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가슴

나는 지금 누구의 말을 하는 걸까_보이지 않는 가슴_수영

-밀란 쿤데라의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도록」을 읽고

2024.08.05 | 조회 8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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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도록」, 『우스운 사랑들』, 민음사, 2013
밀란 쿤데라,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도록」, 『우스운 사랑들』, 민음사, 2013

▌ 더 이상 아무 것도 만회할 수 없게 된 시점

못 본 지 15년이 된 연인이 중년이 되어 길에서 마주쳤다. 체코 보헤미아 작은 도시였다. 서른다섯이 된 남자는 대머리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쉰이 훨씬 넘은 여자는 얼굴과 목에 주름이 깊었다. 프라하에 살던 여자는 남편이 묻힌 이곳의 묘지 사무소를 방문하고 오는 길이었다. 10년간 임대한 남편의 묘지를 갱신하는 것을 잊고 기한이 넘어 버렸다는 것을 며칠 전에 확인하고는 늦게라도 사태를 바로잡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지만 남편의 묘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임대 기한이 만료되면 오래된 묘를 자동적으로 없애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여자는 슬픔도 슬픔이지만 아들에게 아버지의 묘가 사라진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자신의 부주의함을 뭐라 변명할 것인지 생각하면서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남자는 그즈음, 막 생겨나고 있는 자신의 대머리를 손거울로 들여다보면서 놓친 것은 다시 잡을 수 없다는 진부한 진리를 떠올리게 되었다. 자기 외양 중 가장 괜찮은 하나가 생명을 마치게 되었는데 살아온 시간의 길이에 비해 살아낸 삶의 농도(직업이나 돈보다도 ‘여자’)가 변변치 않다는 생각에 이르자 자신의 삶은 이제 (자기 자신의 실수 때문에) 승산 없는 경기가 되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계속 달릴 마음이 나지 않을 정도로. 하필 이런 시점에 예전에 미치도록 사랑했으며 자신의 실수로 놓쳐버렸던 여인을 만나게 되다니 참 묘한 운명의 나쁜 장난이라고도 했다.

▌ 기한이 만료된 묘지에서 되찾을 수 없는 것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가 출발하는 시간까지 여자는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남자는 근처 자신의 원룸으로 그녀를 초대했다. 대머리 증세가 나타나서 걱정이 된다는 이야기 대신 ‘시간은 사람이 따라가기 힘들게 너무 빨리 흐른다’ 같은 비관을 늘어놓다가 어느새 여자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게 되었고 여자를 소파에 앉힌 뒤 몸을 끌어안게 되었다. 손댈 수 없는 천사 같았던 옛날의 여자와 거의 할머니가 다 된 현재의 여자는 너무나 달랐지만 남자는 코냑을 마셔가며 두 이미지의 분리를 억지로라도 다시 합쳐보고 싶었다. 15년 전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던 딱 하루, 너무 서투르고 캄캄해서 기억조차 할 수 없게 된 그날 그녀의 몸을 밝은 곳에서 생생하게 상상해내고 싶다는 욕망을 어쩔 수가 없었다.

“저를 뿌리치지 마세요.”

“안 돼요. 정말로. 제발 이러면 안 돼요.”

늙어버린 여자의 몸을 탐하는 이 시도가 결국은 혐오감으로 끝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새로 밝혀낸 비밀을 즉시 더럽히고 싶다는 욕망이 그를 자극했다. 그 사이 여자는 혼자 묻는다. 이 손길은 누구를 향한 것일까? 남자가 꺼낸 이야기의 대상이 되는 그녀인가 아니면 지금 이야기를 듣고 있는 자신인가. 그러나 잃어버린 줄 알았던 관능을 되찾게 만드는 이 남자 앞에서 입천장에 붙은 본인의 틀니를 확연히 의식하게 되는 순간, 여자는 그 모든 생각과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금 여기의 무엇보다 남자의 기억 속에서 자신의 젊음이 훼손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 기억 속에서 내게 기념비를 세워 주었어요. 우리는 그것이 무너지게 할 수는 없어요. 나를 이해해 주세요.”

남자는 그럴 수 없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가지지 못했던 모든 것, 그를 비껴갔던 모든 것, 그가 놓쳐버렸던 모든 것, 그것이 없어서 지금 그의 나이와 빠지기 시작한 머리카락이 견디기 힘들어지는 그 모든 것, 그리고 딱할 만큼 공허한 이 모든 것의 총합을 구현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거부되었던 (그리고 그 영롱한 빛깔들이 그의 삶을 그토록 서글프게 무채색으로 만들었던) 그 모든 기쁨들에게 이제 의미를 박탈할 수 있고, 그 기쁨들이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이며 그저 겉모습일 뿐 스러져 가는 것이고 먼지들의 행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고, 그 기쁨들에게 복수를 하고 모욕을 주고 다 없애 버릴 수 있을 것이었다.

“거부하지 마세요. 이렇게 뿌리치는 건 말이 안 돼요.”

정신이 나갔었지, 여자는 얼굴을 붉혔고 자기 속의 아주 깊은 어딘가로 피할 곳을 찾았다. ‘사람은 소멸해 가는 몸 이상의 것이며 중요한 것은 사람이 이루어낸 업적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아들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고 그의 삶의 흔적에서 조용히 지워지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다.’ 조금 전까지 늙음을 비관하던 남자를 보며 여자가 항의하듯 펼친 이야기의 논지였다. 아들이 그려준 길, 지금까지 따라온 길이기도 했다. 짧은 순간이기는 해도 멀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이제는 순순히 다시 자기 길에 들어서야 했고 그것만이 자신에게 맞는 유일한 길임을 인정해야 했다.

밀란 쿤데라,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도록」, 『우스운 사랑들』, 민음사, 2013
밀란 쿤데라,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도록」, 『우스운 사랑들』, 민음사, 2013

▌ 보이는 나와 보는 나의 기로에서

여자는 사실 남자가 몸을 끌어안았을 때부터 자신을 비난하는 아들의 모습을 머릿속 한구석에서 보기 시작했었다. 조금 전에는 잊고 있었던 현재의 자기 모습을 의식하게 될수록 오늘 묘지 사무실에서 느꼈던 불안이 자꾸만 올라왔고 아들의 얼굴이 그녀를 응시하며 수치심과 모멸감을 점점 더 크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짧은 순간을 끝도 없이 늘인 듯한 괴로운 응시였다. 이윽고 사라진 묘에 대해 자기를 질책하는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녀는 미친 듯이 격노하며 아들의 면전에다 이렇게 소리를 지르게 되었다.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은 죽은 지 얼마 안 된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이놈아!  

“저를 뿌리치지 마세요.”

여자의 눈앞에는 남자가 아니라 여전히 냉소적인 아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머릿속에서 아들을 보며 말을 한다.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은 죽은 지 얼마 안 된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하며, 기념물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며, 지금 옆에 있는 남자가 그녀를 기리며 십오 년 동안 숭배한 그 기념물까지도 역시 아무 데에도 소용없으며, 모든 기념물이 다 쓸데없는, 쓸데없는 것이라는 생각까지.

“엄마, 이렇게 말한 적 없었잖아!”

여자는 머릿속에서 경련이 이는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 번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알았지만 복수를 마친 만족감에 더해 지금 이 순간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환하게 해주는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빛이란 이런 것이다. 그녀에겐 삶에 우선하여 기념물을 앞에 갖다 놓을 그 어떤 이유도 없다. 자기 자신의 기념물도 그녀에게는 단 하나의 존재 이유만 있을 뿐이다. 무시당한 자신의 몸을 위해 지금 그녀는 그것을 악용할 수 있다. 곁에 있는 남자가 마음에 들고, 젊고, 또 이 남자가 아마도 (심지어 거의 확실히) 그녀 마음에 들고 가질 수 있는 마지막 남자일 테니까, 그리고 그것만이 중요하니까. 그러고 나서 그녀가 그에게 혐오감을 주고 그의 머릿속 그녀의 기념물을 망가뜨리게 된다 해도, 이 남자의 생각과 기억이 그녀 바깥에 있는 것처럼 이 기념물은 그녀의 바깥에 있는 것이며,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으므로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

“당신이 맞아요, 뭐 하러 제가 뿌리치겠어요?” 

이번에는 방이 아주아주 환했다.

▌ 정작 잃어버린 것

15년 전 그날 밤. 자신의 보잘것없음과 서툶이 부끄러워 불을 껐던 남자는 피할 도리 없이 부패의 자국이 생기는 삶을 의식하고부터 필사적으로 변했다. 본인이 놓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확인하기 위해, 아니 본인이 놓쳐버린 것을 차라리 모욕할 수 있기를 바라며 내내 불을 켤 생각뿐이다. 반면, 여자는 남자의 눈에 보이기에 너무 늙어버린 본인의 몸이 걱정이다. 차라리 그의 기억 속 젊고 아름다웠던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아들이 감시하고 요구하는 어머니가 되기 위해, 지금 여기의 자신을 없는 듯이 묻어버리려고 한다.

남자는 이제 무엇이든 환히 ‘보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아름답게 ‘보이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이 정작 되찾을 수 없는 것을 찾아 헤매는 것 외에는 지금 여기에서 어떤 식으로도 온전히 존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더 큰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남자는 자기 앞의 여자를 보기 위해 불을 환하게 켜기를 원했지만 정작 관심을 갖는 건 현재의 여자도, 지금 여기의 기쁨도 아니다. 그에게 여자는 ‘가지지 못했던 모든 것, 그를 비껴갔던 모든 것, 그가 놓쳐버렸던 모든 것, 그것이 없어서 지금 그의 나이와 빠지기 시작한 머리카락이 견디기 힘들어지는 그 모든 것, 그리고 딱할 만큼 공허한 이 모든 것의 총합으로서 대체물’ 일뿐이다. 심지어 여자는 남자들(집주인과 아들)이 환상하는 자신을 보존하고 싶어서 현재의 자신을 감추고 기쁨으로 움트는 욕구를 억누른다. 그 결과 지금 여기의 남자도 여자도 모두 소외가 되었다.

▌ 나는 지금 누구의 말을 하는가

어떤 문장은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말하는 바가 달라진다.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문장이 그러하다. 죽은 지 오래된 자는 말하는 자에 의해서 늘 상대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묘지 사무소에서 이날 죽은 지 오래된 자는 임대 기한이 만료된 묘지의 주인인 여자의 남편이었지만, 여자의 아들 입장에서 죽은 지 오래된 자는 젊음의 기한이 만료된 자, 곧 어머니다. 아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여자아이들의 젊음을 간섭하고 방해하는 어머니의 젊음, 역겹게도 성생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어머니의 젊음은 가두어 놓아야 마땅한 것이었다. 아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견딜 수 있도록, 어머니를 사랑할 수 있도록 나이 든 어머니가 필요했다. 여자는 아들이 자신을 죽은 아버지나 추도하면서 미망인의 적합한 한계 속에 머물게 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무덤 속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을 때로 알아차렸지만 아들의 뜻을 따랐고, 압력에 굴복했으며 심지어 자기 삶을 그렇게 다른 삶 뒤로 조용히 사라짐으로써 아름다워지는 것이라 생각하려 애쓰면서 이 굴복을 이상화까지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작 여자의 입장에서 죽은 지 오래되어 밀려나야 할 자는 본인일 수가 없다. 여자는 끝내 자신의 머릿속에서 아들의 응시를 뿌리치고 자신의 입장에서 그 문장을 다시 외친다. 그리고 남자들, 집주인과 아들의 입장에서 보여지고 요구받던 그 여자, 죽은 지 오래된 자, 젊음의 기한이 만료된 자로서 퇴장을 요구받던 존재가 아니라, 오롯이 내가 욕망하는 나의 입장에서 죽은 지 오래된 자, 그러니까 죽은 지 십 년이 넘은 남편과 육아의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아들의 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낸다.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으므로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 그렇게 그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만회할 수 없게 된 시점에서 벗어나 무엇이든 자기의 것으로 누리는 시점으로 나아갔다. 이번에는 방이 아주아주 환했다.

지나 그림
지나 그림

보이지 않는 가슴

그룹홈에서 일하는 보육사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그룹홈에서 일하는 나의 이야기가 당신과 우리의 이야기로 나누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영

아동그룹홈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입니다. 내 시간의 45%는 네 아이와 함께 그룹홈에서 보내고, 나머지 55%는 내가 낳은 두 아이와 남편이 있는 집에서 보냅니다. 집과 일터, 경계가 모호한 두 곳을 오가며 겪는 분열을 글쓰기로 짚어보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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