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빌라, N의 그림, 아가씨 같은 아저씨_아픔에 이름이 생겼다_허태준

2024.10.25 | 조회 1.01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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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은 하루에 12시간 정도 방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렸다.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가끔은 엠프에 이어폰을 연결하고 기타를 치기도 했는데, 전자음은 빠졌어도 쇠줄을 튕기는 소리가 거실에 있는 내 귀에도 선명히 닫았다. 그의 손이 분주하게 형상을 그려내고 소리를 만들어내는 동안, 나는 몇 가지 문장을 가만히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내심 무언가를 금방 만들어내는 그의 손이 부럽기도 했다.

N이 작업실로 쓰는 빌라에는 방이 하나 더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거실에 짐을 푼 건 함께 살 수 있도록 해준 N에 대한 배려는 아니었고, 그저 베란다 밖 풍경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거실에 앉아 베란다 창을 보며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지하철역에서부터 긴 오르막을 지나 다시 4층 계단을 올라 도착한 빌라에서는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시야에는 막힘이 없었다.

반면 반대편에 위치한 방은 창이 있기는 했지만 더 높이 위치한 다른 건물로 앞이 가려져 있었다. 햇빛도 잘 들지 않는 그늘진 그곳을 우리는 수면방으로 썼다. 한여름 태양은 맞닿는 것들을 금세 후끈하게 데웠지만, 건물 사이 몰래 숨어있는 수면방은 꽤나 선선했다. 각자 작업을 하다가 피곤하면 알아서 들어가 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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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N보다 수면방에 더 오래 있었다. 때로는 하루 종일 잠을 자기도 했다. 결핵으로 체력이 많이 떨어진 것도 이유였지만, 겁 잡을 수 없는 무기력이 나를 더욱 웅크리게 했다. 잠에서 깨어도 몸을 일으킬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일을 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만날 약속도 없었다. 나는 한참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이틀을 내리 보낸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N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약 먹어야지. 약 먹고 다시 자. 내가 일어나지 않으면 N는 똑같은 말을 한마디 더 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면 나는 N에게 미안해서가 아니라 이부자리에 무심히 떨어진 이유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부엌으로 나가 결핵약 2개를 공복에 삼켰다. 베란다 창으로 벌써 여름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열기로 가득한 눈부심을 보고 있으면 왜인지 다시 잠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문이 열린 옆방에서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N의 뒷모습이 보며, 나도 책상에 앉아 글을 썼다.

글을 쓴다고 하지만, 쓰고 있던 책은 병실에서 마무리했기에 당장에 더할 원고를 작업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뭘 써야 할까를 고민하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올해는 그냥 이렇게 보내기로 했다. N과 함께 지내며 다음에는 어떤 글을 쓸지 고민하기로 했다. 그러다보면 앞으로 어떻게 살지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별다른 수가 없으면 폴리텍 대학교에 가서 다시 제조업 취업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때가 되면 지금이 한여름 밤의 꿈처럼 느껴질 터였다.

*

책상에서 조각글을 쓰다가, 예전에 보았던 책들을 다시 읽다보면 서서히 해가 기울었다. 정말로 할 일이 없을 때는 옆방으로 갔다. 문을 등진 채 N은 어김없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접이식 의자를 펴고 그 옆에 앉아 그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태블릿 PC 위로 손을 움직일 때마다 화면 위로 검은 선이 생기고 이내 사람의 모습을 갖춰갔다. 때로는 남자였다가, 때로는 여자였다.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배열되는 형상들을 보다보니 문득 궁금했다.

너는 그림 그릴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어? N은 거침없던 손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3초 간격으로 눈동자를 내 쪽에서 천장으로, 태블릿 PC로 옮기고 다시 손을 움직였다. 보는 사람이 뭘 그렸는지 바로 이해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뭘 그렸는지? 내 의아함을 눈치 챘는지 N은 모니터에 새로운 캔버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방금 완성한 남성과 여성의 그림을 하나씩 새 캔버스로 옮겨왔다.

내가 그리는 대상이 무엇인지 알려줘야지. 가령 여자와 남자는 애초에 근육이 달라, 신체를 구성하는 뼈의 구조도 다르고 말이야. 남자를 그릴 때는 턱과 어깨를 크고 넓게 잡아야 해. 상대적으로 상체가 길어야 하고, 반면에 여자를 그릴 때는 골반을 크게 잡고 하체를 길게 그리는 거야.

N은 보여주는 게 빠를 거라며, 완성되어 있는 인체 크로키에서 강조되는 부분에 동그라미를 쳤다. 반대로 그 옆에는 강조되지 않은 형태로 인체 크로키를 하나 더 그려 보여줬다. 그림은 뭘 그렸는지 한눈에 보여야해. 장르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엔 보는 사람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게 목적이니까. 그러려면 편견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해. 여자를 그리고 남자라고 우길 수는 없잖아? 사람들은 이미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는 강조된 부분 없는 밋밋한 크로키 전체에 동그라미를 치며 말했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것도 전할 수 없어.

*

10분 남짓한 짧은 대화였지만, 그의 마지막 말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다. 아무것도 전할 수 없어. 함께 저녁을 먹을 때도 멀뚱히 혼자 생각에 빠져 있었고, 다음날은 N이 깨우기도 전에 일어나 도서관에서 ‘편견’에 관한 책을 몇 권 빌려오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가 ‘편견’에 편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했다.

그도 그럴게, 내가 글을 쓸 때 중요하게 생각한 건 언제나 편견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책을 통해 ‘직업계고등학교는 공부 못하는 애들이 가는 곳’이라는 편견을, ‘열아홉 살은 모두 입시생’이라는 편견을, ‘인생 망하면 공장 간다’는 편견을 조금이나마 깨고 싶다고 생각했다. 편견을 활용해야만 전할 수 있는 무언가를 나는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모르는 게 있을 땐 언제나 책을 읽었다.

대부분의 책에서는 가공되지 않은 감각 데이터를 동류끼리 분류해 의미 있는 정보로 바꾸는 범주화자체는 부정적이나 긍정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사회적 능력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유아기 아이들은 사회적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무언가를 나누고 구분하고자 하는 열망을 느낀다. 범주화는 인간이 세계를 인지하고, 그에 대해 예견하고, 하나의 종으로 살아남게 해준 능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특정 범주가 반복적으로 강조되면, 인간은 그 범주에 속한 이들이 어떤 본질을 공유한다고 추론한다. 우리 뇌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금세 그럴 듯한 가설을 세운다. 지금까지 보고 들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추론을 했다면, 이제는 반대로 가설을 통해 데이터 값을 예측하는 것이다. 이를 고정관념이라고 부른다.

물론 우리가 고정관념을 형성한 근거는 실존하는 유사성이기 때문에, 그중 일부는 진실일 수 있다. 가령 남녀 평균 신장에 대한 통계적 차이 같은 것이 그렇다. 그러나 모두 진실은 아니다. 통계에는 얼마든지 예외가 존재하며, 키가 큰 여자도, 키가 작은 남자도 당연히 존재할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고정관념이 그러한 개인을 완전히 지워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그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가 지워진 자리에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개인에 대한 차별이 자랐다.

*

한참을 책을 뒤적이다 보니 어느덧 베란다 맞은편 산등선으로 해가 뉘엿거렸다. 자세히 보면 해가 그 너머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산등선이 없었다면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안에는 어떤 선을 인지하는 본능적 능력이 있고, 그 선을 통해서만 세계를 인지할 수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일까. 멍하니 해질녘 풍경을 보고 있으니 벽 너머로 높은 음이 들렸다. N이 기타를 치고 있었다.

나는 N이 음악을 할 줄 알았다. 아니, 사실 음악도 안 할 줄 알았다. 19살에 합격했던 공무원을 계속하면서 취미나 몇 개 가질 줄 알았다. 그가 나처럼 직업계고등학교에 입학했던 이유도, 이른 취업이 필요했던 이유도 다 알았으니까. 집안에 보탬이 되는 성실하고 모범적인 청년으로 계속 그렇게 지낼 줄 알았다. 그래서 N이 공무원을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겠다고 말했을 때, 나는 놀라는 걸 넘어 약간 불쾌한 기분까지 들었다.

,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인생 길잖아. 직장 다니면서도 하고 싶은 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 N은 말없이 눈동자를 내 쪽으로, 천장으로, 자신의 손으로 차례로 옮겼다. 네 말이 맞지. 그렇다니까. 그런데 그건 내가 아니잖아. ? 그런 사람 많은데, 그게 나는 아니잖아. 나는 그림 그리고 싶어. 지금이 아니면 못 그릴 것 같애.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기억나진 않지만, 그때 내 마음에선 어떤 기준이 무너지고 선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 틈 사이로 글을 썼다. 그래도 될 것 같아서. 나 역시 성실하고 모범적인 청년이어야 했지만, N의 말처럼 그건 가 아니어서,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그 관념을 지워내도 될 것 같아서.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우리가 함께 살게 된 건 우연이지만, 나에게는 마치 치밀한 가설의 타당한 결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

나는 옆방으로 가서 말없이 접이식 의자를 펼쳤다. 얼마 전에 말이야. N는 기타를 치던 손을 멈추고 내 쪽을 바라봤다. 공중 화장실에 들어가는 데 어떤 아주머니가 뒤에서 다급하게 아가씨! 거기 남자 화장실이야!’라고 부르더라. N은 숨이 넘어갈 듯 크게 웃었다. 나도 덩달아 과장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머리카락이 길잖아. 심지어 그때 좀 큰 후드티를 입고 있었단 말이야. 뒤에서 보면 얼마나 헷갈리겠어. 심지어 결핵 땜에 살도 다 빠지고. 처음에는 그냥 무시할까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부른 거란 말이지. 게다가 하필이면 화장실이잖아. 오해를 풀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딱! 돌아봤지. 아주머니가 헙! 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다 들리더라니까. 서로 민망하니까 내가 빨리 저 아가씨 아니고 아저씨에요. 죄송합니다.’하고 얼른 들어갔지. 식겁했다니까.

N은 이 이야기가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아저씨도 아니잖아! 기타가 들썩일 정도로 웃던 그의 눈에는 약간의 눈물도 고여 있었다. 그래서 생각한 건데. 나는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정말로 하고 싶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 상황을 그림을 그린다고 상상하면 어때? 허태준은 남자잖아. 하지만 어깨가 넓거나, 머리가 짧거나 하는 특징과는 다르잖아? 물론 얼굴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때 남자라는 편견을 활용하는 건 오히려 사실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왜곡하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그러네, 분명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네. N은 조금 더 생각하는 듯 하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관념을 그리냐 개인을 그리냐의 차이일 수도 있겠네. , 결국은 우리가 뭘 표현하고 싶은지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한 거겠지. 그래야 보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그 생각을 지금까지 하고 있었던 거야? 원래 그런 놈인 줄 몰랐냐. 내가 아는 태준이 중에는 ‘아가씨’가 없어서. 한동안은 좀 포함시켜. 진짜 그래야겠다. '아저씨'도.

나는 N에게 기타를 넘겨받아 기억나는 대로 아무 음이나 쳐댔다. 부정확한 음정이 방안에 날렸지만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선이 울리고, 선이 무너지고, 선이 교차하고, 그러는 와중에도 우리는 마냥 웃겨서 한동안 큰소리를 냈다. 마치 아가씨 같은 아저씨가, 아니 어쩌면 아가씨도 아저씨도 아닌 사람의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보인다는 듯이.

 

*본문 '편견'에 대한 설명은 <편향의 종말>(웅진지식하우스, 2022)을 중심으로 여러 편견에 관한 책의 내용을 종합하여 정리했습니다.

첨부 이미지

'아픔에 이름이 생겼다'

결핵 환자로 지냈던 경험을 진솔하게 전달하는 에세이입니다. 단순한 치료 과정보다는 ‘환자’라는 정체성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자신의 아픔을 말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허태준

직업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장실습생을 거쳐, 산업기능요원으로 지역 중소기업에서 근무했다. 당시의 경험으로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를 썼다. 회사를 그만둔 후 모든 삶은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우리 사회의 이름 없는 시절에 대해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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