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오면 모든 것이 정지 장면처럼 변하곤 했다. 나는 더 이상 서울 어딘가에서 친구들과 떠들고 있는 대학생이 아니었다. 마치 타임슬립처럼 빠른 속도로 과거로 돌아가 삼백여 키로 떨어진 창원의 어느 작은 단층집과 연결되었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늘 묘한 긴장감이 흐르던 그 집으로.
그 집에서 가장 슬픈 얼굴을 한 엄마라는 존재가 있었다. 엄마는 신문 사회면에서나 봤을 법한 수모와 억울한 사건이 바로 본인에게 일어난 실화였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나는 곁에서 그 시절의 엄마가 되어 속으로 눈물을 삼키고 또 가슴 아파했다. 엄마의 하소연은 내 이야기가 되었다가 내가 돌봐야 하는 누군가의 긴급한 요청으로 들리기도 했다. 무언가를 해서라도 엄마의 그늘을 지우고 싶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 또한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늘 집을 떠나고 싶어 했다. 조금이라도 더 멀리, 부모님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교실 앞에 붙여진 지도 위에 집과 부산과의 거리를 엄지와 검지로 가늠해 보았다. 그만큼 열 번을 더 짚어내야만 서울까지 닿을 수 있었다. 나는 꼭 서울로 가리라고, 다짐했다.
대학을 오면서 몸은 멀리 떨어졌지만, 마음은 부모님 곁에서 그리 멀리 떠나오지 못했다. 전화 너머 어머니의 축 처진 목소리를 들으면 나도 덩달아 마음이 가라앉아서 종일 기분이 울적해지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스무 살의 내 삶 한가운데에 불쑥 들어왔다 나가곤 했다. 우리 둘 사이에는 다정한 모녀라는 질긴 밧줄에 무거운 추가 몇 개 더 달려있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의 속상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바라는 여행이나 가전을 바꾸는 일 같은 것도 나는 어떻게든 ‘꼭 이루어져야 할 일’처럼 굴었다. 그러느라 만료가 두 달 남은 적금을 깨기도 했고, 동아리 공식 행사를 빼먹어 선배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어머니는 불운한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필요를 살피고 돌보는 것이 우선이었다.
가족치료학자 보웬(Murray Bowen)은 가족 간에 감정의 경계가 없어진 것을 ‘미분화된’ 관계라고 표현했다. 분화가 잘 되어 있는 가족은 정서적으로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개개인이 자율성을 갖고 각자의 문제를 해결해나간다. 반면, 미분화된 가족은 한 몸인 것처럼 경계가 흐려 서로의 감정에 영향을 많이 받고, 각자의 감정이나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유연하게 인정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 부모의 불화가 심한 경우 가족 내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자녀를 끌어들이게 된다. 이때 자녀는 부모 중 한 쪽 편을 들거나 부모에게 일방적인 비난을 받는 ‘희생양’이 되면서 결과적으로 부모의 정서와 요구에 휘둘린다. 폭력적이거나 무관심한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자녀에게 이해받으려 하고, 타인에 대한 감수성이 발달한 딸이 어머니의 의지처가 되는 것은 흔한 서사이다.
보웬은 가족 내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합성과 독립된 존재로서의 개별성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연합성에 치우쳐 있는 가족에서 개별적인 가족이 되어갈 때 개인도 보다 자기의 욕구를 살피고 실현시킬 수 있는 독립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거리두기라는 시간을 건너야 하고, 그 과정에서 넝쿨처럼 촘촘히 얽혀있는 기대를 가지치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가족의 불화를 중재하고 슬픔을 위로해오던 배역을 거절하고, 으레 그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하는 누군가를 좌절시키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내게는 결혼과 직업을 선택할 때 진통이 있었지만, 그 덕분에 나머지는 수월해졌다.
어머니에게서 메시지가 오거나 무언가가 필요해 보일 때 일단 멈추었다. 내가 뛰어들어야 하는 순간인지 어머니의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타이밍인지, 내 마음에 어머니가 들어올 공간이 있는지도 살폈다. 도움의 요청에 기꺼이 뛰어들 만큼 넉넉할 때도 있지만, 어떨 때는 이미 다른 문제로 가득 차 있어 뒤로 물러서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어머니의 실망을 감수하고서라도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했다.
한 몸 같았던 관계가 분리될 때의 고통은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아프게 다가온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녀에게 정서적으로 의지했던 부모는 자녀를 떠나보내는 것이 자신을 잃는 것처럼 느낀다. 자녀에게 삶을 포개어놓은 자리가 클수록, 자기 삶을 찢어내어 자녀의 삶에 덧대는 방식으로 자녀의 ‘행복한 삶’을 완성해가려 했던 부모일수록 더 힘겨울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의지처와 존재감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녀에게도 마찬가지다. 개별적인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은 부모의 기대를 등지는 일이므로 죄책감이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활활 태우고 재가 된 듯한 부모가 나와 독립된 존재로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것을 신뢰하기 어려워진다.
나 또한 어머니 스스로 자기 삶을 즐길 수 있는 존재임을 존중하지 못했었다. 크고 작은 고통과 불편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 한 걸음 나갈 수 있는 어른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다.
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만 같았던 자리에서 한 발씩 물러날수록 어머니는 어머니만의 공간을 만들어갔다. 때로는 친구가, 때로는 스스로가 당신의 위로자이자 돕는 사람이 되었다. 친구들과 둘러앉아 가부장들의 지난 만행을 서로 고발하고, 더듬더듬 우크렐레를 배우며 노래하고, 땡처리 여행상품을 기다렸다가 산으로 바다로 떠났다. 어머니는 더 이상 무력한 피해자가 아니라 자기 삶을 가꿔나가는 사람이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이를 위해 먼 길을 돌아가고 시간을 쏟고 편의를 포기하는 희생이라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한 것임을 느낄 때가 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는 보람 같은 것은 그 순간 얻어지기 때문이다. 내 존재가 그만큼 커지는 기분, 좋은 엄마가 되었다는 효능감 또한 스멀스멀 퍼진다.
어머니 역시 나를 ‘위해’ 찬물에 손을 담그고 뻐근한 종아리를 끌어안고 불안한 밤을 숱하게 보내면서도 그 순간 그런 긍지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아이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자부심,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것을 아이에게 주었다는 뿌듯함 같은 것. 그 마음에 이르자 ‘어머니의 희생이 꼭 나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겠구나’ 하는 안심이 되었다. 희생을 희생으로 되갚아야 한다거나 최소한의 보답으로 기대에 걸맞은 딸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였다.
독립은 여전히 내 삶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부모의 기대와 간섭의 그물망에서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지점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누군가는 연결에 더 가깝게, 누군가는 분리에 더 가까운 곳에서 균형점을 찾는다. 최소한의 경계선은 있다. 부모의 감정에 따라 내 마음이 좌지우지된다면 금을 밟았다는 신호이니 좀 물러나야 한다. 관계 속에 있지만 스스로에게 억지스럽지 않고 부모의 경계도 침범하지 않는 어딘가가 있다.
어쩌다 보니 20대 이후 나의 삶은 집에서부터 더욱더 멀리 떨어져 온 여정이 되었다. 서울에서도 틈만 나면 도망치듯 먼 나라로 떠났던 나는 지금은 꼬박 스무 시간을 비행해야 닿는 타국에서 지내고 있다. 물리적 거리만큼 정서적 거리가 쉽게 조율이 되면 좋으련만, 여전히 연합성과 개별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언제는 수월하게 때로는 뜨끔해하면서 어머니와 나만의 고유하고 적정한 선을 찾아가는 중이다.
* 글쓴이_이지안
여전히 마음 공부가 가장 어려운 심리학자입니다. <나를 돌보는 다정한 시간>,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를 공저로 출간하였고, 심리학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며 상담을 합니다.
캄캄한 마음 속을 헤맬 때 심리학이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같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닿길 바라며, 심리학을 통과하며 성장한 이야기,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상담 블로그 https://blog.naver.com/hello_ki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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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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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람
너무 잘 읽었습니다. 작가님 글은 정말이지 최고에요 :)
이지안
늘 쓰고 나서 맘졸이는 초보 작가에겐 정말이지 힘이 되는 응원입니다. 넘 감사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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