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만이다. 경주에서 케이티엑스 고속 열차를 타고, 인천공항에서 3시간이나 연착된 밤 비행기를 타고, 경유지에서 또 한번 비행기를 갈아타고, 인도 첸나이공항에서 나와 2시간 넘게 택시를 타고, 요란한 클랙슨 소리와 함께 차선 없는 도로를 말타기 하듯 앞치락 뒤치락 달리다 남인도 시골 마을로 들어섰다. 추운 겨울을 뚫고 꼬박 하루가 걸린 여정, 지칠 대로 지친 아이들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신발을 벗어 던지고 붉은 흙 위로 달려갔다. 트렁크 짐을 내리고 보니 어느새 온갖 새소리, 벌레 소리로 가득한 반얀트리 위로 올라가 마치 여기서 사는 아이들처럼 평화롭게 웃고 있었다. 그레이스 커뮤니티, 커다란 반얀트리 사이로 들어와 향 피우는 냄새가 진하게 새어 나오는 락쉬미 할머니 집을 지나 왼쪽 붉은 벽돌집, 우리가 살던 집으로 들어서자 "다녀왔습니다"라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왔다. 우리 네 가족은 3년 만에 오로빌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우리가 자리를 비웠던 시간만큼 집안은 모든 것이 일시정지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이웃들이 한쪽 방에 정리 해둔 먼지 쌓인 짐들 속에서 아이들은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인형과 그림책을 꺼내 들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도 물건들의 상태를 살펴보며 옛 추억에 잠시 잠겼다. 따로 이동 수단이 없는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우선 배고픈 아이들을 데리고 집 밖으로 나와 비지터센터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스쿠터를 타고 다니던 익숙한 흙길인데 그새 새로운 도로를 깔려는 모양인지 땅은 처참하게 파헤쳐 져 있었다. 예전에 우리가 걷던 한가로운 산책로는 이젠 차들도 다닐 수 있을 만큼 넓혀져 있었고 주변 나무들도 무참하게 베어져 있었다. 알고 보니 여기 말고도 마을 곳곳이 이렇게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인도 정부가 시작한 공사가 진행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걸 멈추기 위해 오로빌리언들은 몸과 마음이 많이 다쳤다고 들었다.
해 질 녁이 되자 가로등 하나 없는 숲길은 금세 어둑어둑해졌다. 맨발로 걷던 아이들 뒤로 우리는 심란한 마음으로 따라갔다. 오랜만에 신은 쪼리로 양쪽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터져서 따끔거렸다. 그새 말랑해진 발바닥으로 한국에서 너무 편하게 살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살려면 이곳에 걸맞은 굳은살이 필요했었다는 걸 잊을 뻔했다.
오로빌은 남인도에 위치한 세계 각국에서 모인 약 3000명이 거주하고 있는 생태공동체 마을이다. 1968년에 물질적 삶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가 이곳에서 일어난 것이다. 인도의 사상가 스리오로빈도의 정신을 계승하여 '마더'라고 불리는 그의 영적 동반자 미라 알파사가 창립한 의식의 진화를 위한 실험의 장이다. 마더는 종교, 정치, 국적을 초월해 자연과 인간이 평화롭게 살기 위한 국제 도시를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진정한 평화는 노동과 명상을 통한 내면의 영적 성장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실현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곳에는 각자의 개성과 특징대로 여러 커뮤니티가 활성화되어 있어 그 가치를 자유롭게 지켜나가고 있다. 예를 들면 사다나포레스트 커뮤니티는 비건적 삶을 지향하며 황무지에 나무를 심는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숲으로 이루어진 지금의 오로빌이 초창기엔 거친 황무지였던 것을 떠올리면 이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 모른다. 아직도 오로빌은 추구하는 가치와 자급자족의 어려운 문제들을 껴안고 있지만 이상적인 사회를 향해 나가는 과정을 50년 이상 밟고 있다.
7년 전, 우리는 뱃속에 아기와 함께 신혼여행을 인도로 떠났고 책으로만 접했던 오로빌 공동체를 처음 방문했었다. 인도의 열악한 사정과는 다르게 자연 친화적인 오로빌에서는 평온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 기억이 강하게 남았는지 한국에서 추운 겨울이 찾아오면 이곳 생활이 이따금 생각났었다. 그러다 갑자기 대학교 시간 강사로 일하던 남편의 강의가 줄줄이 폐강이 되고, 인문학이 외면당하는 사회에서 더 이상 살기가 고달파졌다. 우리에겐 생계를 위한 다른 선택지가 별로 남아 있지 않을 때 다시 오로빌을 떠올렸다. 그곳에서라면 뭔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자본주의적 삶에 짓눌려 영혼이 쪼그라들지 않는 삶, 개인의 가치가 존중받는 삶, 세속에 쫓기지 않고 더 느리고 소박하게, 적게 소비하면서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을 꾸면서 이삿짐을 싸고 있었다. 물건들을 하나하나 신속하게 정리했지만 뱃속에는 어느새 든든한 둘째가 찾아와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오로빌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오로빌에 정착해서 이곳의 거창한 대의와는 달리 나는 그저 묵묵히 육아를 하고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나의 주된 일이고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 같은 생활이 계속 이어졌다. 한국과는 다르게 아이들이 자연에서 뛰놀고 경쟁교육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안심이었다. 그럼에도 두려움 많은 나에게는 인도에서 둘째 아이를 낳는 것부터, 모유 수유는 기본이고, 걷기만 하면 기저귀도 하나 없이 맨몸으로 흙에서 놀게 하는 것과 바이크를 타고 등원을 하는 것 모두 엄마로서 하나의 모험이고 도전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오로빌리언은 마치 인류가 멸망된 이후 지구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대지의 여전사들처럼 그을린 강인한 얼굴과 선그라스, 붉은 흙물이 베인 오렌지색 맨발 또는 쪼리에 후줄근한 옷을 걸치고, 아이들을 태우고 장바구니를 둘러매고 바이크를 겁 없이 몰고 다니는 모습이다. 그동안 오로빌의 많은 것이 변했다고 해도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이곳 사람들의 살아 있는 눈빛일 것이다.
오후 5시, 이 시간이면 어김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써티튜드 커뮤니티 놀이터를 찾았었다. 그네, 하늘다리, 미끄럼틀, 정글짐이 있고 모래사장으로 되어 있는 딱히 특별할 게 없는 놀이터다. 한국처럼 푹신한 인조 바닥으로 시공되어 있지도 놀이 기구가 세련되거나 화려하지도 않다. 마치 우리가 어릴 때 놀던 놀이터 그대로다. 별 건 없어도 여기선 큰 아이 작은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원숭이들처럼 어딘가 매달리고 신나게 뛰어놀기 바쁘다. 한국 같으면 텅텅 비어 있을 놀이터가 여기서는 아이들의 목소리로 시끌벅적하다. 그리고 우리들에겐 자연스레 다른 부모들과 만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해 질 녁 노을 속 그동안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라도 하듯 놀이에 빠져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한국으로 가져갈 짐 정리를 하러 돌아온 나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3년 만에 놀이터에서 만난 아는 아이 엄마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코로나가 찾아온 뒤에도 그녀는 모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기서 계속 지냈다고 했다. 한동안 학교도 문을 닫았고 마트 역시 문을 닫아 먹을 것을 조달하기도 힘든 상황이라 사람들은 부족한 음식을 배급받고 서로를 위할 수밖에 없음을 절절히 확인하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태양열로 조리되는 오로빌의 메인 공동 식당인 솔라키친 조차 문을 닫았고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고 한다. 인도의 기후는 어떤가, 덥고 습하고 때로는 한 달 내내 비만 오기도 한다. 그 어려운 시간을 두 아이들과 견뎌 낸 것이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오로빌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다른 선택지가 없는 여기가 유일한 집인 사람들은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반면 우리는 우연히 코로나가 찾아올 당시 아이들의 학교 방학기간을 맞아 네팔로 여행을 떠났었다. 그리고 곧바로 인도 국경이 폐쇄되는 바람에 오로빌 집으로 되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한국 집도 다 정리하고 오로빌로 이사 온 탓에, 이 넓은 지구 땅에 돌아갈 집 하나 없는 국제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이후 우리 같은 케이스에 놓인 한 한국인을 만났는데 그녀는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음이 마치 자신이 인도로부터 추방 당한 느낌이 들 정도로 슬펐다고 했다. 우리는 네팔에서 떠돌다 다행히 한국으로 들어와 비교적 편안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 역시 어느 곳이 우리의 진짜 집인지 헷갈릴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정말이지 우리의 진짜 집은 어딜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허술하기 짝이 없고 매사에 계획적이거나 치밀하지 않아서 늘 이렇게 감사하게도 보이지 않는 보살핌과 사람들의 도움으로 산다. 우리에겐 의도치 않게 다른 선택의 길이 열렸다. 처음 이곳에서 정착할 때에도 아기를 뱃속에 둔 엄마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의 배려와 도움의 손길이 있었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 안에서 보호받았다고 볼 수 있다. 다시 찾아온 거친 이곳에서 그동안의 역경을 이겨 낸 사람들을 보면서 어딘지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어서 눈물이 났다. 부드러운 내 발바닥이 부끄러워지는 느낌이 다 들 정도였다. 그동안 한국에서 살면서 마음으로 힘들어했던 온갖 일들이 더 이상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고 다부진 근육 하나 없는 연약한 내 몸만 보였다.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오로빌리언들은 코로나로 변한 통제 상황을 이곳만의 질서와 흐름대로 잘 지나왔으리라 짐작된다. 세상의 변화에 크게 동요되지 않으며 무엇이 더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인가를 끊임없이 말하고 저항하기를 멈추지 않았으리라. 이 땅 위에 두 발을 단단히 딛고 서 있는 이곳 사람들은 외부의 유혹과 자극에 쉽게 쓰러지거나 삶이 끊기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우리가 오로빌과 한국을 오가며 삶을 이어 온 것 그 자체도 마음의 힘을 키우는 길고 긴 여행의 한 과정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래, 영원한 진짜 나의 집이란 어쩌면 내 마음속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집이라면 결코 닫히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든 품어내려고 애쓸 것이다. 그리고 온갖 걱정과 두려움, 또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지켜줄 것이고, 자본의 탐욕으로부터 응고된 시간으로부터 빠르고 숨 가프게 돌아가는 세상으로부터 울타리가 되어 줄 집을 우리 각자의 마음에 지니고 살고 있다고 본다. 나는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국경에 의해서도 폐쇄되지 않는 내 영혼의 집을 잘 지켜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비록 이곳 생활에 적합한 몸의 근육은 다 발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내 마음 어딘가는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느새 조금 더 단단해져 있음을 느꼈다.
오로빌과 이별하기 위해 찾아온 이번 여행은 우리가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되짚어 주게 한다.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별도의 문제인 것 같다. 삶의 모습은 제각기 달라도 자신만의 삶의 가치를 잃지 않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그럴 때면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고도 자연스레 만나지는 결이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들과 함께일 때 지금 여기가 오로빌이고 진정한 공동체이며, 영혼의 고향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처음으로 7살 큰아이가 4살 동생 손을 잡고 아침 산책을 가겠다며 용감하게 집을 나서는 걸 보면서 앞으로 우리가 걸어나갈 삶의 여정이 기대가 된다.
* 글쓴이 - 윤경 yoon.vertclaire@gmail.com
시골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작은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입니다.
마음을 어루만지며, 보다 나답게 사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yoonir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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