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에서 묘하게 마음이 가는 캐릭터가 김수겸이에요.”
그는 만화에서 선수 겸 감독 역할을 하는 김수겸이라는 캐릭터가 묘하게 좋았다고 했다. 김수겸은 만화 <슬램덩크>에서 감독 자리가 비어있는 상양고 농구팀의 주장으로 나온다. 다른 농구팀에는 모두 쟁쟁하고 노련한 감독들이 나오지만, 상양고는 소년가장 같은 3학년 김수겸이 홀로 이끈다. 그래서인지 유달리 선수들간의 우애도 두텁고, 만화를 보는 내내 ‘짠한’ 느낌이 들게 하는 팀이다.
우아한형제들의 김범준 전 CEO를 만난 저녁, 이야기는 예상치 못하게 흘러갔다. <슬램덩크>의 ‘김수겸’ 이야기가 나온 건 그가 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입학했던 대학원을 뒤로 하고 나온 이유를 말하면서였다. 그는 자신이 삶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이 다른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유난히 눈물을 잘 흘리는 영화가 ‘스포츠 영화’라고 했다. 함께하는 사람들의 몰입이야말로 그의 마음에 ‘적중’하는 이야기였다.
김범준 대표를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었던 나는 대기업 CEO란 어떤 이야기를 들여줄지 몰라 막연한 기대만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치열한 투쟁에 휩싸인 회장이나 기업가의 이미지를 무의식적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들려준 이야기들은 나의 무의식과는 다소 달랐던 것 같다. 그는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만화 <슬램덩크>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원더풀 라이프>, 대학 시절 친구들과 나갔던 축구 대회와 중학생 때 좋아했던 ‘삼국지2’ 같은 게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변 사람들과도 좀처럼 드물게 나누는 만화와 영화, 게임에 대한 ‘추억소환’이 펼쳐지자 갑자기 다른 공간에 와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러다 문득, 지난 몇 년간 ‘배달의 민족’이라는 기업이 보여주었던 몇몇 다정한 순간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배민신춘문예’라든지, 뉴스레터 ‘주간 배짱이’라든지, 귀여운 라이더 캐릭터가 생각났다. 어쩌면 그는 그와 가장 어울리는 방식으로, 그의 팀을 그렇게 이끄는 소년가장, 소년을 기억하는 한 어른으로 존재하는 일에 가장 정확하게 성공한 사람처럼 보였다.
나를 성장시키고 싶었던 마음
“제 나이 스물셋,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아버지에 대해 다양한 기억이 있지만, 하나 아쉬웠던 건 아버지가 가정의 울타리 같지는 않으셨다는 점이었어요. 그로부터 몇 년 뒤, 당시에도 이른 나이였던 이십대 중반에 결혼을 결심하면서 저는 단단하고, 믿음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성장하고 싶었죠.”
그에게서 처음 ‘성장’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이었다. 성장은 그에게 단순한 능력주의적 욕심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 단어처럼 느껴졌다. 농구로 비유하자면,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겠다는 마음 보다는 자신의 팀을 지켜주는 울타리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말로 들렸다. 그는 <슬램덩크>에서 김수겸라는 캐릭터도 좋지만,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윤대협이라고 했는데, 두 캐릭터는 모두 자신이 돋보이는 것보다는 팀을 더 생각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처음 다녔던 회사가 어려워지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현실적인 성장을 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대학원에서 박사과정까지 했지만, 막상 필드에 나와보니 모르는 게 너무 많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당시 정말 열심히 일하지만 그만큼 배우는 게 많기로 유명한 ‘티맥스’라는 회사에 입사했죠.”
청소년기 때부터 대학 시절까지 그는 국제정보올림피아드를 비롯하여 세계 대회에서도 여러 차례 상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오만해지기도 했고, 자신도 올림피아드를 이끄는 교수님들처럼 멋진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대학원에 가보니, 그는 학문 보다는 사람들의 실생활에 ‘변화’를 주는 프로그래밍을 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무엇이든 팀으로 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그때였죠. 대학원에서도 선후배끼리 돕긴 하지만, 한 팀이라 느끼긴 힘들었어요. 그러다 사회에 나왔고, 사실은 내가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다는 걸 배운 시간이었고, 팀으로 일하는 것의 기쁨을 더 깊이 경험하기 시작했어요.”
그의 두 번째 회사인 ‘티맥스’에서 그는 정말 즐거웠다고 했다. 가장 좋은 건 그의 팀을 만들어나가는 경험이었다. 처음에는 막내로 들어간 회사였지만, 어느덧 팀장이 되었다. 그는 자주 ‘우리 팀이 월드 베스트라고 생각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그 마음이랄 게 무척이나 부러럽기도 했다. 종종 나는 내게도 진정으로 함께 하나의 목표를 추구하는 동료가 있길 바랄 때가 있다. 그가 ‘스포츠’를 보고 운다고 하는 그 마음을 이해할 때가 있다. 이를테면, 함께 항해를 떠나는 해적 만화 <원피스> 속 동료들이 참으로 부럽곤 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원더풀 라이프>는 죽은 사람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기억 하나를 고르게 하고, 그것을 영화로 만들어주는 이야기에요. 저는 종종 대학교 때 교내 축구 대회에서 저의 고등학교 동문 팀이 우승했던 기억을 고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 결승전에서 1:0으로 지다가 제가 동점골을 넣고 결국 승부차기로 이겼는데, 같은 팀을 이루어 함께 몰입하던 그 기쁨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의 성장은 기쁨으로 이어졌다. 그는 애초에 가족의 울타리가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성장’의 길로 들어섰지만, 그 길의 끝에는 ‘함께하는 기쁨’이 있었다. 사실, 그 두 가지 마음은 모두 이어져 있어 보인다. 자기의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 그 누군가를 책임지고자 하는 마음, 함께하는 마음에 책임을 이어가고자 하는 그 마음이 그의 마음이었다. 그의 기쁨은 혼자서 승리하는 기쁨이 아니라, 소년가장이 자신의 팀을 이끌고 결국 이기든 지든 그 경기를 온 마음으로 다해내는 순간에 있는 기쁨이었다.
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마음
“얼마 전 최인아 대표님이 쓰신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라는 책을 읽으면서, 정말 많은 공감을 했어요. 특히, 책에 보면 회사에서 그냥 ‘받은 만큼만 일하지’라는 태도에 대해 저자가 다소 다르게 생각한다는 부분이 나와요.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도 소중한 나의 시간인데, 내가 어떻게 하면 그 시간을 가장 값지게 쓸까, 고민하는 게 진정 더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취지의 이야기였던 걸로 기억해요. 여기에 굉장히 공감했어요.”
김범준 대표는 대학원을 나와 첫 직장에서 ‘실전 프로그래밍’을 톡톡히 경험했고, 이후 티맥스, 엔씨소프트, 창업 등을 거치면서도 계속 스스로에게 질문했다고 한다. 그 질문은 ‘나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름 아닌 나의 시간이었다. 그는 오로지 월급 때문에만 회사를 다니는 것은 그의 시간을 소중히 쓰지 않는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어떤 곳에 있든, 그곳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 배우고, 그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즉 자기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일들을 물색했다고 한다. 사실, 그런 성실성의 태도는 존경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최선을 다하지 마’, ‘너무 열심히 살지 마’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하지만, 정작 그런 말을 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사람들일 것이다.
“제가 우아한형제들의 CEO직을 더 이상 연임하지 않고 그만두기로 한 것은 건강상의 이유와 함께, 내가 ‘더 이상’ 경험하거나 만들 수 있는 변화에 한계가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어요. 제가 이곳에서 총 7년 반을 일했는데, 그러면서 많이 배웠고, 늘 새로운 경험이 있었고, 재미가 있었어요. CEO로 있는 동안 많은 변화와 성장도 있었고요. 서로간의 호칭 체계를 ‘님’으로 바꾸는 등 제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변화도 이끌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앞으로 또 몇 년을 더 있을 때 지난 시간의 밀도만큼 경험하거나 변화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물음표가 생겼고, 일단 자리에서 물러난 후 건강을 챙기면서 다음 일을 생각해보기로 한 것이죠.”
그는 그의 마음에 따라 사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왜냐하면, 우리네 삶이란 대개 마음을 포기하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실과 의무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포기하며 살아간다. 때로는 자진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죽이고 타인들의 마음을 따라 살기도 한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며 그저 돈과 소비를 따라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 마음을 잊지 않는 사람 같아 보였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건 더 이상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환경이에요. 제가 바꿀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 저는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어져요. 사실, 내 삶을 내가 주도하고 싶고, 그래서 대학 생활부터 본가로부터 독립적인 기숙사 생활을 택한 것도 있었어요.”
그에게 ‘삶을 주도’하는 일과, ‘자기 삶을 사랑하는 것’과, ‘자기 시간을 소중히 하는 것’은 모두 같은 일인데, 동시에 그것은 ‘변화를 이끄는 마음’이라는 게 매우 특별하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나 또한 변화를 주도할 수 있을 때 스스로 더 가치 있고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더 소중한 시간으로 기억되는 것 같기도 하다. 가령, 아이의 그림책을 함께 만들기로 결심한 순간, 그것은 같이 보내는 시간의 변화이자 창조이고, 설렘이며, 새로운 기억의 탄생이다.
“저는 팀을 너무나 좋아하고, 팀이 변화하는 게 가장 즐거워요. 팀이 공동의 목표에 빠져드는 몰입감이 참 좋아요. 다만, 전두지휘하기 보다는 재즈 밴드의 리더처럼, 각자 연주를 하는데 그 변화를 ‘살짝 이끌면서’ 모두가 더 몰입하게 하는 그런 역할이 제가 제일 좋아하는 역할이죠. 그래서 CEO로 있는 동안 모두 함께 변화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되자는 걸 강조하기도 했어요. ‘여러분들이 합쳐서 변화를 이끌어주세요’라고 말이죠.”
인터뷰를 마치면서
김범준 대표는 한창 팀으로 느끼는 설렘과 즐거움에 이야기하다가, 마지막쯤에 이르러서는 ‘혼자’ 있는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실 자신의 MBTI는 INFP라고 하면서(성격유형검사 MBTI를 놀이처럼 즐기는 요즘 세대에게 INFP는 흔히 소극적으로 혼자 노는 걸 좋아하는 대표적인 성향이라고 알려져 있다), 혼자 숙소를 빌려서 가만히 있다가 나오는 것도 좋아하는 등 ‘혼자인 시간’도 좋아한다는 것이다.
아마 누구든 각자 삶의 중심이 되는 마음 ‘하나’쯤은 꼽을 수 있을지라도, 결국 여러 마음들을 갖고 살아가는 게 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그런 균형감각이 좋았다. 여담이지만 사실 나의 아내가 INFP여서 괜히 더 호감이 가기도 했다(성격유형검사 MBTI는 그 정확성을 지나치게 신뢰하기 보다는 약간의 유머처럼 받아들이는 게 좋다).
무엇보다 나는 의무적으로 하고 있는 일 이외에, 진정으로 내 마음을 따라 내 시간을 쓰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하나 확실한 것은, 그와 인터뷰했던 그 시간 만큼은 내 마음을 따라 쓴 시간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나 또한 이렇게 삶을 변화시켜나가는 순간들의 소중함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는 앞으로는 어떻게 살 것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여전히 똑같이 살 것 같아요.”
그 말은 컴퓨터에 관심 있던 사람이 거의 없었던 80년대, 우연히 코딩을 배웠다가 너무 재밌어서 그 세계에 뛰어들었던 어린 그가 하는 말처럼도 들렸다. 그는 정말이지 그 마음 그대로 계속 그렇게 살 것이다.
* '정지우의 밀착된 마음' 인터뷰어 - 정지우
작가 겸 변호사. 20대 때 <청춘인문학>을 쓴 것을 시작으로, <분노사회>,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 등 여러 권의 책을 써왔다. 최근에는 저작권 분야 등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20여년 간 매일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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