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월에는 항상 독일 에센에 간다. 슈필(Spiel)이라는 보드게임 컨벤션 때문이다. 행사장 인근 호텔을 예약하려면 1년 전에 해야 하는 에센 슈필은 매년 10월만 되면 전 세계의, 보드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은 오고 싶어 하는 곳이 된다.
많은 신작들이 소개되고, 여기서만 구할 수 있는 프로모션을 하기도 하고, 고전 보드게임 콜렉터들의 전시와 보드게임 디자이너들의 모임들, 팬미팅 등 수많은 부대행사가 열린다. 행사장에는 중세식 갑옷이나 코스프레를 한 사람들도 흔히 볼 수 있다. 게임 자체에 몰입할 수 있는 행사인 이곳은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놀기 위해서라도 방문하고 싶은 곳이다. 나도 근 20년째 여길 올 때마다 절반은 사심으로 오게 된다.
그런데 2023년 에센은 좀 달랐다. 독일 업체와 오래 체류하며 현지 파트너와 함께 행사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올해 에센에서 우리는 2개의 신작을 선보였다. 하나는 시간 여행 테마의 2인용 게임 Time Division, 그리고 내가 대표를 맡고 있는 회사에서 출시한 귀여운 고양이 테마의 Fish and Katz 라는 게임이다.
독일의 보드게임 생태계에서 에센슈필은 중요한 역할을 갖는다. 독일이 보드게임의 종주국이다 보니 그 영향력은 전 세계에 미친다. 전시회는 겨우 4일동안이지만, 그 준비는 정말 오랜 기간이 걸린다. 10월에 열리는 행사에서 홍보를 하려면 그해 7월 에는 홍보가 시작되어야 한다. 인플루언서나 각종 매체에 이런 게임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전 세계의 권역별 주요 파트너들에게는 봄~여름에 있는 프라이빗 행사를 통해 프로젝트에 대해 알리고 의향을 타진해 봐야 한다. 10월 쇼를 위해 9월에 게임을 준비하려면 7월에는 생산에 들어가야 한다. 그 말은 6월까지는 모든 그래픽적인 부분이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제작기간은 보통 2개월을 잡지만, 건조가 필요한 목제, 금형 작업이 필요한 플라스틱이 들어간다면 생산은 그 이전부터 준비되어야 한다. 아트웍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테마와 스토리 기획이 완성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픽이 5월에 시작된다면, 이 기획은 그 이전에 적어도 3월에는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건 모두 게임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게임시스템의 기획이 완성이 된 이후의 이야기다. 좋은 게임으로 이어지는 아이디어를 생각하거나 발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몇 년이 걸리는 것도 허다하며, 6개월 안에 게임의 시스템이 완성된다면 정말 빠르게 진행된 것이다. 6개월을 잡는다면 2023년 10월에 선보이는 게임의 시작은 적어도 2022년 9월이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부분 이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위에 언급한 두 게임이 단순한 아이디어로부터 게임쇼에 출시될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회사 설립된 지 30년을 넘긴 업계 베테랑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정말 많은 것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4일 동안 열리는 에센 슈필은 이 모든 과정을 거치고 일어나는 결과일 뿐이다.
또 그곳에서는 단순히 게임을 만들고 소비되는 일만 일어나지는 않는다. 게임쇼 전날은 독일 게임대상 시상식이 열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행사는 독일 보드게임 산업의 생태계의 중요한 엔진 중 하나인 SDJ (Spiel Des Jahres), 올해의 게임상을 위한 전초전이기도 하다. 이 해 좋은 평가를 받은 게임들은 다음 해 SDJ의 좋은 후보가 될 것이다. SDJ를 받는다는 것은 게임을 출판한 게임회사들에게 있어 성공과 동일한 말이다.
독일에서 보드게임을 만들며 산다는 것은 이러한 플로우 또는 생태계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고 그것을 해내는 일이다. 이 준비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알고보면 숨은 이유가 있고, 겉보기와는 다른 층위의 노력이 필요한 경우도 많다. 누군가 돈을 들여 에센 슈필에서 화려하게 부스를 낸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생태계에 편입되는 것은 아니다. 수십 년째 매년 변함없는 위치에서 자신의 부스를 내며 성과를 내는 기업들이 정말로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 곳인가 하는 것은 근 20년째 이 일을 해온 나로서도 최근에야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든다. 남이 어떤 고민과 문제들을 발견하고 어떻게 그것을 해결하려 노력하는지 겉모습 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타인에게는 세상에 수많은 간단한 장난감 하나로 보일 뿐인 보드게임을 만들어 이곳에 전시하기 위해 그 모든 과정에 참여하며, 전시장부스 비용을 아끼기 위해 그 커다란 금속 구조물들을 직원들과 함께 조립하고 해체하면서 비로소 나는 이 일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글쓴이 - 정희권
2000년경부터 게임, 장르문학, 만화 등 서브컬쳐업에 종사해 왔습니다. 렉시오, 스파이시 등의 보드게임을 기획, 제작했고, 현재는 만화 등 다른 IP 가 갖고 있는 재미를 게임 시스템으로 구현하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이델베어 플레이랩이라는 보드게임 제작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정희권의 브런치https://brunch.co.kr/@ezns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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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
'세상에 수많은 간단한 장난감 하나로 보일 뿐인 보드게임' 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고생이 녹아들어 있는지... 슈필과 SDJ로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신기하고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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