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는 아이들

산을 오르는 아이들_거인의 선물_윤경

10 청송 주왕산국립공원 주봉 코스

2024.10.02 | 조회 7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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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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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깊어가는 가을을 따라 산을 찾았다. 내 생일날 가족 넷이서 함께 등산을 한 건 정말 잘 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산양이 나온다는 바위가 많은 주왕산을 찾았다. 거대한 암석의 자태는 실로 대단했다. 숲 사이로 불뚝 솟아 있는 기암은 마치 고대시대에 여행길을 가다 멈춰 서게 된 선한 거인들의 형상 같았다. 여태껏 설악산의 위대함만 알았지, 주왕산이 이렇게 멋진 바위산인지는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주왕산을 가기 위해 도착한 청송이라는 곳은 사과로 유명한 지방이라 가는 길 마다 사과밭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들은 이동하는 내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사과를 보며 기쁨의 환호를 보냈다.

 

마을 곳곳마다 사과 모양을 따온 데커레이션을 보는 것도 뭔가 색달랐다. 마을 홍보 일환으로 만들어진 거라 해도 사과 모양의 빨간 테두리로 된 버스 정류장은 정말 귀여웠다. 그 속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모습은 평소에 보지 못하는 유니크한 장면이었다. 관광지 주변 야외 식수대 위에 올려져 있는 원형 형상물도 다름 아닌 사과였다. 돌로 된 대형 사과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차를 멈추게 만드는 과수원 할머니의 정겨운 미소는 또 어찌 피하랴. 마을 사람들이 합심해서 청송의 보물인 사과를 알리고 있었다. 사과 한 상자는 꼭 사서 돌아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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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주왕산을 오르는 게 쉽지는 않았다. 산에 떡하니 붙어 있는 웅장한 바위 크기에 압도당해 잠시 주춤거리기도 했다. 바람에 쓸리고 오래된 시간을 견뎌 온 온화한 표정의 바위였다. 위협적이기보다 예쁜 곡선을 가진 생명체 같았다. 기암이 이렇게 이뻐도 되나 싶었다. 대전사에서 울리는 목탁소리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지나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우리는 사람들이 많이 가는 유명한 왼쪽 용추폭포 길 대신, 오른쪽 주봉을 택했다. 산을 오르고 싶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숲 안으로 들어서자 젖은 나무들은 가을 아침 햇살을 쬐고 있었다. 도토리를 찾는 다람쥐들이 겨울 준비로 바삐 돌아다니는 걸 보았다. 나무 사이사이로 거대한 바위 얼굴이 희끗희끗하게 보였다가 이내 사라졌다.

 

 

생각보다 가팔랐던 길은 오르는 내내 땀이 나고 숨이 찼다. 내가 가겠다고 했지만, 생일에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어 후회가 밀려왔다. 평소와 달리 극심한 오름이 주된 길이었다. 짧은 코스일 거라 예상했는데 2시간 넘게 꼬박 오르기만 하는 코스였다. 아이들이 씩씩하게 앞장서서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자꾸만 어린광 피우고 싶은 마음이 올라와 이내 뒤쳐지고 말았다. 괜히 엄마 생각이 나기도 하고 내가 엄마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생일 선물을 못받은 아이처럼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암만 함께 있어도 나 자신과의 겨루기를 멈추면 홀로 주저앉게 된다. 엄마이기 이전에 나 자신을 돌보는 일을 결코 멈추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큰 바위가 어째서 땅으로 굴러떨어지지 않고 있는 걸까? 흙 속에 꼭 박혀서 숲 사이에서 오래오래 살고 있다는 것이 이토록 감동을 주는 일인지 여태껏 잘 모르고 살았다. 저들처럼 세상에 딱 붙어서 더 잘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주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세상이 얼마나 날 반겨주고 있는지, 내가 그 사랑에 못 미칠 때가 참 많았구나 싶었다. 마음이 단풍처럼 울긋불긋 물들어 버렸다. 받고 싶은 마음보다 주고 싶은 마음이 조금 더 커지려 했다. 착한 척 같은 건 결코 하고 싶지 않지만, 자연은 사람의 마음을 선하게 이끈다. 

 

저만치 앞서 걷던 가족들이 이런 날 아는지 모르는지 생글대며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산길에서 누가 누굴 의지하고 있고, 끌어주고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인지, 나이와 역할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생일에 산을 오르며 아무래도 나는 사랑받고 싶기만 하는 내 안의 내면 아이를 만난 것 같다. 힘들어서 그런 건지, 내 안에서 깊은 교감이 일어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울먹이는 눈이 되어버렸다. 시야가 흐려졌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어느새 각자 홀로 그러나 같이 이 인생의 길을 담담하게 걸어가는 길동무가 되어 있었다. 

 

마침내 주봉까지 올라 우리는 잠시 쉬다가 이내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왔다. 다섯 살 순우가 쏜살같이 내려갔다. 아이를 뒤따라 후다닥 속도를 내어 보았다. 순식간에 미끄럼틀을 타고 현실로 내려온 기분이 다 들었다. 산에서 어린아이들을 만난 게 신기했는지 보는 사람마다 격려의 인사를 아낌없이 건넸다. 여덟 살 단우는 여행을 오면 늘 집에 가기를 아쉬워한다. 산이 좋아서 여기서 더 오래 있고 싶고, 집에 있으면 집에 있는 게 좋아서 계속 있고 싶고, 학교에 다녀오면 학교가 재밌어서 매일 가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이 마주한 모든 순간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는 건 이런 것일까. 그렇게 붙잡아 둘 수 없는 행복한 시간을 계속 늘리고 싶은 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남편과 나는 힘든 것도 그새 잊고 이번 산행이 정말 좋았다고 입을 모았다. 그래, 우리는 어느새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위안을 주는 서로의 존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내려와서는 잊지 않고 사과 한 상자를 샀다. 밭에 같이 자라난 늙은 호박도 덤으로 받았다. 사과 향기가 차 안에 가득 번졌다. 주왕산의 왕관 같은 기암들이 점점 작아지는 걸 보면서 꼬불꼬불한 길을 내려왔다. 

산양이 지나가니 조심하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멸종 위기종이 되어버린 산양을 직접 만나진 못했지만, 그 표지판을 본 것만으로도 어쩐지 가슴이 부풀었다. 어딘가 저 멀리 바위 위로 산양이 뛰어오를 것만 같았다. 이 산속에서 산양 가족이 대를 이어가며 영원히 잘 살아갔으면 하고 마음으로 빌었다. 사랑받고 싶어 하던 내 안의 내면 아이도 이 순간만큼은 분명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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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윤경

생태적인 삶과 자연농 농부로 사는 게 꿈입니다.

마음을 어루만지며, 보다 나다운 삶을 살려고 합니다.

여덟  여자아이, 여섯  남자아이, 남편과 시골에서 살림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yoonirise

yoon.vertclair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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