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카페를 오픈할 때, 원래는 매장의 절반은 주거공간으로 하는 것은 어떨까 싶기도 했었다. 공간을 뚝 잘라서 어느 쪽에는 방으로 들어가는 비밀 문을 만들 생각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단칸방이 나오고 거기를 신혼집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창업과 장가를 동시해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 문 뒤에 아내와 아이가 있으면 일을 하다가 잠깐씩 보고와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어릴 적 초등학교 앞에 있던 문방구도 비슷한 구조가 많았으니까. 그렇게 실제로 해볼 요량으로 학교 주변에 있는 부동산을 찾아가기도 했었고, 그 공간을 토대로 어설프게 도면을 그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커피를 배우고, 다른 카페에서 경험을 쌓으면서 그 마음을 천천히 접게 되었다. 왜냐하면, 일해보니 바리스타는 조용하고 여유 있는 직업이라기보다는 계속 분주하게 움직이는 육체노동에 가까운 직업이기 때문이었다. 창업하기 전 나는 바쁜 카페에서도 일했었고, 장사가 잘 안되는 카페에서도 일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임금을 받고 일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돈을 지불하고 레시피를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어떤 곳은 곧 폐업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집기 대부분을 인수하기로 약속을 하고 오랜 시간 동안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마감도 같이했었다. 버는 돈 없이 시간을 보냈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 배운 것이 있었다. 사장도 아니고, 손님도 직원도 아닌 상태로 카페에 머무는 것은 독특한 경험이었다. 어떤 다른 관점에서 양쪽 모두의 표정과 기분을 살필 기회였다고 해야 할까.
먼저 창원시의 번화가에 위치한 그 카페에서는 ‘바쁨이란 이런 것이다’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고무장갑을 끼는것이 오히려 손해였다. 대부분 내부가 촉촉이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핸드드립을 하고 있는데, 손님이 들어오고, 과일을손질하다가 마른 손을 닦고 서빙을 하러 가야 하는 상황이 빈번했다. 처음에는 스팀을 치는 것이 큰 부담이었지만, 워낙흐름이 바쁘다 보니, 어느새 제법 익숙한 일이 되었다.
러쉬 타임에 연이어서 주문을 해결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주문을 받고 있는데, 뒤에서는 기다리는 손님이 손목시계를 보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곤 했다. 주문을 받는 직원도 표정이 썩 환대하는 듯한 느낌은 아니었다. 정오 이후에 두세시간 동안은 한순간에 매장이 가득 차게 되는 일이 빈번했다. 그런 상황에서 조바심이 들면 어김없이 실수가 생겼다. 레몬을 커팅하다가 칼을 거꾸로 잡아서 손바닥을 다치는 직원도 있었다. 나도 맨손으로 설거지를 하다가 잔을 몇 번이나 깨기도 했었다. 기다리는 손님이 생길수록 마음속으로 ‘잔잔해지자’라고 말하는 버릇이 그 시절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생겼다.
서두르다 일거리를 늘리는 것보다 조금 기다려야 한다고 손님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양해를 구하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었다. 기억력을 믿기 보다는 차례대로 주문서를 붙여 놓는 것이 중요했다. 순서가 바뀌거나 메뉴가 바뀌는 것은 큰 실수에 속했다. 순서와 메뉴만 확실하다면, 하나하나 풀어가면 되었다. 모래시계의 잘록한 부분으로 결국 모든 모래알이 지나갈 수 있으니, 그처럼 음료를 만들면 되었다. 손님에게 안내만 충분히 된다면 오히려 기다리는 것은 어떤 맛집의 숙명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기다린 분에게는 고맙다고 표현하는 디테일도 필요했다. 하지만, 바쁜 매장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은 매뉴얼로 규정하기 어려운 것이 많았다. 순간의 대화를 주고받는 것은 결국 바리스타이고, 소통은 레시피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상대를 배려하는 진심은 명령으로 공유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바로 옆에서 월급을 받고 일하는 직원을 보면서, 바쁜 상황에서 밝은 표정을 짓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직접 경험할수 있었다. 손님이 들어오기 때문에 못내 주문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매 턴마다 진짜 대화를 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것을 보면서 바쁜 매장이 된다면, 응당 더 주는 것이 합리적이라 여겨졌다. 바쁠 때와 한가할 때가 보상이 같다면, 그런 진심 어린응대는 어렵다지 않을까 싶었다.
한번은 지금의 아내가 그 바쁜 매장에 온 적이 있었다. 나는 그녀가 같은 공간에 있어서, 직접 내린 커피를 줄 수 있어서기뻤다. 그런데도 신경이 분산되어서 그녀가 머무는 동안 평소와 달리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큰 실수를 한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버퍼링이 되는 것처럼 버벅거린다고 해야 할까. 신경이 본의 아니게 나누어져서 집중되지 않았다. 그만큼바쁜 매장을 전반적으로 총괄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큰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었다.
한가한 매장에서 일을 배울 때는 감히 여자친구를 부르지 못했다. 아마도 사장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폐업이 예정되어서 인지 매장에는 손님이 아주 뜸하게 찾아왔다. 저녁부터 마감까지 다섯 시간 정도 있었는데, 보통 한두 팀이 전부였다. 그때는 레시피를 배우거나, 바 안에서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많다고 생각했던 레시피도 며칠 만에 금세 배워서 대부분 시간을 창밖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카페의 흥망성쇠를 경험했던 사장은 의연해 보였지만, 나는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몇 달 뒤에는 이곳에 다른 식당이 들어선다고 들었다.
마감하기 한두 시간 즈음이면 사장의 아내가 찾아오곤 했다. 그녀는 눈인사만 주고받은 뒤, 주문 없이 구석 테이블에 앉아서 무언가를 하곤 했다. 손뜨개를 하거나, 어떤 책을 읽거나, 아니면 노트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손님이 올 것에 대비해서 서로는 말을 섞지는 않았지만, 제삼자로서 느껴지는 미묘한 기류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편하게만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을 보면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은 어느 정도 분리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 반년 뒤에 창업했다. 약속대로 폐업한 카페에서 집기류를 인수했고, 카페 이름을 (정애가) 좋아서 하는 카페로 정했다. 하지만, 일터에는 아내가 오지 않는 것으로 합의했다. 그 배경에는 그런 경험이 있었다. 바쁘면 신경을 못 쓰기 때문에, 한가하면 괜한 걱정을 할까 봐, 염려되었다. 두 딸이 카페에 온 적도 열 손안에 꼽힌다. 가족이 오게 되면 아무래도 신경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대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원래는 카페 안의 문을 열면 집이 있었으면 했지만, 실제로 문과 문 사이에는 약간의 거리가 생겼다. 집으로 돌아오면서차 안에서 아빠의 가면을 쓰고, 반대로 카페를 향하며 바리스타의 가면을 쓴다. 덕분에 서로 다른 공간에서 각각의 역할을나름대로 수행하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는 거리 두기가 4단계가 되면서 뭐랄까, 시대의 흐름이 있다는 것을 몸소 느낀다. 찌는 듯한 무더위도 한몫하는 것 같다. 한적한 산책로를 바라보고 있으면, 약간은 두려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럴 때도 마음속으로 ‘잔잔해지자’라고 말한다. 습관이 되어버린 말인데, 나름의 효과가 있다. 카페의 흐름은 조금 바쁘거나 아주 조용하거나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기분도 그 흐름을 따라간다. 다만 바짝 붙지 않으려고 계속 애를 쓴다. 모래알은 결국 좁고 잘록한 이 공간을 지나게는 법, 이 시간이나 앞으로의 문제들도 그렇게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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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인사이드’ 글쓴이 - 정인한
김해에서 카페를 2012년부터 운영하고 있습니다. 경남도민일보에 이 년 동안 에세이를 연재했고, 지금도 틈이 있으면 글을 쓰려고 노력합니다. 무엇을 구매하는 것보다, 일상에서 작은 의미를 찾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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