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박사가 '어린이 글쓰기' 운영자 된 계기
코로나 기간 12명으로 시작, 200명까지 늘어나
23번째 투고 출판사에서 마침내 출간 계약
아버지의 직업은 판사였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남들이 보면 부러워할 집안이었을 지 몰라도 그(녀)에게는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다. 예민한 성격의 아버지를 자기 주장이 강한 어머니는 맞춰주지 못했다. 어린 그(녀)가 어떻게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저 자신의 방에서 오돌오돌 떨면서 '이 불편하고 힘든 상황'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도했을 지도 모른다.
그가 여러 대학에서 시간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쳐도 무엇때문인지 본인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영어학원을 크게 열자, 이전과는 좀 달랐다. 이제는 꼭 맞는 옷을 입은 것 같다고 할까. 하지만, 학원 경영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가르치는 건 재미가 있어도 학원을 운영하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시아버지가 '이제 그만 정리하자'고 해도 그는 멈추지 못했다.
한 번 시작한 일은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맺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는 사이 몸과 마음은 황폐해져갔다. 학원을 정리하고는 2년 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유배지에서의 유형(流刑)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러다 독서토론을 만나면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간에 했던 공부는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의문이 가득했다.
함께 책을 읽고, 나눈다는 것은 단순히 객관적 독서, 균형 잡힌 독서를 하는 것 이상이었다. 몰입을 잘하고, 다른 사람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그가 다른 사람들의 시간 배분, 시간 관리 노하우를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은 주변 사람들의 요청에 응하다 보면 정작 자기 자신의 시간은 없어지기 일쑤인데, 그걸 균형있게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괴로움 대신 즐거움 주고파 시작
조금조금, 주저주저 ... 삐걱삐걱, 와글와글
느리고 소심한, 아프고 활발한 아이들 맞춤
그러던 그가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은 어린 시절의 불안과 공포를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바로 <어린이 글쓰기> 모임이었다. 코로나가 온 세상을 가득 뒤덮었을 때, 작은 숨구멍을 낸다는 생각에 기획한 온라인 비대면 모임은 혼자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확장되었다. 처음에는 12명으로 시작했는데, 참여한 아이들의 엄마들이 입소문을 내서 30명으로 늘어났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피드백만으로는 이 상황이 설명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찾은 엄마들이 많았다. 30일간 진행되는 글쓰기 모임치고는 회비가 너무 싼 이유도 있지만, 그것만으로 이렇게까지 확장되리라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코로나 상황으로 모든 학교가 문을 닫은 영향도 컸다. 한창 때는 150명이 넘는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애초에 초등 3-6학년으로 시작했는데, 초등 1-2학년, 중학생 반까지 개설해 달라는 요청이 쏟아쳤다. 혼자서 30명 이상을 맡을 수는 없어 함께 글쓰기 모임을 하던 분들과 함께 준비했다. 모두 4개반이었고, 초등 저학년과 중학생 반까지 합하면 모두 200명이 훌쩍 넘었다.
그는 운명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건 물론이고, 혹여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을 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매일 글로 만나는 게 너무 신났다. 보람은 둘째 문제였다. 그렇게 3년동안 매일처럼 아이들에게 글감을 제공하고, 아이들의 일상은 물론이고 그들의 말못할 고민들을 글로 접했다. 부모님과 상담이 필요할 만큼 우려가 되는 글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바로 학부모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아이의 마음을 글로나마 이렇게 들어주면, 고민은 어느덧 해소되고, 다시 그 나이대의 밝고 명랑한 아이로 돌아온다는 걸 3년의 시간동안 오롯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번에 출간한 <아이들이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초록비책공방)라는 책을 그런 아이들과의 글쓰기 여정을 담은 보고서다. 출간 뒷얘기를 들어보았다.
- 어린이 온라인 글쓰기를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독서토론 및 글쓰기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데요. 고등학생이나 성인 대상으로 글쓰기 강의를 하러 가면 몇 줄 쓰기도 어려워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이런 사람들이 글쓰기가 두렵다고 생각하기 전에 즐거움을 먼저 맛보게 된다면 어땠을까?
만일 초등학교 저학년 때 글을 쓴다면, 틀릴까 봐, 혼날까 봐, 다른 친구들보다 못 써서,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서 무서워하기 전에 글쓰기에 재미를 붙인다면, 그들의 글쓰기 인생도 달라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시작하게 되었어요. 코로나 터널에 들어가기 직전에 2020년 1월, 온라인 어린이 글쓰기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올해로 4년째에 접어들었어요.
- 책으로 내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 출판사와 계약은 어떤 계기로 하게 되었나요?
원래는 다른 출판사와 계약을 했고, 디자인 작업까지 완성됐는데요. 출판사 사정으로 계속 미뤄지다가 계약이 파기되었습니다. 원고를 보낸 후 1년 7개월을 기다린 다음이었어요. 지쳐버린 몸과 마음을 충전하기 위해 처음으로 혼자 해외여행을 떠났습니다. 이때 300곳까지 투고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어요. 매일 업데이트한 기획안을 투고한 후에 호텔방을 나가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출판사별로 번호를 붙이면서 발송을 했는데, 2023년 1월 16일 '초록비책공방'이라는 출판사에서 회신이 왔어요. 23번이었습니다. 윤주용 대표님이 보내온 회신은 이런 내용이었어요.
"무심코 메일을 열었는데, 선물 같은 투고가 들어와 반가운 마음에 답장을 씁니다. <아이들이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란 제목이 마음에 확 와닿아서 보내주신 기획안, 구성안, 샘플 원고, 이력서까지 단숨에 읽어보았습니다. 출간하고 싶어요."
행운이 찾아온 날이었습니다. 제 원고를 '발견'해주신 대표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 라디오 방송에도 출연하신다고 저자 소개글에 있어요. 청취자 반응이나 주변의 반응도 궁금해요.
충북 CBS 라디오 시사포워드에서 <만만한 글쓰기> 코너를 진행하고 있어요. 그림책 본문을 활용해서 대화체로 글을 쓰거나 그림책 장면을 묘사하기, 다른 작가의 문장을 이용해서 쓰기, 일상 대화 중 자신이 즐겨 사용하는 단어를 연결해서 쓰기, 어린 시절 기억나는 에피소드 쓰기, 내가 경험한 일을 상대방 입장에서 다시 쓰기 등을 안내했습니다.
이수복 피디님을 통해서 청취자 반응을 듣고, 방송을 듣고 있는 지인에게 받은 피드백을 모았어요.
“그림책을 활용한 방법이 신선하다. 구체적인 예시로 어려운 첫 문장을 쉽게 쓸 수 있도록 유도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용기를 얻었다. 전보다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줄어들었다. 어렸을 때의 나로 돌아가서 회상하며 글을 쓰라는 방법이 인상적이고 실제로 해보니 글감이 많았다. 규칙적인 습관을 만들기 위해 타이머를 맞추어놓고 쓰라는 방법도 효과적이었다.
치유의 이야기 같다. 오수민 작가가 소개하는 책과 설명이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정형화된 글쓰기 기법이 아니라 유익하다. 일상을 글로 표현하는 즐거움을 느꼈다. CBS라디오 시사포워드에서 좋은 배움의 기회를 만들어 주어서 너무 감사하다.”
- 책에 담은 내용을 두 문장으로 정리해 주신다면요.
첨삭 없이 칭찬과 격려만으로도 충분하다! 저는 빨간펜 첨삭을 하지 않고 공감과 칭찬으로 소통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자는 운영방침을 정했습니다. 아이들의 글에 귀를 기울여주고 무슨 이야기라도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주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글쓰기 세계로 들어오게 되어 있거든요.
아이가 글쓰기를 싫어한다면 ‘싫다’라고 말해도 되고, 글감 주제를 보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면 ‘없다’라고만 두 글자만 써도 글을 쓴 것으로 하고 피드백을 했습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틀렸어도 개의치 않았고, 아이의 글에서 어떤 점이 좋은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습니다.
아이들 유형별로 글쓰기 접근방식을 다르게 한다! 아이마다 성향과 글을 쓰는 속도가 다르므로, 아이의 특성과 속도를 고려해야 해요. 저는 ‘천천히 쓰는 아이들, 소심한 아이들, 마음이 삐걱거리는 아이들,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아이들’과 같이 아이들을 4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맞춤형 글쓰기를 제안했습니다.
천천히 쓰는 아이들에게는 재촉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려주는 여유를, 소심한 아이들에게는 자신감을 채워줄 칭찬과 격려의 말을, 고민이 많고 답답한 게 많은 아이에게는 무슨 말이든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을, 주도적으로 소통하는 아이들에게는 글쓰기 놀이터에서 마음껏 놀 수 있는 자유를 주었습니다.
다양한 아이들이 온라인 카페에서 모여있는 공간을 소개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법, 아이들 성향별 글 사례, 쓰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글감 예시, 그리고 운영자가 피드백을 하는 방법을 넣었습니다.
- 이학박사이신데, 어린이 글쓰기에 매진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극심한 불화를 지켜보며 무서운 꿈을 꿀 때가 많았을 정도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는데요. 부끄러워서 다른 사람에게 제 비밀을 털어놓지 못했어요. 어느 날, “제발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라는 마음으로 거친 파도 속에서 부서질 듯 흔들리는 난파선을 그려서 미술 시간 숙제로 들고 갔는데요. 기대와는 다르게, 선생님은 형편없는 그림을 그려왔다고 저를 몹시 혼내셨어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전 그때부터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지요.
아이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제 모습과 연결되었습니다. 누군가 다정하게 안아주기를 바랐던 제 안의 ‘어린이’를 보았습니다. 옆에서 아이들을 ‘늘 응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감정과 생각을 글로 마음껏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이 자기 내면에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도록요. 아이들을 정말 사랑해요. 저 또한 아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 추천사를 써주신 박현주 작가님과는 어떤 인연이 있었나요?
2020년 12월부터 세 달 동안 출판 계약서를 세 개 받았습니다. 공저 <온라인 책 모임 잘하는 법>과 <그림책 모임 잘하는 법>, 마지막 하나는 이번에 출간된 <아이들이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입니다. 학인들과 함께 쓰는 책은 약속을 지켜야 하니까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공저 원고를 발송하고 나니, 단독저서 원고 마감일이 딱 한 달 남았더군요.
원고를 빨리 보내지 않으면 계약이 해지되지나 않을까 전 불안했어요. 그때 전 샘플 원고를 보낸 후 한 줄도 쓰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미룰 수도 없고, 어떻게 완성할 수 있을까 절망했어요. 계약일까지 원고를 보낸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로 생각되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박현주 작가님의 <이까짓 거!> 그림책을 펼치고 용기를 냈습니다.
그림책을 좋아하는 제게 이 작품은 ‘생명의 은인’처럼 다가왔어요. 이 멋진 책을 알리고자 <이까짓 거!>로 독서토론을 여러 번 했어요. 박현주 작가님이 토론에 참관하신 적도 있습니다. 또, 박현주 작가님 초청 북토크에서 진행을 맡으면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요. 이 책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말씀드린 인연으로 추천사를 부탁드렸어요. 작가님이 제 글에 공감을 해주셔서 정말 기쁩니다.
- 이학박사이신데, 어린이 글쓰기에 매진하게 된 이유도 궁금합니다.
실험을 하고, 논문을 쓰면서 정답을 찾는 과정이 매번 힘겨웠습니다. 대학에서 8년 정도 강의를 했는데도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건 매번 두려웠습니다. 그러다가 하던 일을 모두 중단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게 되었습니다.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몰라서 한참 방황하다가 혼자 백일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계속 글을 쓰면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나의 재능은 어디에 있는지?’도 찾게 되었습니다. 저처럼 한참 어른이 되어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한다면 자신에 대해서 잘 알게 될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진심을 다해서 운영했습니다.
- 앞으로 쓰고 싶은 책이 있나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상처, 글쓰기를 통해 변화되는 과정, 현재의 제 모습을 담은 에세이를 쓰는 중입니다. ‘나’를 만든 과거의 순간으로 들어가, 그 당시 표현하지 않았던 감정을 이야기하고, 내면자아와 소통하면서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어서요. 과거의 ‘나’를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을 테고, 제 현재와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 앞으로 하고 싶은 일, 계획도 들려주세요.
모든 어린이들이 글쓰기를 하는 세상을 꿈꿉니다. 전국 방방곡곡 독서동아리, 학교, 도서관을 찾아다니면서 ‘어린이글쓰기 홍보대사’로 활동하려고요.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글쓰기를 신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단, 서두르지 않고 즐기면서요. 미래에 이 책이 해외 번역본으로 출간되는 꿈도 갖고 있습니다. 그런 날이 올까요?
*
아이들은 어른의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여러 혼란을 겪는다. 사춘기의 청소년 시기가 그렇다.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표현으로는 모두 담을 수 없는 그들만의 이야기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직은 못다한 아이들의 이야기가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자꾸 발굴한다면, 해외에 있는 아이들과도 교감할 수 있지 않을까.
책 앞머리에 제시한 아이들의 글쓰기 성향을 4가지로 구분한 것이 아주 흥미롭다. 조금조금, 주저주저, 삐걱삐걱, 와글와글. 각각 천천히 쓰는 아이들, 소심한 아이들, 마음이 삐걱거리는 아이들, 소통하는 아이들로 대별했다. 그는 정신과 의사인 올리버 색스의 자서전 <온 더 무브>(알마)에 나온 글처럼 아이들도 글을 쓰면서 '만족감'을 느끼고, 그 어떤 것에서도 얻지 못하는 '기쁨'을 느끼기를 바란다.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 손에 이끌려 글쓰기 프로그램에 찾아온 초등학교 3학년 세은이의 고백이 글쓰기를 왜 해야 하는지, 또 숙제처럼 의무로 하면 안 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글쓰기가 너무 재미있어요. 저는 이제 글쓰기를 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선생님과 오래오래 글쓰기를 하고 싶어요."
* 글쓴이(인터뷰이) - 신기수ㅣ문화예술 기획자
대기업에서 언론홍보 업무를 담당했고, 벤처기업에서 세상과 부딪쳤습니다. 독서공동체 숭례문학당을 12년동안 운영했고, 현재는 문화예술 플랫폼 즐거운예감(https://artwith.kr)의 대표를 맡으면서 예술 감성교육, 인문학여행, 공동체주택, 공연 프로그램의 기획자로 살고 있습니다. 저서로 <이젠, 함께 읽기다>(북바이북, 2014, 공저)과 <걷는 토끼 이야기>(예감, 2022)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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