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까지 해야 돼?” 남편은 가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곤 한다. 나 스스로도 종종 어이없게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아무렇게나 흘려보내는 시간을 참을 수 없다. 버스나 자동차로 이동 중에도 오디오북을 듣거나 밀린 이메일 답을 하면서, 시간을 하릴없이 보낼 가능성을 원천 봉쇄한다. 여가시간에 있어서도 효용성을 따지는 편이다. 새로운 것을 익힐 수 있는지, 성장에 도움을 주는지 묻고 그렇지 않으면 시간을 들이려 하지 않는다. 늘어지게 오락성 영화나 책을 보며 ‘찰나의 즐거움’만을 위해 시간을 쓴다는 것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아 주저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내가 동시에 해내고 있는 일들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입을 떡 벌리곤 했다. “아니 그 많은 일을 어떻게 다 하고 있어?”라는 질문에 내 마음속의 답은 하나였다.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주말에도 쉬는 시간 없이 매달리면 되더라고.” 충분히 잠을 자야 생존할 수 있는 몸을 갖고 있음에도 부인하고 싶었다. ‘잠을 좀 더 줄이면 할 수 있는 것, 배울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하는 생각에 수면은 늘 뒷전으로 밀렸다. 매시간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강박 탓이었다.
사회는 계속 우리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이야기한다. 조금만 더 시간을 쓰면 완성도가 높아질 업무, 수많은 쇼핑사이트 중 어딘가에 숨어있을 가성비 좋은 물건, 잠깐만 시간을 들이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누군가의 부탁. 이 사이에서 쉴 시간이 어디에 있냐고 우리에게 묻곤 한다. 미래가 불투명하게 느껴지는 경우 이러한 압박에 더욱 취약하다. 노력이 미래를 약속하지는 못하지만, 노력이라도 하고 있어야 불안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도 있다. 입시라는 기이한 시간을 통과하며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나를 납작하게 누르는 훈련을 한다. 어디까지가 최선인지 모르겠으니 그저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한 계속 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늘어지게 쉬거나 노는 데 시간을 쏟는 것은 일탈처럼 여겨진다. ‘엉덩이 힘’으로 공부했듯 모든 것에 오래 매달릴수록 나는 할 도리를 다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좋은 결과를 받을만한 자격을 갖춘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려면 피로와 졸음, 지루함 같은 것들은 무시하거나 경계해야 한다.
지금껏 취업 준비, 재테크, 커리어 관리, 자녀양육 등 눈앞의 중요한 무언가를 위해, 브레이크를 거는 몸의 메시지를 부정하는 연습을 오랜 기간 해왔다. 언제 휴식이 필요한지, 내가 지치지 않는 선은 어디까지인지, 어떨 때 에너지를 얻는지에 대한 감각을 훈련할 새가 없었다. 그리하여 심리적, 신체적 건강이 위험한 상태라는 신호를 놓쳐버리고, 많이 소진되고 나서야 겨우 깨닫게 된다.
쉬는 시간을 보낼 때도 ‘지금의 나’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 기회가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봐, 남들이 좋다니까, 안 하면 후회할까 봐, 정말 하고 싶은지 충분히 생각하지도 않고 뛰어들기도 한다. 나만 해도 ‘여기 왔으면 꼭 가야 하니까’ 들른 여행지에서, ‘누군가의 강력 추천으로’ 신청한 강의에서, ‘언제 또 갈 수 있을지 모르니까’ 예매한 공연에서 순간을 향유하는 기쁨보다 ‘미션 클리어’의 성취감만 남았던 적이 많다. 최대한의 다양한 경험이 그만큼의 강도나 순도의 즐거움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원데이클래스, DIY, 캠핑 같이 유행하는 취미활동이나 새로운 운동에 도전하고 유명한 여행지나 맛집, 전시를 쫓아다니지만, 과연 내가 그만큼 누리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줄을 한 시간 기다린 맛집에서, 주말 막힌 도로를 뚫고 도착한 카페에서 그만한 즐거움을 느꼈는지 솔직히 떠올려볼 때,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SNS에는 행복하고 화려한 일상으로 남았겠지만, 우리에게 쉼이 되었는지, 순전한 만족감을 주었는지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럴 때의 우리 마음은 그 순간 내가 무엇을 느끼고 어떤 욕구가 충족되었는지를 살피기보다 다음 스텝의 ‘할 일’에 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느라 현재를 음미하고 몰입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만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우리 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미국의 신경학자 마커스 레이클(Marcus E. Raichle) 교수는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 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몇 군데 영역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영역들을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 DMN)’라고 부른다.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는 눈앞에 있는 무언가에 집중하지 않고 멍하게 있거나 공상을 할 때 활성화된다. 이 시간 동안 자신에 대해 성찰하거나 타인의 입장을 생각하고, 과거의 경험을 기억할 수 있다. 또한 새로 습득한 정보를 기존 지식과 연결하고, 이를 토대로 미래를 상상하는 일이 일어난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쉬는 시간 후 사람들은 동기 수준이나 집중력이 더 높아지고 불안이 줄어들어 효과적으로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쉼은 무용한 시간이 아니라, 산만하게 흩어졌던 마음을 모으고 재정비하는 중요한 시간이다. 이 시간을 통해 내면을 성찰하고 과거의 경험에서 배우고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 새로 배우고 경험한 것을 내가 가진 기억과 연결 짓고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발견하면서 나의 것으로 소화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쩌면 성숙은 이 시간 동안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이와 비슷한 일이 잠을 잘 때도 일어난다. 잠을 자는 동안 뇌에서는 기억이 저장되고 학습한 내용이 기존 지식에 통합되면서 완성된다. 수면이 줄어들 때 스트레스에 예민해지고, 대인관계에서 애꿎은 갈등이 생기기 쉽고, 논리적인 사고나 의사결정도 힘들어진다는 연구결과는 충분히 쌓여있다. 오래(17~19시간) 깨어 있으면 인지나 운동 기능이 술에 취한 사람과 비슷한 수준으로 둔화되고 평소보다 반응속도가 절반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수면이 부족하면 건강이 나빠질 뿐 아니라 수명도 줄어드는데, 하루에 7시간 미만으로 자는 경우 7-8시간 정도 수면하는 사람보다 사망 위험이 12% 더 높아진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생산적으로 보이지 않는 그 시간이 사실은 우리 몸의 기능을 회복하고 생존할 수 있게 해 주는 시간인 셈이다.
여성의 번아웃을 다룬 <재가 된 여자들>에서 저자들은 우리 몸을 “젖먹이 아기의 몸”으로 여기라고 당부한다. 갓 태어난 아기가 배가 고픈지, 목이 마른지, 잠이 필요한지 살피고 돌봐주듯 스스로에게도 그렇게 묻고 돌봐주라는 것이다. 우리의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쉴 만큼 충분히 일했는지 혹은 쉴 만한 상황인지를 따지기보다 그저 쉬고 싶은 필요를 들여다보고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우리 몸은 존중받는다고 느낄 수 있다.
지루함이나 긴장, 피로와 같은 몸에서 주는 사인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만 애쓰고 잠시 놓아보라는 요청이다. 깊은 바다를 유영하는 고래가 수면 가까이로 올라와 호흡하는 순간이 필요하듯 우리 몸도 숨구멍이 필요하다. 쉰다는 것은 우리 몸이 주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결심이다. 계속 생산적인 상태여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 누군가의 기대, 과도한 책임감,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을 다 제쳐두고 쉰다는 것은, ‘나를 향한 모든 압박’에 저항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은 이 모든 문장은 쉼에 인색한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 잠깐 의자에 등을 기대고 멍때리거나 눈을 좀 붙이면 어떨까.
잘 쉬기 위해서도 노력이 필요하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나 어떠한 결과를 내기 위한 것이 아닌 오롯이 내가 쉼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을 찾아보면 좋겠다. 남들이 ‘그런 걸 왜 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면 거의 확실하다. 가로수에 스며든 계절을 감상하거나 아무 생각 없이 천천히 걸어보거나 예쁜 접시에 담아낸 음식의 식감을 음미하며 먹어보는 것. 멀리 ‘해야 할 것들’에 가 있는 마음을 잠시 내 앞으로 데리고 와서 지금의 나와 접촉하는 시간이다. 결과나 다 끝낸 모습을 상상하며 시간을 버텨내기보다, 이 순간 내 몸과 마음에 “지금 어때?”라고 묻고 귀 기울여보자. 그 시간만큼 나는 존재하는 셈이다.
참고문헌
Immordino-Yang, M. H., Christodoulou, J. A., & Singh, V. (2012). Rest Is Not Idleness: Implications of the Brain's Default Mode for Human Development and Education. Perspectives on psychological science : a journal of the Association for Psychological Science, 7(4), 352–364.
Williamson, A. M., & Feyer, A. M. (2000). Moderate sleep deprivation produces impairments in cognitive and motor performance equivalent to legally prescribed levels of alcohol intoxication. Occupational and environmental medicine, 57(10), 649–655.
Cappuccio, F. P., D'Elia, L., Strazzullo, P., & Miller, M. A. (2010). Sleep duration and all-cause mortality: a systematic review and meta-analysis of prospective studies. Sleep, 33(5), 585–592.
에밀리 나고스키, 어밀리아 나고스키 피터슨 (2011). 재가 된 여자들. 박아람 역. 한올엠앤씨.
글쓴이_이지안
여전히 마음 공부가 가장 어려운 심리학자입니다. <나를 돌보는 다정한 시간>,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를 공저로 출간하였고, 심리학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며 상담을 합니다.
캄캄한 마음 속을 헤맬 때 심리학이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같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닿길 바라며, 심리학을 통과하며 성장한 이야기,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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