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고 깨끗했던 피렌체에 있다가 바람에 쓰레기가 날리는 남부 나폴리로 넘어오니 정신이 혼미했다.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택시 흥정을 하는 조폭처럼 생긴 기사님들과 듣던 대로 포악하게 달리는 자동차들, 길거리에 즐비한 쓰레기들이 바닷내음과 함께 우리를 맞았다. 이탈리아는 도시마다 극적으로 다른 분위기를 가진다고 하는데 진짜였다. 나는 가방을 더 꼭 여미고, 더 살뜰히 캐리어를 챙겼다.
출발 전에 유럽의 소매치기에 대해 많이 걱정하던 터였다. 일주일 전에 이탈리아에 먼저 다녀온 화상 영어 선생님은 카페에 있는 남의 캐리어를 훔쳐가는 도둑을 본 적 있다며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하지만 겁을 잔뜩 먹고 온 것보다는 안전한 것 같았다. 사실 나폴리에 오기 전 산지미냐뇨에서는 일행 중 한 명이 핸드폰을 잃어버릴 뻔한 적도 있었는데, 근처 식당 아저씨가 잘 보관해 주어서 무사히 찾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안전했지만, 안심하기에는 이른 듯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3대 항구라는 별칭과는 다르게 나폴리 역은 충격적으로 지저분했다. 역을 나오자 험상궂은 택시 기사들이 떼로 몰려오는 걸 보면서 제발 내 장기가 무사하기를 바랐다. 차로 10분 거리를 3만 원 가까이 내고도 불안했다. 겁에 질려 가까스로 도착한 호텔은 탱고 페스티벌이 열리는 거대하고 웅장한 건물에 있었다.
1880년대에 지어진 이름난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입구에는 지린내가 풍겼고, 1층 입구에는 노숙자들이 잠을 청하고 있었다. 새벽에 탱고를 추고 나오면서 저 사람들을 다시 만나야 한다니 또 한 번 걱정이 되었다. 한밤중엔 취해 있거나 싸움이 난다거나 하지는 않기를 바랐다.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여행까지 와서 괜한 걱정으로 우울해할 수는 없었다. 깨끗하게 샤워하고 30분 뒤에 만나자고 J와 C에게 말했다. 상쾌하게 샤워하면 불안감도 걱정도 씻겨 내려가니까, 시원한 물을 먹은 초록색 식물처럼 힘이 솟기도 하니까 말이다.
샤워를 마치고 한 방에 뭉쳤다. 한국과 홍콩에서 챙겨온 컵라면들을 테이블에 펼쳤다. 참깨라면과 튀김우동, 홍콩의 락샤 카레 라면. 집에서 챙겨온 라면만 봐도 심박수가 느려지는 걸까. 고소하고 뜨끈한 라면 향기를 맡으면서 허겁지겁 배를 채우니 스리슬쩍 웃음 소리도 커졌다. 컵라면만 다 먹으면 이제 정말로, 이탈리아에 온 지 나흘 만에, 탱고를 추는 건가. 라면 한 포크에 설렜고, 라면 두 포크에 기뻤으며, 라면 세 포크에 신남이 하늘을 찔렀다.
아름다운 장소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될 기대감 반, 낯설어서 위축될까 걱정 반의 마음으로 밀롱가가 있는 지하 1층으로 향했다. 탱고를 추는 장소를 ‘밀롱가’라고 하는데, 나폴리 밀롱가의 첫인상은 뭐랄까. 비현실적으로 웅장하고 멋졌다. 아마도 건물 덕이 큰 것 같았다. 층고가 높았고, 둥그런 돔 모양의 천장은 신비로운 조개 빛을 띠고 있었다. 조명을 받아 푸른빛을 띠는 것도 같았고, 연보랏빛 같기도 했다. 아름다운 그 공간에서 사람들은 온몸으로 음악을 흡수하며 탱고를 추고 있었다. 지하문을 여는 순간, 음악이 넘실거리는 세상으로 발을 딛는 것 같았다.
사실 처음부터 ‘까베세오(Cabeceo)’가 잘 됐던 것은 아니다. ‘까베세오’는 탱고에서 춤 신청을 하는 방식인데, 원하는 상대에게 눈을 마주치고, 그가 눈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이면 함께 플로어에 나가 춤을 춘다. 보통 다른 사람들과 엇갈리는 경우도 많아서 남자가 여자를 데리러 올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좋다. 그렇게 춤을 추기 시작하면 탱고 음악 4곡을 연달아 춘다. 잘 맞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안 맞으면 온몸이 찌뿌둥해지기도 하고, 얼른 집에 돌아가고 싶어지기도 한다.
자리를 잡고 앉아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2시 방향에서 밝은 색 셔츠를 입은 하얀 피부의 남자가 나를 쳐다봤다. 나폴리에서의 첫 까베세오였다. 자주 느끼는 건데 탱고를 추는 사람들 중에는 유독 눈이 반짝거리는 사람이 많다. 권태로운 일상에 몇 시간씩은 꼭 즐거움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눈빛인 걸까 하고 생각한다.
밝은 색 셔츠를 입은 남자는 독일에 사는 아르헨티나 사람이었다. 탱고 선생님이 아닌 아르헨티나 일반 댄서는 처음 보았다. 어쩌면 선생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와는 원래 자주 추던 사람과 추는 것처럼 시원시원하게 춤을 췄다. 춤을 추기 전 눈빛은 조심스러운 호기심이었다면, 춤을 추고 난 후 그의 눈빛은 호의와 환대였다. 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10분 동안 함께 춤을 추고 나면, 왜인지 그들과 금방 친해진 기분이 든다.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쩐지 귀한 친구를 대하듯 젠틀하게 춤을 마무리하는 그를 보면서 차가운 바다 같은 마음에 따뜻한 훈김이 퍼지는 것 같았다.
일상의 수요일 오후쯤 되면 나는 미간이 딱딱하게 굳고, 건조한 눈은 더 푸석푸석해져서 생선 눈이 되어 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럴듯한 탱고 한 *딴다를 추고 나면 그런 척박한 나는 없어지고, 어느새 반가움을 머금은 사람이 되어 있다. 호의로 가득한 눈과 활짝 열린 마음으로 잡아주는 손, 그리고 자연스럽게 얼굴 전체에 퍼지는 환한 미소. 아마도 나는 이럴 때 비로소 ‘정말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 기계처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따뜻한 체온과 눈빛을 느끼고, 음악을 듣는. 좁아진 정서가 비로소 확장된, 살아있는 사람 말이다.
어쩌면 나는 사람들의 호의에 가득한 눈빛이나 따스한 온기가 좋아서 탱고를 추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건 묻지도 않고, 딱딱하고 차가운 언어들로부터 벗어나는 시간. 그래서 미간에 주름이 곱게 펴지는 시간. 세상에 음악과 춤, 그리고 사람. 이렇게만 고스란히 남겨질 수 있는 시간이 내게 있어서 다행이다.
* 탱고 용어
딴다(Tanda): 3~4곡으로 구성된 10분 내외의 음악 세트. 보통 까베세오가 된 상대방과 한 딴다를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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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보배
탱고 베이비에서 탱린이로 변신 중. 10년 정도 추면 튜토리얼 단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여, 열심히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청년>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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