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 경쟁?
지난번 뉴스레터에서 저는 '게임을 정의할 수 없다'고 했는데요, 이를 읽으신 많은 분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게임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내려보려고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글을 쓰면서 여러 번 시도해 보았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멀리서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네요.
가장 헷갈리는 부분이 '경쟁'이 게임의 필수요소인가 하는 지점인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도 살펴봤듯 많은 게임이 경쟁을 제공하지만, 혼자서 벽에 공을 튀기거나 모래성을 쌓을 때는 경쟁의 요소가 사라집니다. 게임은 항상 어떤 종류의 경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혼자 놀 때도 경쟁의 요소가 숨어 있다고 합니다. 벽에 공을 튀길 때도 공을 던지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어떠한 형태로 공을 튀기는 것이 더 좋다는 기준이 있으며, 혼자서 놀 때도 해당 기준과 경쟁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그렇다면 그 기준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모양 맞추기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기를 보신 적 있습니까? 아기는 왜 블럭과 맞는 모양의 구멍에 블럭을 집어넣는 것을 재미있어할까요? 부모가 박수를 쳐 주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아기에게는 어떤 아주 원초적인 욕구와 능력이 있어서, 맞는 모양의 구멍에 블럭을 집어넣는 게임을 하고 싶어하는 걸까요?
전자라면 혼자 노는 게임도 타인이 부과한 기준과의 경쟁이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겠지만, 후자라면 우리에게는 타인과의 경쟁이나 인정과는 관계없는, 태어날 때부터 자연적으로 주어진 게임이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죠. 저는 후자에 조금 더 마음이 갑니다. 타인과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본능이 있는 한 게임은 존재한다는 생각 말입니다.
"재미는 없는데 200시간째 하고있어요"
많은 게이머들이 기다려온 비디오 게임 <디아블로 4>가 지난 6월 출시되었습니다. 판매량도 많고 플레이 순위도 높습니다. 그런데 흥행과는 별개로 디아블로 4를 오랫동안 플레이한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일을 하는 것 같다' 는 것입니다.
처음 1996년 디아블로 시리즈의 첫 작품 <디아블로>가 출시되었을 때의 반향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플레이어와 적이 번갈아가며 할 행동을 결정하는 턴제 롤플레잉 게임이 대다수였을 때, 실시간으로 몬스터를 공격하고 피해야 하는 디아블로는 부드러운 애니메이션과 으스스한 사실적 그래픽, 실시간 액션이 주는 긴장감으로 플레이어를 압도했죠. 초등학생이었던 저는 무서워서 어깨 너머로 동네 형의 플레이를 지켜보다가 한참 후에야 직접 플레이해본 기억이 납니다. 체력 회복 포션이 다 떨어지고 체력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해골 병사들을 피해 달아나던 때의 기분이 생각나네요.
저는 어려서 영어로 된 스토리를 모두 이해할 순 없었지만, 강력한 보스에게 죽임당한 후 장비를 정비해 떨리는 마음으로 던전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디아블로의 경험은 설명되었습니다. 지옥문이 열려 폐허가 된 세상에서 악마의 흔적을 추적하여 대악마 디아블로를 처치하는 영웅이 되는 것이 디아블로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판타지의 핵심이었죠.
캐릭터가 성장하고 아이템을 수집할 수 있는 역할 수행 게임RPG이 아니었다면, 게임이 제공하는 컨텐츠는 이쯤에서 끝났을 겁니다. 하지만 <디아블로>는 대악마 디아블로를 처치한 후에도 캐릭터를 성장시키고 아이템을 수집하며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성장과 수집이 재미요소인 역할 수행 게임으로서 자연스러운 선택입니다. 2000년에 출시된 <디아블로 2>에서는 더 나아가 캐릭터가 성장할 수 있는 구간인 레벨 제한을 늘리고, 훨씬 더 다양한 아이템을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플레이어들이 교류하고 함께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도록 한 인터넷 서비스 <배틀넷>이 제공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도래한 인터넷 시대에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캐릭터를 쉽게 확인하고 경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희귀하고 좋은 아이템을 얻기 위해 같은 퀘스트를 반복해서 플레이하고, 같은 몬스터를 죽이고 또 죽였습니다.
이후 나온 <디아블로 3>에서는 최고 레벨인 70레벨을 달성한 뒤에도 계속해서 캐릭터를 성장시킬 수 있는 정복자 레벨 시스템이 등장하며 캐릭터가 성장할 수 있는 구간이 사실상 무제한이 되었습니다. 시즌마다 더 강력한 아이템이 추가되고, 사람들은 그 아이템을 얻기 위해 다시 시간을 쏟아부었습니다. 주인공이 역경을 딛고 강한 악을 물리치는 스토리 경험은 점점 희석되고, 아이템을 수집하는 일이 주 경험이 되었습니다. 게이머 커뮤니티에서는 이같은 행위를 자조적으로 '폐지 줍기' 라고 부릅니다. 반복적인 플레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더 좋은 아이템입니다. 게임이 제공하는 핵심 경험이 언제부턴가 바뀐 것입니다.
일과 게임의 경계
이쯤 되면 왜 사람들이 <디아블로 4>를 하면서 '게임이 아니라 일 같다'고 하는지가 이해가 됩니다. 폐허가 된 세상에서 악마를 무찌르는 것도 벌써 네 번째이고, 경험이 크게 새로운 것도 아닌데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계속해서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재화의 축적을 위해 반복적인 활동을 하는 것... 우리는 이걸 일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시리즈를 거듭하며 점점 온라인으로 간 <디아블로>와는 달리, 온라인으로 출발한 <리니지>와 같은 다중 접속 온라인 역할 수행 게임MMORPG은 처음부터 지금의 디아블로가 가진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소유의 축적이 가능한 역할 수행 게임의 특성상, 게임이 제공하는 경험을 모두 끝낸 사람들이 게임을 지속적으로 플레이하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사람들이 더 많이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라인 게임이 주는 타인과의 연결성은 경쟁심과 소유욕을 끌어올립니다. 소유라는 행위의 특성상, 플레이어가 소유한 것이 플레이어를 다시 게임으로 불러들입니다.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게임 아이템을 현금으로 거래하기 시작하면서 <리니지>와 같은 게임은 실제로 어떤 사람들에겐 직장이 되었습니다. 이쯤 되면 게임을 플레이하는 시간이 재미있는지 아닌지 헷갈릴 것 같습니다.
저는 여기서 '게임을 정의할 수 없다'던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립니다. 게임이 일이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아니면, 일이 게임 같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나요? 그 경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저는 그 경계가, 경험이 어떤 욕망을 충족시켜주는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지옥에서 온 악마들을 물리치고 강해져서 대악마를 물리치는 경험은 어떤 욕망을 충족시켜 줄까요? 온라인 게임에서 비싼 아이템을 얻기 위해 같은 적을 수천 수만번 물리치는 경험은요? 그리고,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은 어떤 욕망을 충족시켜 주나요? 어떤 게임이 언제부턴가 일과 같은 욕망을 충족시켜 준다면, 그 게임은 사실 일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한국의 게임, 한국의 욕망
게임 디자인(설계) 교육으로 유명한 게임 디자이너 마크 르블랑은 '재미'라는 모호한 단어는 게임을 분석하고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재미 중 주요하다고 생각한 8가지를 제시했습니다.
감각 / 판타지 / 서사 / 도전 / 친교 / 발견 / 표현 / 복종
여기서 각 재미의 종류를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재미라는 단어에는 모호한 구석이 있으며, 재미는 여러 가지 쾌락을 뭉뚱그려 부르는 용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들은 무엇으로부터 재미를 느낄까요? 이를 알면 한국에서 어떤 게임이 인기가 있을지를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한국에서 인기있는 게임이 제공하는 재미를 알면, 한국인이 무엇에서 재미를 느끼는지, 곧 한국인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낼 수도 있겠죠.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발행하는 <2022 대한민국 게임백서>를 보면,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모바일게임 중 다중접속 온라인 역할 수행 게임MMORPG의 매출이 타 장르의 게임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국내 게임시장의 중심축이 모바일로 옮겨온 것을 감안하면, 여전히 한국인이 가장 열심을 쏟는 게임은 MMORPG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MMORPG가 모바일 환경으로 옮겨오기 이전에는 PC 온라인게임이 한국 게임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해 왔었죠.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은 온라인게임의 등장 이후 지금까지 유독 온라인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셈입니다.
온라인 게임의 핵심은 타인과의 연결성입니다. 대부분의 역할 수행 게임RPG의 핵심요소는 성장과 수집이죠. 두 가지를 합친 MMORPG에서는 내 소유를 타인의 소유와 비교하여 인식하는 것이 핵심 경험 중 하나가 됩니다.
한국이 온라인게임에 재미를 느낀다는 것은, 한국사람들이 재미를 느끼는 데는 타인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캐릭터 성장과 아이템 수집을 제공하는 역할 수행 게임에 재미를 느낀다는 것은, 노력과 재화를 축적하는 데서 재미를 느낀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가요? 이러한 결론이 지금의 한국 사회와 일치한다고 생각하시나요?
하고 있는 게임을 그만둬야 할 때
컴퓨터와 인터넷의 힘을 입은 현대의 게임은 방대하고 복합적이기 때문에, 게임이 제공하는 재미도 복합적입니다. 각자 재미를 느끼는 지점이 조금씩 다르고, 저마다의 재미를 추구하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액션이 주는 긴장감과 스릴이 재미있는 사람은 액션 게임을, 희귀 아이템 수집이나 '렙업'이 재미있는 사람은 그걸 충족하는 게임을 하면 됩니다.
하지만, 때로는 내가 어떤 재미를 위해 게임을 하고 있는지, 내가 재미를 느끼고 있긴 한건지가 모호할 때도 있습니다. 한 게임이 제공하는 경험이 워낙 다양하고 우리를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여기저기로 이끌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게임이 일처럼 느껴질 때는 잠시 멈춰서 지금 게임 안에서 내가 하고 있는 행위가 무엇인지, 왜 그걸 하고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한국에서의 유별난 MMORPG인기를 보면, 많은 한국 사람이 게임 밖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게임 안에서도 사회 속에서의 성장, 혹은 재화의 축적에서 재미를 많이 느끼는 것 같습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그러한 욕망을 충족하는 데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죠.
하지만, 하고 있는 게임이 일로 느껴지거나, 스트레스를 주거나, 의미가 없다고 느껴진다면, 미련없이 다른 종류의 게임이나 취미로 시선을 옮겨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온라인 상에서의 경쟁이나 수집이 지친다면, 경쟁 요소가 없거나 덜한 혼자 하는 게임이나 소규모로 친구들과 하는 게임을 해보세요. 게임을 좀 쉬셔도 되고요. 결국은 재미있자고 하는 게 게임이니까요. 😊
* 글쓴이 - 지민웅
미국 게임회사에 취업하기 위해 미국에 온 뒤, 게임을 만들며 게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 게임 개발자입니다.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에서 취미로 음악과 서핑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발매된 <레고 2K 드라이브>에 게임플레이 프로그래머로 참여했습니다.
인스타그램 : @jdminoong_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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