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가슴

어느 여름날의 기억_보이지 않는 가슴_수영

그 무엇을 고정시키고 가두지 않을 가능성을 찾아서

2023.12.13 | 조회 1.3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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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1987년, 열한 살 되던 해 여름이었다. 할머니를 만나러 우리집을 찾곤 하던 진외가 작은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자다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잠자듯 조용히 말이다. 장녀였던 할머니를 비롯해서 할머니의 형제는 모두 피부가 희고 외모가 우아했는데 하얀 모시적삼에 새하얀 중절모와 백구두까지 갖춰 입고 다니던 진외가 작은할아버지는, 그중에서도 유독 우아해 보이던 사람이었다.

초상은 집에서 치렀다. 마당이 달린 서른 평 남짓한 ㄷ자형 한옥이었다. 대문은 내내 열어두었다. “하이고” 하는 탄식 소리를 내며 대문턱을 넘는 조문객도 있었고, 집 안의 가족들을 살피며 울음부터 터뜨리는 조문객도 있었다. 빈소는 대청마루에 차려두었다. 사람들이 향을 피워 절하고 상주와 맞절을 하는 사이, "아이고, 아이고"하는 곡소리가 울리고는 했다. 바닥까지 치며 오열하는 소리가 터져 오를 때면 덩달아 마음이 울컥하기도 했지만, 감정도 없는 기진한 곡소리가 기계처럼 반복되는 순간에는 슬픔을 연기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커다란 모자와 완장을 찬 상주 옆에는 소복을 입은 여자들이 왔다 갔다 했다. 소복 허리께를 바짝 동여맨 여자들은 눈이 퉁퉁 붓도록 울다가도, 인사를 마친 손님이 집안 어딘가 자리를 잡고 앉기 시작하면 눈물을 쓱쓱 닦아내고 일어나 그쪽으로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려오고는 했다. 새로 온 손님이 또 다시 마루에 당도하고, 아이고 아이고 하는 곡소리가 이어지고, 밥상이 왔다 갔다 하고, 오랜만에 보는 친지나 이웃들이 두 손을 부여잡거나 등을 두드리며 이야기를 시작하고, 초상집은 얼마 안 가 와글와글해졌다.

어른들은 하나같이 정신이 없었으므로 아이들은 알아서 놀이를 하며 아이들만의 시간을 보냈다. 이웃에 사는 동네 꼬마든, 추모객의 일원이든,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초상집 마당에 쪼그려 앉아 여기 있는 어른들처럼 밥상을 차려오고 인사를 나누고 했다. 아마 상갓집 놀이를 했던 것 같다. 돌을 쌓고 풀잎을 으깨는 식으로 말이다. 누군가는 아기를 맡았고, 누군가는 엄마를, 누군가는 아빠를 맡았다.

우리들 놀이에서 또 누군가는 죽음을 맞았던 것 같은데, 그게 그렇게 별다른 사건이지는 않았다. 죽음은 오래오래 착하게 산 사람이 집안에서 가족과 함께 편안하게 맞을 수 있는 것이었고, 죽음 이후에도 또 다른 삶을 살 수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아주 막연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우리 중 누구도 그것 때문에 대성통곡을 하거나 함부로 웃는 법이 없었다. 비록 놀이였지만 경건하고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지켜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할아버지의 시신은 방 안에 있다고 했다. 엄마 다음으로 사랑하는 할머니가 애달파하는 모습이 마음에 몹시 걸렸지만, 상냥한 할아버지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것 역시 아쉬웠지만,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초상집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흥겨워서 할아버지의 일은 금세 잊어버리게 되었다. 더군다나 누가 보아도 할머니는 이 집에서 중요한 사람 같아 보였고 나까지 덩달아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마구 자랑스럽던 참이었다. 조금 울고 나서 개운해진 마음탓인지도 모르겠지만 평소 알고 지내던 친척이었든, 처음 보게 된 사람이었든, 모두가 다 반갑고 정겨웠다.

마당을 가로질러 매달아 놓은 백열등이 주황색으로 빛나는 저녁시간이 되자, 진짜로 왁자지껄한 잔칫집 분위기가 되었다. 우리집에서 택시를 타고 한 20여 분이 걸려 도착했던 것 같은데, 멀지도 않은 그 집에서 나는 할머니와 함께 잠까지 잤다. 5촌이라고 했던가, 6촌이라고 했던가, 할머니가 잘 아는 이웃의 질녀라고 했던가, 처음 보는 사이라도 아주 관계가 깊은 사람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이 사람들은 모여앉아 할아버지 얘기를 하고, 하고 또 하고 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다고, 집에서 자는 듯이 편안히 돌아가시다니, 오복을 다 누린 분이라고,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올해 누가 무슨 학교를 들어간다느니, 어디에 취직을 했다느니, 아이를 낳았다느니 하는 식의 안부를 나누고,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더 길었던 것 같기도 하다. 부엌의 주광색 백열등 역시 밤이 늦도록 반짝거렸고, 맛있는 것들이 자꾸만 나왔다.

내가 잠을 청하던 문간방에는 음식을 내오는 여자들과 화투를 치고 술을 마시는 남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 먼 친척이라는 여자와 아기도 있었다. 엄마 품 안에 안겨서 젖을 빨던 아기가 급하게 엄마를 밀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기가 입을 떼자마자 엄마 가슴에서 젖줄기가 물총처럼 뿜어져 나왔고, 아기는 거센 젖 물살을 얼굴에 맞고 놀라서 버둥거렸다. 그 자리에 있던 나도 아기 엄마도 둥그레진 눈을 마주치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아기도 우리를 따라 웃다 말고 다시 엄마 가슴에 묻혀 잠이 들었다. 깜깜한 밤, 내가 알고 지내던 사람 누구도 곁에 눕지 않았지만 외롭다거나 낯설다거나 무서운 느낌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시신은 여전히 할아버지의 방 안에 누워있다고 했다.  

지나 그림
지나 그림

보이지 않는 가슴

그룹홈에서 일하는 보육사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그룹홈에서 일하는 나의 이야기가 당신과 우리의 이야기로 나누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영

아동그룹홈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입니다. 내 시간의 45%는 네 아이와 함께 그룹홈에서 보내고, 나머지 55%는 내가 낳은 두 아이와 남편이 있는 집에서 보냅니다. 집과 일터, 경계가 모호한 두 곳을 오가며 겪는 분열을 글쓰기로 짚어보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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