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게 제일 좋아_이상하지 않은 나라의 알렉스_알렉스

2024.09.18 | 조회 8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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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작년 봄 퇴사를 한 후 무념무상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벌써 1년 반 째 놀고 있는데, 어쩌면 이렇게 아무 일도 안 하면서 하루도 지루한 날 없이 시간을 잘 보내는지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20년 넘는 세월 동안 여름 휴가도 거의 안 가고 미친 사람처럼 일을 하고 살았기 때문에, 남편은 내가 얼마 놀지 못하고 바로 다시 일을 할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요즘은 내가 어찌나 재밌게 노는지, 내가 노는 걸 보고 있으면 자기도 놀고 싶어진다고 했다. 또 회사를 다니지 않아도 무기력하지 않게 지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했다.

요즘 나의 일상은 무척 단순하다. 해가 뜰 무렵 잠깐 눈을 뜬다. 자발적으로 눈을 뜨는 것은 아닌데, 아주 자연스럽게 잠이 깨는 것이기는 하다. 우리 집은 현관이 남동쪽을 바라보고 있고 네 모서리가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침실은 남동향과 남서향에 큰 창이 있어서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해가 아주 잘 든다. 대충 다섯 시가 넘으면 멀리 동이 터 오면서 어슴프레 밝아지기 시작하고 해가 뜨면 그 볕이 쨍 해서 도저히 눈을 뜨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알람보다 더 정확하고 효과 만점이다. 그리고 아주 기분 좋게 잠이 깬다. 잠이 깨긴 했지만 백수가 그 시간에 일어나는 것은 억울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창 밖으로 바깥 날씨를 한 번 보고 부엌으로 가서 정수기 물을 한잔 마신 후 침대로 돌아와 이불로 얼굴을 꽁꽁 싸매고 다시 잔다. 

그렇게 아홉 시에서 열 시까지 뜨뜻한 볕을 받으며 나른하게 늘어져 있다가, 열 시가 조금 넘으면 더 누워있지 못하고 일어난다. 옷을 챙겨입고 머리를 슥슥 빗고 거실로 나가 커피를 한 잔 뽑아 들고 뉴스를 본다. 보통 양치는 하지만 세수는 하지 않는다. 딱히 만날 사람도 없고 어디 나갈 일도 없기 때문에 치장은 최소로 한다. 열 두 시 쯤 되면 마당으로 나가 거실 창문 앞의 반 평 짜리 화단과 마당의 나무들, 그리고 텃밭과 집 뒤편의 데크 주변에 가득한 잡초밭까지 한 바퀴 쭉 돌아본다. 잡초 정리를 해야 할 곳이 있는지 라던가 벌레가 너무 많이 꼬여서 살충제를 뿌려줘야 할 나무가 있는지 라던가 가지치기를 해야 할 나무가 있는지 등을 눈여겨 본다. 돌아 보면서 쓰레기가 있으면 줍기도 하고 새들이 왔다갔다 하며 지저귀면 화답해서 쪽쪽쪽 하는 소리를 내보기도 한다. 봄에는 우리 집 지붕에 참새가 무척 많이 살았는데 더운 여름을 버티지 못 했는지 요즘은 몇 마리 보이지 않는데, 이런 식으로 우리 집 주변에 변하는 것들을 쭉 점검하는 시간이다.

오후 시간은 거의 멍을 때리며 보낸다. 비라도 내리면 어닝을 펼쳐놓고 그 밑에 앉아 비 구경을 한다. 데크며 마당에 떨어지는 빗방울도 구경하고, 나뭇잎과 나뭇가지에 떨어지는 비, 비를 피해 날아다니는 새와 벌레들 구경도 한다. 하늘을 덮은 구름도 멋지고, 멀리 겹겹이 늘어선 산에서 구름이 피어나는 모습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맑은 날에는 바람이 살살 불며 풀과 나뭇잎들을 찹찹 쳐대는 소리, 나뭇잎들이 산들거리는 모습, 그 사이로 햇볕이 흩뿌려지듯 반짝거리는 것들. 그런 것들을 한참 씩 앉아 구경한다. 도대체 몇 달 째 봐도 지겹지가 않은 풍경이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다가 내키면 동영상도 보고, 손에 잡히는 대로 책도 읽는다. 책상 옆 큰 창 밑에는 오래되어 버리려던 소파를 가져다 뒀는데, 소파에 거의 눕듯이 기대 앉아 책을 읽다가 배 위에 책을 놓고 잠들기도 한다. 잠깐 자다 보면 등이며 어깨며 땀이 축축하게 나며 더워서 잠이 깬다. 소파 위 창문으로 어느 새 뉘엇뉘엇 해가 지면서 볕이 기울어져서 낮잠을 자는 나를 또 깨운 것이다.

그렇게 해질녘이 되면 다시 마당에 나가 풀들에 물도 주고 벌레 먹은 잎들을 따준다. 고수며 바질이며 봄에 손바닥만한 모종을 사다 심은 것들이 이제는 가슴께에 닿을 정도로 자라 정글을 이루었다. 잡초를 뽑기도 한다. 처음 요령이 없었을 때는 대여섯 시간 씩 집중해서 텃밭의 잡초를 몽땅 뽑기도 했는데 그래봤자 이 주 지나면 잡초는 다시 나고 내 몸만 힘들다는 것을 배워서 요즘은 잡초가 나는 속도에 지지 않을 정도만 조금씩 자주 풀을 뽑는다. 나름 시골 생활에 적응 해나가는 중이다.

해질녘이지만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아 무척 덥고 땀으로 목욕을 하게 된다. 얼마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얼굴이며 목에서 땀이 뚝뚝 떨어진다. 벌레에 쏘이지 않기 위해 신은 장화와 손에 낀 고무장갑 안도 땀이 흥건하다. 뭐 대단한 일을 하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땀이 나면 열심히 일한 것 같은 기분도 들고, 나도 이제 제법 농부 같은걸? 하며 멋쩍게 웃게 된다. 멀리 황홀하게 노을이 지고 금새 어두워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오늘치 만큼 개운해진 텃밭이 뿌듯하다.

할당량의 밭 일을 마치고 샤워를 하고 식사 준비를 한다. 그렇다. 아직까지 밥을 먹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서 마신 물 한 잔과 오전에 마신 커피 한 잔이 오늘 먹은 전부다. 그래도 몸을 움직이는 양이 많지 않아서 배가 많이 고프지 않다. 특별한 것 없이 편안하고 신선한 식단으로 식사 준비를 하고 있으면 남편이 퇴근한다. TV에 뉴스를 틀어놓고 마주앉아 식사를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낮에 화단에서 본 사마귀 이야기도 하고, 담장에 앉아 한참을 예쁜 소리로 지저귀다 간 노란 깃털의 새 이야기도 한다. 이전과 비교해 화제가 많이 달라졌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도 음식 그릇을 늘어놓고 식탁에 한참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이어 간다. 남편과 나는 같은 분야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회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듣는 날도 있고, 지난 번 했던 프로젝트는 어떻게 진행 중인지 묻기도 한다. 갈수록 점점 힘들어지는 세상 걱정도 하고 그냥 실없이 농담을 하며 낄낄거리고 웃기도 한다. 그렇게 한참 놀다가 밤이 깊어지면 각자 책상방으로 흩어진다.

그래도 밤에는 상대적으로 생산적인 시간을 보낸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지금처럼 계속 놀 것인지, 뭔가 일을 해 볼 것인지 생각하기도 하고, 이전에 겪었던 일들을 반추하며 반성하거나 개선할 점들을 적어보기도 한다. 나는 건강이 안 좋아져서 반강제로 백수 생활을 시작 해야했기 때문에, 최근에는 몸을 건강한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최우선 순위 관심사다. 흔한 말로 ‘건강을 잃기 전에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라고도 하고 ’건강이 전부다‘라고도 하는데, 진정 그러하다. 내가 꿈이 얼마나 크고 내가 하고픈 일이 얼마나 많고 내가 가진 것이 얼마나 많은 것과 무관하게, 건강을 잃으면 사람은 무력해진다. 

몸이 아프고 수술을 한 직후에는 불안감과 좌절감이 꽤 컸다. 40대 후반, 그동안 쌓아온 사회적 자산과 커리어가 이제 꽃 피울 시기인데, 내 주변 사람들은 다들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오르는데, 나는 그것을 구경만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이런 내 상황을 모르고 자꾸 찾아드는 멋진 제안들을 내가 스스로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 더 어려웠다.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 동안 쓸쓸한 마음을 안고 앉아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그러다 문득 우리 삶은 쾌속 질주하는 바이크가 아니라 그네가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나는 무한 속도 경쟁을 하고 질주 하는 데만 집중 했고 그것이 성공하는 길이라 생각 했는데, 나이가 들고 내 상황이 바뀌면 성공하는 방식, 살아가는 방식도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를 포함한 요즘 사람들은 속도 경쟁에 지치고, 한 순간만 실수해도 이후의 삶이 불행해질까 과하게 경계하느라 힘들고, 타고난 연료통이 작다고 불평하고, 연료통에 연료가 떨어지면 운행을 멈출까봐 연료를 채우는 일에 급급하다. 하지만 우리 삶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좀 느려져도 발구를 힘만 있으면 다시 속도를 낼 수 있고(그래서 건강이 중요하고), 쉬이 궤도를 이탈하지 않으며(내가 만들어온 궤적이 궤도를 만들고 주변 사람들과의 건강한 관계가 구심력이 된다), 올라가면 내려오고 내려가면 또 올라간다(항상 다음의 기회가 있다). 그러니 매 순간의 움직임을 조정하려 애쓸 필요 없이 궤도를 이해하고 대응하면 되고, 두려움없이 눈 앞에 펼쳐진 하늘과 귓가를 스치는 바람을 즐겨도 되고, 자빠지거나 사고 날까 겁내지 않고 발을 양껏 굴러도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꽤나 편해졌다. 내가 쳇바퀴를 돌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성장하지 못하고 머물러있는 것이 아니고, 오늘 하루를 살아 내고 있는 것이고, 오늘을 채우고 있는 것이고, 오늘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는 일 없이 보내는 매일이 텅 빈 시간이라고 생각 했는데, 오히려 비움으로써 새로운 에너지가 채워질 공간이 마련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을 깨닫고 나니 요즘은 매일이 감사하고 즐겁다. 이 기분을,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 이상하지 않은 나라의 알렉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는 토끼굴에 쏙 빠지면서 이상한 나라로 떠나 신기한 모험을 하게 된다. 알렉스는 최근 여유 시간이 많다 보니,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띄고,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감각을 느끼게 되면서 문득, 엘리스의 이상한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이상하지 않은 나라 속에 교묘하게 섞여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상하지는 않지만 일상적이지 않은 순간들,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있는 특별한 순간들을 글로 남겨보기로 했다.

 

* 글쓴이 - 알렉스

외국계 기업을 다니며 회사에서 쓰던 영어 이름이다. 2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했고, 최근 건강 문제로 일을 그만두고 시골에서 백수이자 동네 아줌마로 제2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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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치기땅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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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out 1 month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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