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엄마의 갱년기 선포식이 있겠다”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일요일 저녁, 나는 마치 대학 수석 합격 소식을 발표하듯 나의 갱년기를 자랑스럽게 선포했다. 세 아이들의 눈이 잠시 커지는가 싶더니 이내 큭큭 대며 ‘너네 이제 다 죽었쓰’ 라는 말을 눈빛으로 주고받는 것 같았다. 남편도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는 게 보였다. 왠지 생산성을 다 한 인간이 된 것 같아 갱년기라는 단어를 입에 담기 싫었지만 작년부터 예상치 못한 몸의 변화를 겪으며 더 이상 외면할 일이 아니구나 느꼈다. 인정하기 싫다는 고집을 내려놓고 다가올 새로운 시절과 잘 지내보기로 마음먹었다. 가족들에게 나의 새로운 전환기를 발표하며 엄마가 갱년기를 보다 명랑하게 통과하기 위해 한 달에 한 번 '정원 여행'을 떠날 예정이니 기쁘게 보내달라고 말했다. 아이들과 남편 모두 좋다고 했다. 갱년기를 잘 보낼수 있다면 좋아하는 정원을 찾아 얼마든지 떠나라고, 가서 좋아하는 자연을 맘껏 누리고 글을 쓰다 돌아오면 훨씬 기운이 날 거라고 응원해 주었다.
내게 식물을 키우는 재능이 있다니
정원에 대한 새로운 꿈이 움튼 시기는 공교롭게도 팬데믹과 맞물린다. 대면 관계가 전면 차단되고 모두가 옴짝 달싹 못한 채 집에만 갇혀있어야 했던 그 시절, 나는 처음으로 ‘초록의 갈증’을 느꼈다. 엄청난 바이러스 균을 피해 지하 방공호에 몰려 지내는 피난민처럼 아이들과 다닥다닥 붙어 지내며 외부 활동을 못하다 보니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탁 트인 자연 속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나무 그늘 아래 하루 종일 누워있는 상상을 하루에도 몇 십 번씩 떠올리던 나는, 어느새 ‘마음 줄 초록 식물 하나라도 우리 집에 들여야겠다’는 구체적인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폭풍 검색으로 주문을 넣은 다음 날, 내 얼굴 위로 귀여운 그늘을 건넬 만큼 커다란 잎 다섯 개를 가진 대형 알로카시아가 집으로 배달되었다. 알로카시아를 시작으로 뱅갈 고무나무, 떡갈 나무, 아레카 야자 등의 대표적인 대형 관엽 식물이 순서를 기다렸다는 듯 매일 입장했다. 초록이 더해진 거실을 보니 그제야 조금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식물을 키우며 발견한 놀라운 점은 내가 식물을 꽤나 잘 돌본다는 사실이다. 분명 나도 2-30대엔 수많은 화분을 저세상으로 보낸 평범한 마이너스의 손이었는데, 아이 셋을 십 대까지 키우느라 40대 후반이 되어버린 나는 놀라우리만치 식물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굳이 비결을 묻는다면 ‘개별성’을 ‘존중’하며 육아를 했던 시간이 건넨 지혜랄까. 개성 강한 세 아이를 키우며 저마다의 고유한 생명력을 해치지 않으려면 그들의 취향과 바람, 타고난 기질을 존중하며 섬세하게 반응하는 법외에는 답이 없었다. 가끔 이 녀석들은 왜 이리 별나냐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세상 유일한 단 하나의 존재니 그렇지라고 생각을 고쳐먹으면 그게 또 어렵지 않았다. 이런 훈련을 15년간 했으니 식물을 대하는 나의 자세가 달라진 건 당연한 결과. 이제는 그 어느 식물도 내 집에서 죽어나갈 이유가 없었다.
꽃피우는 마법사가 된 것 같아
식물 사랑이 지극했던 나는 매일 물도 주고, 시든 잎도 살피고, 수형을 잡아주는 가위질도 하며 ‘가드너 코스프레’를 하고 싶은데 건강하게 자란 대형 식물들은 딱히 해줄 일이 별로 없었다. 더 다양하고 많은 식물을 키워보고픈 마음에 창고처럼 방치되었던 베란다를 정원으로 활용하기로 남편과 합의했다. 베란다 벽에 선반을 설치하고, 식물과 어울리는 라탄 조명도 달고, 행잉 플랜트를 걸기 위한 천정 레일까지 설치하니 베란다 정원은 꽤 오랜 세월을 품은 아늑한 온실처럼 보였다. 거실 폴딩도어를 열어두면 거실부터 베란다가 시원하게 확장되면서 여러 관엽 식물과 꽃들이 어우러진 싱그러운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님들이 우리 집을 방문하면 베란다 정원부터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해 겨울 처음으로 튤립과 수선화, 히아신스 구근을 30구 정도 심었다. 생명의 시작을 더 가까이서 관찰하고 싶다는 바람을 실행으로 옮긴 것이다. 이전까지는 꽃봉오리가 가득 맺힌 화분이나 수형이 어느 정도 잡힌 화분을 들이느라 베란다 정원에 어떤 풍경으로 채워질지 대략 감을 잡을 수 있었는데, 구근을 심고 나니 흙이 가득 담긴 화분들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정원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이 되지 않았다. 작은 양파같이 생긴 저 구근이 땅속에서 정말 싹을 틔워 올릴까? 내년 봄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으면 실망스러워서 어떻게 하지? 임신을 한 산모들은 초음파로 아기의 모습을 볼 수라도 있지, 구근을 심어둔 초보 가드너는 그 어디에서도 생명의 힌트를 얻을 수 없다 보니 3개월 동안 베란다를 들락거리며 흙 표면을 살포시 만져보는 게 최선이었다.
길고 긴 겨울의 끝자락이던 2월의 어느 아침, 포슬포슬한 흙 위로 뾰족한 초록 싹이 올라온 게 보였다. 죽순처럼 뾰족하고 단단한, 심지 있는 싹들이 화분 군데군데 얼굴이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와우! 살아있었구나, 너희를 얼마나 기다렸다고! 이제야 뱃속 생명의 초음파 사진을 처음 보고, 태동을 느낀 산모의 환희를 알 것 같았다(나는 임신과 출산을 겪지 않고 세 자녀를 얻었다). 정말 생명이 잉태되고 있었어, 내가 그 생명을 키워냈다고! 다양한 형과 색의 튤립과 수선화, 히아신스들이 시차를 두고 경주하듯 정원을 밝히는 동안 나는 마법사, 전능자, 창조주라도 된 양 매일 아침 흥분상태가 되어 사진을 찍어대고 글을 썼다.
그렇게 베란다 정원 축제가 시작됐다. 히아신스가 가장 먼저 진한 향을 터뜨리며 개화를 시작하면, 1-2주 뒤쯤 조생종(일찍 피는) 튤립들이 하나 둘 자태를 드러내고, 그 뒤로 우아한 수선화 여러 종이 단아한 자태와 향을, 이어서 만생종(늦게 피는) 튤립들이 크고 탐스러운 자태를 뽐냈다. 아무것도 모르고 예쁜 순서대로 마구 심은 가드너의 열정에 하늘이 감동한 건지 무지가 빚어낸 우연의 결과는 기대 이상 아름답고 황홀한 봄 축제로 돌아왔다. 이 아름다운 꽃들이 정녕 내 손에서 피어났단 말인가. 나는 정말 무언가를 키워내고 꽃피우는데 재능이 있구나 하는 자뻑과 함께, 아이를 키우던 시간과는 조금 다른 결의 기쁨과 아름다움, 성취감이 나를 뒤흔들었다. 몇 해간 구근식물로 3,4월을 화려하게 열다 보니 생명을 키워내고, 식물들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가드닝이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래, 노년엔 가드너로 살아가야지. 아름답고 생명력 가득한 정원을 꼭 가꾸고 싶어.
언젠가 완성될 나의 정원을 꿈꾸며
아파트 2층이다 보니 우리 베란다 창밖은 조경수 가지와 잎사귀로 많이 가려져 있다. 방문한 이들은 숲속에 들어온 듯 싱그러운 아늑함이 좋다지만, 매년 무성해지는 가지로 인해 베란다로 들어오는 햇볕의 양이 적어지다보니 크고 탐스러운 꽃을 피우는 일은 더욱 요원해졌다. 겨우 피어난 몇몇 꽃들도 노지에서 햇볕을 듬뿍 받고 자란 꽃들에 비하면 아직 발달이 한참 더딘 유치원생 마냥 가늘고 여린 성장세를 보여 마음이 아쉬웠다. ‘나도 땅에 심고 싶다. 유튜브에서 본 것처럼 건강한 토양에서 뜨거운 태양을 받으며 굵고 단단하게 꽃대를 올리는 야생화를 키워보고 싶다’는 마음이 훅 올라왔다. 이제는 화분이 아닌 땅에 직접 식물을 심고 싶다는 마음, 마당이 있는 집에서 정원을 가꾸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진지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의 소망을 들은 남편이 ‘언젠가 은퇴하고 나면 그렇게 살자’라며 막연한 동의를 해주었지만, 당장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 나이 올해로 오십. 갱년기 증상이 시작되며 체력도 예전 같지 않다 보니 마음이 괜스레 서글프기도, 자주 조급해지기도 한다. 몇 년 내 마당이 있는 집으로의 이사는 쉽지 않고, 정원을 가꾸려면 일단 식물과 땅, 식재 디자인에 대한 지식이 필요할테니 정원 공부부터 시작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갱년기라고 힘없이 늘어져 있기보단 명랑하고 활기차게, 다가올 미래를 위해 정원 밑그림을 조금씩 그려보자 마음먹었다. 가드닝 관련 책을 사고, 온라인 정원 클래스를 등록하며, 직접 두 발로 찾아갈 전국의 특색 있는 정원 리스트를 정리해갔다. 코로나 시절을 거치며 발견한 뜻밖의 재능이 나를 새로운 꿈으로 이끌었고, 뒤이어 찾아온 갱년기는 나를 집 밖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인생 참 재밌구나 싶다. ‘세상을 바르게 보면 전 세계가 정원임을 알 수 있다’는 프란시스 호지슨 버넷의 문구(책 : 정원을 가꾼다는 것 13p)를 부여잡고 ‘명랑 갱년기’의 발걸음으로 ‘전국 정원 여행’을 떠나보려 한다.
글쓴이 : 이설아
<가족의 탄생>,<가족의 온도>,<모두의 입양>,<돌봄과 작업/공저>를 썼습니다.글쓰기 공동체 "다정한 우주"에서 삶과 화해하는 글쓰기를 안내하고 있으며, 정원이 있는 시골 민박을 꿈꾸는 초보 가드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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