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진단을 받고 수술까지는 일사천리였다. 수술을 맡아준 외과 의사 선생님은 조용하지만 단호한 느낌을 주는 분이었는데 떠들썩하게 말수가 많은 사람보다 훨씬 믿음이 갔다. 수술하는 내내 수술에만 집중할 것 같은 분이었다. 폐가 숨을 쉬지 않는 전신마취 수술은 여러 가지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검사도 많고 수술하다가 있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 대한 동의서도 여러 장 작성해야 했다. 동의서에 내 이름 석 자를 쓸 때는 형식적이라고는 하지만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부담이 되었다.
천만다행으로 수술은 잘 되었다. 수술 후 눈을 뜨니 말 할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복강경 수술이었는데 배에 여러 군데 구멍을 내어 속을 헤집었으니 아플 만도 했을 것이다. 깨어나고 한 시간 정도 지나니 찌를 듯한 통증은 사라지고 목이 말랐다. 통증이 심하면 진통제 주사를 누르라고 했지만, 첫 통증이 사라진 이후에는 그다지 큰 통증은 없었다. 나는 가능한 한 빨리 일어나고 싶어서 병원에서 시키는대로 운동하고 일정한 시간 잠을 잤다. 수술 이후에는 염증이 생기는 것이 가장 무서운 일인데 별다른 이상 없이 수술 5일 후 퇴원 날짜를 받았고, 퇴원 3주 후에 종양 내과를 방문해서 항암치료 상담을 받기로 했다.
집에 왔더니 서달산 자락 벚나무들은 이미 연한 초록 잎들을 꽃처럼 피워내고 있었다. 주차장을 거쳐 집으로 올라오면서 내년에는 꼭 지천에 흐드러질 벚꽃을 보러 가리라 다짐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는 한 번도 암으로 내 삶이 끝나리라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일부러 그렇게 다짐했다기보다 자연스럽게 다음 해의 벚꽃 구경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낭만적인 구석이 있는 사람이다.
암에 걸린 적은 처음이라 모든 것에 서툴렀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병원 지침은 하느님 말씀처럼 따르려고 노력했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식사 문제였는데 대장을 30cm 정도 잘라냈기 때문에 장에 잔류하는 음식을 최소화하는 저잔사식이라는 식사를 해야 했다. 식이 섬유가 적은 식사를 해야 했는데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흰죽, 두부, 흰살생선 살 등이었다. 느끼하다고 불평할 처지가 아니어서 그저 먹고 살아내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때 심정으로는 두부만 한 달 세 끼 먹고도 낫기만 한다면 아무 불평 없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족 중에 나의 병을 아는 사람은 딸과 남편뿐이었다. 걱정이 많고 심장이 안 좋은 엄마에게 도저히 알릴 수가 없어서 친정의 모든 가족에게 알리지 않기로 했다. 가족 중 누군가 알게 되면 엄마 귀에도 들어갈 것 같았다. 가족들은 울산에 살고 나만 서울에 살기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당장에 전화해서 나 아프다고 징징거리고 싶은 적이 천 번도 넘었다. 생리통만 있어도 온 식구를 깨우고 아프다고 울고불고 했던 내가 암 투병을 하면서 엄마의 위로를 받지 못한다니 기가 찼고 서러웠지만 알릴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하던데 이런 일도 타이밍을 놓치고 나니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대장암 수술 이후 불편한 점 중의 하나는 무엇이든 먹자마자 화장실에 가야 하는 것이었다. 치료 후 꽤 시간이 지나도 화장실 문제 때문에 외출이 꺼려질 정도였다. 장을 100cm씩 잘라낸 사람들은 몇 년이 지나도 긴 여행 가는 것이 두려울 지경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암에 한 번 걸리면 그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무엇인가 한쪽 발목을 잡고 있는 두려움이 생긴다. 사람들을 만나도 나 때문에 음식을 가려야 하는 것이 부담되기도 했고 별것 아닌 한 마디에도 마음이 상하기도 했다. 다들 거뜬하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차마 말할 수 없는 속사정이 있다. 나도 이제 그 무리에 들게 된 것이다.
수술을 한 후 2주 정도가 지나고 나니 상처가 약간 당기는 것 외에는 누구도 내가 암 수술을 했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얼굴빛이 맑았다. 미즈 암 환자 선발대회에 나가도 되겠다고 농담할 정도였다. 하얗고 깨끗한 음식들만 먹으니, 피부가 깨끗해졌다. 수술 자리가 회복되면서 매일 집 뒤에 있는 서달산에 올랐는데 오월의 초록빛이 가득한 숲에서 나는 아픈지 어떤지도 모르고 봄의 아름다움에 담뿍 빠져들었다. 당시 나의 고민은 이렇게 아픈 데 없이 개운한데 항암치료를 해야 하나 하는 것이었다. 정상 세포까지 죽인다는 항암치료를 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항암으로 머리가 빠지면 어떤 스타일의 가발을 쓸까도 고민했는데 그냥 깔끔하게 밀어버릴까도 잠시 생각을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대장암 항암은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는다고 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말 그대로 기뻤다.
우리 사회는 아픈 사람들에게 굉장히 냉정하다. 효율성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아픈 사람들은 무대 뒤편으로 밀려난다. 그래서인지 위로 하는 방식이 아주 서툴다.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인들이 따뜻한 위로 문자와 격려를 보내 주었는데 가끔은 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내용도 상당히 많았다. 이를테면 항암치료가 엄청나게 아프다는데 어떻게 해요? 라든가 대장암 3기 생존율이 50%밖에 되지 않는데 잘 이겨내라던 지의 문자였는데 이럴 때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기분이 되곤 했다. 물론 다 걱정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지만 ‘저는 꼭 사는 쪽 50%에 들겠어요.’라고, 답할 만큼 쿨하지는 못했다. 내 마음을 가장 편하게 해줬던 위로의 문자는 무조건 나을 거라고, 암에 걸렸던 어떤 사람도 지금은 건강하게 일상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문자를 읽고 나도 반드시 건강을 회복하고 싶었다.
수술 후 살살 걸어 다닐 만 하자 항암 상담을 가야 했다. 이날이 수술보다 더 떨렸던 거 같다. 수도관에 악어가 산다는 도시 괴담보다 훨씬 무서운 항암에 관한 별별 끔찍한 얘기들이 들려왔는데 급기야 수술로 다 나은 환자가 항암을 하다가 죽었다는 ‘정보’까지 날아들었다. 항암 상담은 종양내과에서 진행했다. 주치의는 상당히 진지한 사람이었는데 나의 상태를 아주 심각하게 여기고 있었다. 3기 중에서도 림프절에 꽤 많이 전이된 상태이니 다시 한번 자세한 CT를 찍어보고 주사 용기를 몸에 심어서 긴 시간 동안 주사를 맞는 ‘케모포트’를 심을 것인지 일반적으로 두 시간짜리 주사를 맞고 약을 먹는 방식을 취할 것인지를 결정하자고 했다. 케모포트 방식을 한다면 어깨 아랫부분을 열고 그 안에 포트를 그야말로 심어야 했는데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고 제거할 때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들었다.
케모포트라니? 그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지 나는 기가 죽었다. 하지만 병세가 심각하다면 그거라도 심어서 암세포를 없애는 게 급선무였기에 금세 담담하게 치료받기로 마음을 고쳐먹고 검사 후 결과를 기다렸다. 다행히 케모포트는 심지 않기로 했다. 주치의가 계획한 항암 방식은 두 시간짜리 옥살리플라틴이라는 주사를 맞고 두 주 동안 젤로다라고 하는 알약을 먹고 한 주를 쉬는 것을 한 세트로 하는 치료였다. 총 여덟 세트, 육 개월 동안 치료를 하기로 하고 항암치료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는 병원 애니메이션 시청을 지시받았다. 병원 한쪽에 준비된 시청각실에 앉아 애니메이션을 보았는데 귀여운 얼굴로 주사를 맞고, 약을 먹고 치료하는 주인공들을 보며 실제로도 저렇게 아무렇지 않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또 하고 또 했다. 동시에, 그런데 왜 내가 이런 것을 보고 있나 하는 원망이 사라지지 않았다.
3부에 계속 됩니다.
*수술 후에 회복을 빨리 하는 방법:
1. 병원 지시 사항을 반드시 지킨다.
2. 불안한 마음을 잘 다스리고 정해진 시간에 자고 일어난다. 암 치료는 불안과의 싸움이다.
3. 인터넷에 있는 정보를 지나치게 신뢰하지 않는다. 궁금한 점은 반드시 의사 선생님과 상의하고 주치의 말을 믿는다. 인터넷의 생존율등은 제각각 다르며 믿을 수 없는 정보도 수없이 많다.
글쓴이: 구경희
미술대학입시 전문 컨설턴트이다. 인생 이야기를 즐겨 읽다가 글쓰기의 바다에 빠져들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아이를 키우며 자신까지 해방된 운 좋은 사람이기도 하다.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고 한때 바위타기를 꿈꾸었다. 요가, 글쓰기, 그림 그리기를 인생의 동반자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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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명 소개: 슬기로운 항암생활
암에 걸렸다. 대장암 3기였다. 명랑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눈물 흘린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완치까지 1년 반이 남았다. 요가도 하고 수영도 하고 해외여행도 하고 출근도 한다. 아직, 절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희망을 얘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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