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옛 직장 상사를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얼마 전 가족들과 석모도로 놀러갔다가 해변에서 옛 직장 전무님을 만났다. 사실 내 쪽에서만 전무님을 본 것이기에 만났다기보단 ‘봤다’고 하는 게 맞겠다.
나는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 쓰고 햇빛 차단용 마스크와 팔토시를 착용한 채 아홉 살인 아이와 바닷가에서 노닐고 있었다. 그런데 전무님이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아저씨 둘과 함께 내쪽으로 걸어오는 거였다. 눈을 감았다 다시 떠봤지만 전무님이 분명했다.
어찌된 일인지 전무님은 십삼 년 전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내가 전무님과 같이 회사를 다녔던 그 당시 모습 그대로를 가위로 오려내 지금 여기에 붙인 것 같았다. 귓가에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에 있는 한 남자아이가 파란 잠자리채를 모래바닥에 내려놓고 그물 가운데에 새우깡을 올려놓은 뒤 갈매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무님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전무님의 지인이 갈매기에게 주려고 새우깡 쥔 손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자 전무님이 말했다. “그거 안 돼~ 여기 잠자리채가 있어서 안 돼~” 갈매기들이 남자아이가 새우깡을 올려놓은 잠자리채로 갈 것이니 소용없다는 뜻이었다. 전무님이 환하게 웃는데 그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였다.
전무님에게 인사를 할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십삼 년 만에 생뚱맞은 곳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를 나누기엔 뭔가 어색했고 굳이 지인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끼어드는 게 괜찮은 생각 같지도 않았다. 또 인사를 하게 되면 같이 있는 내 아이도 소개하고 그동안 결혼했다는 얘기와 어떻게 지냈는지를 설명해야 될 것 같아서 귀찮기도 했다. 어차피 나는 꽁꽁 싸매져 있기 때문에 전무님은 나를 알아볼 수 없었다.
회사를 다닐 때 전무님은 잘 웃지 않았다. 직원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전무님이 거래처와 문제가 생겼을 때 제대로 된 상사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전무님은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주로 사무실에 있는 자기 방 안에 머물렀다. 전무님은 자주 방귀를 뀌었다. 전무님과 비교적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전무님 방귀 소리가 들릴 때면 옆자리 직원과 눈빛을 교환하며 ‘윽’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느 날 전무님이 회사 지하에 있는 카페로 나와 내 옆자리 직원을 데리고 갔다.
“어떤 상사가 좋은 상사일까요? 똑똑하고 부지런한 사람, 똑똑하고 게으른 사람 중에.”
나와 옆자리 직원이 웃기만 하고 아무 말 않자 전무님이 말했다.
“나는 똑똑하고 게으른 사람이 좋은 상사라고 생각해요. 줄여서 ‘똑게’라고 하죠.”
그 이후로 나는 ‘똑게’ 이야기가 나올 때면 전무님 생각이 났다.
내가 입사한 지 육 개월이 지났을 때 전무님은 자기 방으로 나를 불렀다.
“진 주임이 지금 하고 있는 영업관리 일은 육 개월이면 마스터가 될 거예요.”
나는 본래 하고 있던 영업관리 업무 외에 다른 부서 일을 조금씩 맡아서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보직 변경을 해줄 수 있으니 일이 지겨워지더라도 그만두지 말라고 했다. 그는 내가 성장 욕구가 큰 사람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또 내가 회사의 골칫덩이인 오래된 재고를 팔았을 때 그는 자기 방문을 박차고 나와 소리쳤다.
“이거 진 주임이 팔았어요?”
재고를 파는 것은 내 업무가 아니었지만 우연히 팔 수 있는 기회가 와서 판 것이었다. 영업사원들은 본인들 업무인데도 내가 그 재고를 팔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전무님은 나를 인정해주고 칭찬했다.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인연 중에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그 사람이 참 좋은 사람이었어서 기억하게 되기도 하지만, 그 사람이 나를 알아봐주고 이해해주었기에 기억하게 되기도 한다. 누군가가 나를 인정해주고 나의 진가나 가치를 알아봐 준 경험은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다.
전무님은 회사와 한 중요 거래처와의 계약이 파기되었을 때 회사를 그만두었다. 사장실에 들어갔다가 굳은 얼굴로 나오는 날이 많아졌고 직원들은 전무님에게 책임이 있다고, 전무님이 거래처 관리를 소홀히 했다고 수군거렸다.
바닷가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으려고 하는데 소금을 안 가져왔다는 걸 깨달았다. 소금과 콜라를 사러 근처 편의점에 갔다. 그런데 전무님이 편의점 앞에 있는 나무 테이블에서 지인과 함께 안주 없이 캔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래, 옛날에도 전무님은 맥주를 좋아했었지. 이렇게 내게는 과거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던 전무님을 자꾸 마주치니 이번 여행이 약간 기이하게 느껴졌다.
나는 소금과 콜라를 손에 들고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있는 전무님을 지나쳐서 바닷가를 향해 걸었다. 캬, 친구와 함께 바닷가 산책 후 맥주 한 잔이라. 전무님이 너무 즐거워보여서 나까지 기분이 밝아졌다. 전무님에 대한 나의 최종 기억은 이제 사무실이 아니라 해변이 될 것이다. 스트레스에 짓눌린 어두운 표정이 아니라 맥주 한 잔에 이를 드러내며 웃는 그 표정으로. 전무님한테 말하고 싶은 게 있다. 나는 전무님 싫지 않았다고. 전무님이 아무리 방귀를 뀌었어도 나를 인정해준 전무님한테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글쓴이 - 진솔
어린이들과 책 읽고 이야기 나누는 독서교실 선생님입니다. 초등 아이 키우는 엄마이기도 합니다.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에 '오늘도 새록새록'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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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진
너무 공감이 가서 눈물이 나왔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상사가 있습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세상의 모든 문화
나를 인정해준 상사는 잘 잊혀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가끔 스쳐지나간 인연 중에 그 사람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고 떠오를 때가 있죠.. 재진님 댓글 덕분에 힘을 얻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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