나 지났다. 세계 각지에서 시대마다 카페는 다른 모습으로 변해왔지만, 한 가지는 같았기에 그리 오래도록 지속되어 온 것이 아닐까 한다.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이라는 사실.
커피를 매우 좋아한다는 미국의 철학과 교수 브룩 J. 새들러(Brook J. Sadler)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지금 얄팍한 사생활과 개인주의라는 공간에 갇혀 있다. 이러한 상황이 만들어내는 불안과 소외, 고독을 떨쳐버리기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그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커피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노동을 계속하기 위해 투쟁하는 우리의 실존적 상황을 나타내는 상징이라면, 커피하우스(카페)는 우리 인간이라는 외로운 존재에 스며드는 그 의미들이 우리의 사회적 본성에 내재된 하나의 기능이라는 불변의 진리를 일깨워주는 곳이다.’ (<커피, 만인을 위한 철학> 중에서)
점점 혼자만의 공간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졌고, 개인주의가 보장해주는 자유로움과 고양감이 분명 있다. 하지만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연결되어야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게 우린 계속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곳, 같은 공간에서 타인의 움직임을 보고, 표정도 보고, 말소리와 웃음소리도 듣고, 각자가 내놓는 존재함의 증거들을 만나는 일이 필요하다. 같이 있어야 무언가 같이 할 수도 있을테고. 무엇이 되었든 타자와 함께 해나가며 사는 삶, 우린 늘 그것을 원한다. 단지 커피라는 상품을 파는 공간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카페의 역사도 이를 말해준다. 그리고 곧 또 그곳을 찾아갈 것인 나와 여러분의 마음이 그 증거다.
글쓴이 김근영
공간을 느끼고 사유합니다.
대학원에서 문화사회학을 공부했습니다. 30대와 40대 초 타국과 타지역에서 거주하며, 두 아이의 엄마이자 한 가족의 주부로 살았습니다. 다시 예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온 지금, 다양한 공간을 넘어 다니며 의문을 품었던 것들에 대하여 공부하고 글을 씁니다.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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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ri
저도 두 시간 카공족. 카페 찬미가입니다. 공간 경험에 관심 많고요. 마치 제 일상을 제가 직접 쓴 둣한 글이었어요. 반가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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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입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페 동지분 저도 반가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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