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은 말도 못 하게 더운 날들이 이어져서 집으로 돌아와서도 계속해서 바다를 떠올렸다. 아침마다 식탁 위에 올려놓은 소라 껍데기에 귀를 대어 보고 황홀감에 젖어 마음에 바다를 품고 하루를 시작했다. 얼마 전에 다녀온 서해 바다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거다. 튜브에 바람도 빼지 않고 수영복도 정리하지 않고 바다의 느긋함에 취해 지내고 있었다. 언제 또 바다를 갈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기대를 하면서...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는 서해가 아닌 동해를 다녀오게 되었다. 미리 계획된 일이긴 하나, 1박 2일의 일정이라 해도 남편의 부모님과 조카 식구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라, 괜스레 긴장이 되었다. 특히나 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생활 리듬도 다르고, 관심사도 다르고, 여행 스타일도 다르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숟가락도 들기 전에 식사를 빨리 마친 아버님의 모습도 떠오르고, 식구들이 커피를 들기도 전에 다 마시고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나간 모습도 떠올랐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바쁘고, 가만히 여유를 즐기는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어서 함께 여행을 간다는 것이, 명절을 지내는 일만큼 큰일로 다가왔다.
어머니가 여행 10일 전부터 장을 보려고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온 날 이후부터 우리는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평소에 우린 채식 위주로 먹지만 어르신들은 아마 숯불로 구워 먹을 고기를 엄청나게 준비해 오실 거라는 점도 미리 알고 갔다. 남편도 나도 아이들도 딱히 대식가가 아니라서 배가 터질 것을 예상하며 이건 ”효도여행이다!“라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특별한 걸 준비하기보다는 우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영덕의 바다는 강하게 넘실대며 그 푸른색의 두께감이 힘 있게 느껴졌다. 세차게 하얀 파도를 일으키며 더위를 물리치고 있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푸는데 역시나 시어머니는 냉장고 하나를 다 채워 넣을 만큼의 고기, 과일, 음식을 준비해 왔다. 형님과 시장도 5번이나 다녀왔단다. 우리가 보기엔 고작 하루를 함께 하는데, 열흘 동안 먹을 만큼의 양이었다. 오자마자 다음 날 아침에 먹을 오리탕 끓이는 준비를 돕는데,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세상에나, 남편인 둘째 아들은 오리탕도, 고기도 그닥 좋아하지 않는데...
아이들과 다 같이 해변으로 나섰다. 튜브 놀이하기 딱 좋은 파도가 철썩 거리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숙소의 꽉 찬 냉장고도 그만 잊게 만들었다. 조카가 아이들과 함께 먼저 바다로 들어가고, 남편도 웃통을 벗고 바다로 들어갔다. 형님도 선크림을 바르고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바다로 들어갔다. 시아버지도 어린 소년 같은 눈빛으로 잠시 머뭇거리다 뒤따라 바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릴 때 노상 물놀이하고 컸다는 추억담을 한참 꺼내놓다가, 시어머니도 끝내 바다로 들어갔다.
나는 그늘 평상에 홀로 남아서 남편의 가족들이 바닷물 속에서 즐기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행복하다고 느꼈다. 아니, 어떻게 정말로 행복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남편의 가족들과 나도 행복할 수 있는 귀중한 순간을 이제서야 맛본 것이다. 섬에서 살던 시아버지가 바다 헤엄을 치는 모습을 보자 가슴이 뭉클해졌다. 냇가에서 손빨래하며 물장구치던 시어머니가 파도에 몸을 맡기고 있는 모습도 어찌나 평화로워 보였는지 모른다.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이 모두 하나같이 바다 품에 안겨서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은 정말이지 꿈같은 장면이었다.
”이건 효도 여행이 아니야.“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숯불 구이를 굽는 시간에 나도 고기 몇 점을 씹어 삼켰다. 속이 더부룩해졌지만 뭐랄까, 나도 이 순간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다 먹지도 못할 양의 오리탕 냄새가 진동했던 주방에서도 남편은 못 견뎌했지만, 나는 참을 수 있었다. 자식들과 하루를 열흘처럼 진하게 보내고 싶은 부모님 마음이 마구마구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이 들어도 자식을 향한 부모 마음은 여전하다는 걸 알게 된 시간이었다. 우리와는 조금 다른 언어로, 서로 다른 삶의 방식으로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 나이는 잊고 수고스럽게 몸을 쓰고, 자식들을 향한 사랑이 우리 시대 문화에 맞다 안 맞다를 말할 수 없었다.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평소에 안 먹는 육고기들을 먹고 밤새 소화해 내느라 우리는 미련스럽게 잠을 설쳤다. 새벽 6시부터 거실에선 텔레비전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남편과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바다로 산책을 나왔다. 맨발로 해변을 걸었다. ”어싱(earthing)이 따로 없네, 아이들 없이 이렇게 아침 바다를 걷는 날이 오다니...“ 하며 이런 시간이 언제 또 찾아올까 싶었다. '차르르 차르르' 하고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파도가 쓸어내리는 조약돌들 중에 눈에 띄게 작고 예쁜 분홍색 돌과 보라색 조개껍질을 주웠다.
결국 산책 나왔던 우리는 오리탕은 먹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지금도 여전히 소화가 잘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바다는 어쩜 그렇게 푸르렀을까, 이른 아침에 주인과 해변을 산책 나온 개가 찍어 놓은 발자국을 보는 것도 좋았다. 발등에 모래를 규칙적으로 씻어주는 파도의 어루만짐이 좋았다. 새롭고 환한 하루를 열어주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뭍으로 해를 밀어주고 있는 강인한 바다는 어딘지 모르게 시아버지의 마음과 닮아 있었다. 찬란하게 일렁이는 바다 위에 어제의 귀여운 얼굴들을 떠올려 보았다. 우린 여전히 반짝이는 바다의 품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어서, 팔십의 나이에도, 작고 사랑스러운 바다 아이들이 될 수 있었다. 내년 여름에도, 이 꿈같은 모습을 또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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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윤경
생태적인 삶과 자연농 농부로 사는 게 꿈입니다.
마음을 어루만지며, 보다 나다운 삶을 살려고 합니다.
여덟 살 여자아이, 여섯 살 남자아이, 남편과 시골에서 살림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yoonir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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