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교과서 속 김혜순
2~3년 전쯤 신촌에 있는 작은 김밥 가게에 들른 적이 있다. 좋아하는 야채 김밥을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어딘지 낯익은 외모의 중년 여성이 들어왔다. 칼로 잰 듯 반듯한 일자 앞머리에 똑단발, 동그란 뿔테안경. 문득 문학 교과서에서 보았던 김혜순 시인이 아닌가 싶었다. 얼른 노트를 꺼내 사인이라도 받아야 하나 싶었지만 참았다. 확신이 없기도 했지만, 혹여 맞다고 하더라도 그의 일상을 침범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교과서에서 보았던 그의 시는 ‘납작납작-박수근 화법을 위하여’인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현대 화가 박수근의 판화 속 인물들을 보고 납작하게 눌린 그들의 삶이 아무래도 불공평하다고 하나님에게 항변하는 작품이다.
그러니까 작품에서 그는 발바닥도 없고, 입술도 없고, 표정도 없는 어두운 판화 속 사람들을 가리키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땅하냐며’ 몇 차례고 묻는다. 문학 교과서에서 그를 접했을 때, 그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고달픈 삶을 사는 서민들을 대신해 강력하게 어딘가에 따지고 들어주는 ‘정의의 사도’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에 본 ‘서울국제작가축제(SIWF)’의 강연과 <새타니---천공의 복화술>이라는 그의 수필을 통해 이런 내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의 수필, <새타니---천공의 복화술>
며칠 전 주말 저녁, 유튜브로 ‘서울국제작가축제(SIWF)’의 개막 강연을 보았다. 코로나로 몇 년 간 줌으로만 진행되던 이 행사가 올해 9월에는 모두 대면 행사로 바뀌었고, 오랜만에 행사가 크게 진행된 듯했다. 강연뿐 아니라, 서울국제작가축제 웹사이트에 가면 참여 작가들의 에세이도 모여 있어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읽게 된 게 김혜순 시인의 수필 <새타니---천공의 복화술>이다.
사실 ‘새타니’라는 단어가 정말 낯설었다. 어떤 주술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일까 생각하기도 했다. ‘천공의 복화술’이라는 말과 어떻게 연결될지 막연하기도 했지만, 어떤 의미를 품고 있을지 궁금했다. 천천히 글을 읽어보고, 주제의 묵직함에 심장이 철렁하는 마음으로 강연을 보기 시작했다.
강연에는 우연인지 영문 자막이 같이 나왔는데, 거기에서는 ‘새타니’를 ‘Bird rider’로 번역했다. 그러니까 새타니는 ‘새를 탄 사람’이었다. 이어지는 김혜순 시인의 글 속에도 새타니에 대한 해석이 덧붙여 있었다.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아 굶어 죽은 아이의 영혼, 그 영혼이 무당에게 실린 것’이라고 했다. 새타니에 대한 설명이 나오기 전, 입양되어 학대받아 죽은 16개월 아기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문득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지만, 그의 수필에도 강연에도 아기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망자에 대한 배려였을 것이다.
수필에는 그 외에도 제주 4.3사건, 가족의 죽음, 그리고 시인의 ‘환 공포증’에 대해 언급되어 있었다. 슬픔과 환 공포증이라고 하니 문득, 얼마 전 미술관에서 본 ‘물방울 화가’의 그림도 떠올랐다. 오랜 세월 물방울을 그린 그 화가는, 6.25 전쟁을 겪으면서 죽어나간 동기들과 그 상흔을 물방울에 담았다고 했다. 어쩌면 김혜순 시인의 환 공포증과 이 물방울 화가(김창열 화백)의 작품은 우리 민족이 경험한 역사 속 슬픔, 거기에 맺힌 피눈물이라는 점이 맞닿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의 환공포증이 더 심해졌다. 나는 일사불란한 구멍들을 못 견딘다. 성냥들이, 이쑤시개들이, 면봉들이 일사불란하게 들어 있는 통을 열지 못한다. 깨가 심하게 뿌려진 요리를 거절한다. 그런 것 앞에서는 눈을 감는다. 누군가 상처에 뿌려진 깨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차에 실려가는 파이프들, 건물 외벽을 둘러싼 질서정연한 장식 구멍들. 여기서 더 나아가 일사불란하게 행진하는 군인들. 도열한 사람들의 머리를 위에서 조감한 사진들. 거기서 더 나아가 이제 나는 책을 읽지 못한다. 책을 펼치면 맨 먼저 ㅇ의 구멍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조그만 공백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새타니---천공의 복화술> 중, 전문 링크 https://www.siwf.or.kr/writers/333/essay
수필 <새타니---천공의 복화술>을 통해 본 김혜순 시인은 아무래도 이전에 내가 교과서를 통해 보았던 ‘누군가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정의의 사도’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세상에 부유하는 슬픔을 작가라는 임무로, 아니 죽은 이의 영혼을 실은 무당 ‘새타니’로서 고스란히 받아 전달하는 영혼의 번역가가 되고자 하는 듯했다. 작가라면, 그런 임무를 가져야 한다고 김혜순 시인은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마 수필의 제목에 ‘복화술’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포레스트 갠더의 월담(Beyond Narrative): 이야기 너머
<월담: 이야기 너머(Beyond Narrative)>는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주최한 글로벌 문학 축제인 제11회 서울국제작가축제의 주제이다. 개막 강연에는 세계적인 문학상 그리핀 시문학상을 수상한 김혜순 시인과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의 시인 ‘포레스트 갠더’가 함께했다. 두 시인은 각자의 수필을 낭독하고, 서로의 작품을 자신의 시선으로 재해석했다. 김혜순 시인의 <새타니---천공의 복화술>에 대한 포레스트 갠더의 해석이 신선하면서도 대단했다.
포레스트 갠더의 시집은 아직 한국에서 번역되어 출간되지 않아 읽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의 수필이나 강연에서 김혜순 시인의 작품에 대해 해석하는 걸 보며, 어쩌면 그가 생태학의 관점으로 문학을 보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실제로 그는 강연에서 ‘Eco-poetics(생태 시학)’이라는 단어를 수차례 사용하며, 김혜순 시인의 작품에 대해 설명했다.
그가 말하는 생태 시학에 대해 추측해 보자면,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시선이 아니라 ‘존재 혹은 자연’을 하나의 범주로 인간, 동물, 식물, 여성, 남성을 통합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를테면, 김혜순 시인의 <새타니---천공의 복화술> 속 고양이가 되어버린 여성 이야기에 ‘여성 짐승’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 그리고 ‘새타니’의 부분에서 인간이 ‘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존재가 완벽히 겹쳐진 ‘새를 하는(do) 것’으로 표현한 것처럼 말이다. 포레스트 갠더는 특히 이 ‘휴먼-논 휴먼(human/non-human)’의 경계가 없는 김혜순 시인의 작품에 감탄했다.
여자는 고양이 복화술을 몸으로 시행하게 되었다. 고양이(할머니)가 몸에 들어오면, 혹은 할머니가 고양이를 부르듯 자신을 부른다고 상상하면 최면 상태에서처럼 고양이로 살았다. 이 내용을 읽었을 때,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 아닌가 생각했다. 내가 시를 쓰는 순간, 지능은 낮아지고, 정신은 박약해지고, 몸은 여자짐승i으로 트랜스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나는 새에 ‘관하여about’ 쓰지 않고, ‘새하는’ 사람이고자 했다. 내가 입을 열면 새 머리가 입술 밖으로 내다본다.
<새타니---천공의 복화술> 중
포레스트 갠더의 해석은, 여태 내가 읽어온 김혜순 시인의 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계였다. 두 시인이 각자의 글을 낭독하고, 서로의 작품을 자신의 깊이로 해석하는 것을 보니 영상을 보고 있는 나도 자연스럽게 인식의 지평이 달라지는 듯했다.
개인의 울타리를 넘어 그것이 허물어지고 확장되는 경험. 아마 이것이 이번 ‘서울국제작가축제(SIWF)’가 준비한 <월담:이야기 너머>가 아닐까 싶다. 주말 저녁에 유튜브로 접한 강연 하나가 나에게 넘어와 또 다른 세계를 열어 주었다. 달빛이 비치는 은은한 저수지라는 의미의 ‘월담(月潭)’처럼 아름다운 주말 밤이 된 것 같은 날이다. 덕분에 하루의 마무리가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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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번역원에서 주최한 글로벌 문학축제인 ‘서울국제작가축제(SIWF)’는 한국 문학과 세계 문학이 서울을 무대로 쌍방향 교류하며 세계와 언어, 삶과 문학, 작가와 독자가 어우러지는 무대를 만들어오고 있다. 8개국 12명의 해외 작가와 국내 23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서울국제작가축제(SIWF)’ 웹사이트(https://www.siwf.or.kr/)나 인스타그램 링크(http://linktr.ee/siwf_insta)에 방문하면 올해 축제에 참여한 35명의 에세이를 한자리에서 읽을 수 있으며, 모바일 게임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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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프로그램 전체는 아래와 같이 진행되었다. 이 글에서 다룬 건 ‘개막 강연’ 부분으로, 앞으로 <세상의 모든 문화> 뉴스레터를 통해 각 영상과 그 영상에 대한 에세이가 배송될 예정이다.
- 개막 강연
- 작가, 마주 보다: 두 명의 국내외 작가의 대담
- 작가들의 수다: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제 이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 작가의 방: 참가 작가의 작품 세계 및 번역에 대한 견해를 듣는 시간
- 낭독회
* 이번 서울국제작가축제 뉴스레터는 서울국제작가축제를 주최한 한국문학번역원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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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보배
매달 18일 세상의 모든 문화 뉴스레터에서 <탱고에 바나나>를 연재합니다.
탱고 베이비에서 탱린이로 변신 중. 10년 정도 추면 튜토리얼 단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여, 열심히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은 국어를 가르치는 데에 보냅니다. <세상의 모든 청년>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Brunch: https://brunch.co.kr/@se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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