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떠 핸드폰 액정을 이리저리 본다. SNS에는 수많은 댄서들의 공연이나 먼 나라 탱고인들의 연습 영상이 가득하다. 운동복을 입고 열심히 발끝을 포인팅하는 모습, 연습실엔 꼬마들이 뛰어다니고 댄스 파트너인 남편과 합을 맞추는 모습, 헬스장에서 열심히 볼레오 동작을 연습하는 모습 들을 보면서 ‘나도 연습해야 하는데…’하며 분발한다.
그래도 탱고를 추러 가는 날에는 조금 졸립고 귀찮아도 아침 운동을 가려고 한다. 탱고를 잘 추고 오려면 탄탄한 다리 근육과 코어가 필수다. 침대에 누워 보던 핸드폰에서 시선을 돌려 남편을 깨웠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운동 갈 시간이야….”라고 말했다. 남편은 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시러….”라고 답했지만, 금방 일어나서 운동용 반바지로 갈아입었다. 조금이라도 운동을 하고 가면, 그날은 왠지 ‘피봇’이나 ‘디소시에이션’이 더 쉽게 되는 것 같다. 귀찮아도 포기할 수 없는 아침 운동이다.
헬스장에 가서 남편은 잠이 다 깼는지 옆에서 “플랭크나 가슴 운동을 하면 갈비뼈를 닫을 수 있어서 보배 등이 뒤로 까바지지 않을 거야!”라든지, “힙 어덕션으로 중둔근 운동을 하면 골반이 옆으로 빠지지 않고 춤을 출 수 있어!”라며 열정을 입으로 불태운다. 누가 보면 탱고를 엄청나게 잘 추는 줄 알겠지만 사실 이렇게 해도 여전히 쪼랩에서 탈출하기 어려운 게 탱고다. 아무리 해도 너무 어려워서 질리지 않는다는 게 탱고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운동을 마치고 부랴부랴 씻고 혼자 친구를 만나러 나갈 채비를 했다. 탱고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인데 자수 실력이 아주 수준급이다. 친구와는 얼마 전에 도자기 공예 원데이 클래스도 듣고, 같이 맛있는 태국 음식도 먹었다. 연남동에 있는 새로 생긴 타이 푸드점인데, 내가 태국에 살 적에 좋아하던 컵라면 마마를 이용한 음식이 있었다. 새콤달콤하고 고소해서 둘 다 연신 감탄하면서 먹었다. 아무튼 오늘은 만나서 서로를 위해 준비한 조그만 선물을 공유하고 차를 마시면서 열심히 탱고 수다에 열을 올렸다.
탱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나 싶다. 점심 즈음해서 만났는데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이제 각자 취향껏 챙겨온 9cm 슈즈를 들고 같이 탱고를 추러 갈 것이다. 남편도 볼일을 다 마치고 우리와 합류할 것이다. 탱고를 추는 사람들은 특정 요일, 특정 시간이 되면 낮에 어떤 일을 하든, 모두 탱고를 추는 장소인 밀롱가로 모인다. 어떤 하루를 보냈건 북적이는 도심의 지하 속으로 내려가 비생산적인 무언가에 몰두하는 시간을 위해 말이다. 같은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장소는 어디든 참 근사하고 멋지다.
문득 탱고를 추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떤 주말을 보내고 있을지 상상해보았다. 지금 내 곁의 친구, 남편, 그리고 일요일 저녁의 음악과 춤이 모두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주변의 모든 것이 뿌연 스모그로 가려진 것처럼 희미해지고, 곧 새하얗게 소멸된다. 내 곁에는 이토록 많은 것들이 탱고와 함께 파도처럼 밀려왔다. 한 사람과 연인 관계를 시작하면 그 사람과 관련된 한 세상이 함께 오는 거라던 말이 떠오른다. 그와 연결된 다른 인연들, 그의 서재, 그의 과거.
탱고가 내게 그렇다. 소중한 사람들, 춤과 음악에 관한 지식들, 그리고 많은 추억. 사람들은 종종 ‘우리가 탱고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탱고가 우리를 선택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잠시 스쳐가는 단순한 취미일 뿐이지만, 그 외의 사람들, 그러니까 탱고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몇 년째 탱고 귀신이 된 사람들은 감히 탱고에 우리의 인생이 걸렸다고 믿는다. 에너지를 다 써 힘이 들 때에도, 기분이 울적할 때에도, 날아갈 것처럼 기분 좋은 날에도 언제나 인생이 흐르듯 우리네 탱고도 흐른다.
가끔은 늘지 않는 실력에 고통스럽고, 뇌가 뜨거워지는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게 그저 탱고를 향한 하나의 정념이 아닐까 싶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생길 일 없는 열정과 같은, 그런 무궁한 정념 말이다. 한동안은 때때로 이런 무거움이 싫어 탱고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했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끝없는 세계가 익숙해지고, 그 안에서 함께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동지애를 느낄 뿐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세수를 하고 물 한 잔을 마시는 것처럼 탱고를 추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제 탱고는 내게 걷는 것처럼,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다.
* 탱고 용어
볼레오(boleo): 탱고 용어 중 하나. 한쪽 다리로 반대편 다리를 감는 듯한 동작
피봇(pivot): 구기나 댄스에서, 한 발을 축으로 하여 회전하는 것
디소시에이션(dissociaiton): 상·하체 분리
* 오늘의 탱고 영상
* 매달 18일 '탱고에 바나나'
글쓴이 - 보배
탱고 베이비에서 탱린이로 변신 중. 10년 정도 추면 튜토리얼 단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여, 열심히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은 국어를 가르치는 데에 보냅니다. <세상의 모든 청년>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Brunch: https://brunch.co.kr/@se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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