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뮤의 미술 에세이

마술사가 되고 싶은 아이

2024.09.06 | 조회 9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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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The Conjure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The Conjure

변해가는 아이의 관심사

“엄마, 니체는 왜 책 제목을 이렇게 길게 지었을까?” 등교하기 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두고 아이가 한 말이었다. 열두 살 아이는 요새 학교에서 정약용에 대해 배운다며 짬짬이 목민심서를 읽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아이의 독서 시간이 예전 같지 않아 내심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책 읽는 습관만은 만들어주자고 아이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 부부는 그 부분을 특별히 신경 썼다. 될 수 있으면 집 안에도 두루두루 책이 눈에 띄어야 읽게 된다며 거실, 방, 할 것 없이 읽을 책들을 비치해 두었다. 어떤 날은 내가 필요해 꺼내 읽고 또 다른 날엔 남편이, 요즘 같은 때엔 아이가 여기저기에 꽂혀 있는 책을 집어 든다.

책 이야기를 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책을 좋아하던 아이가 마술에 깊이 빠진 거다. 한때는 해리포터에 빠져 있다가 그 몰입은 포켓몬에 이어 마술로 이어진 셈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책과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이가 마술에 빠진 계기는 어쩌면 휴대폰이 없어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전국이 포켓몬으로 들썩이던 때, 우리는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선 적이 없다. 편의점에서 아저씨가 따로 빼놓은 포켓몬 빵을 선뜻 건네주신 덕에 두어 번 그 유명한 빵을 먹어본 게 다다. 내가 그런 유행에 민감하지 않아 그런 것인지 아이도 그걸로 만족했다. 초등학생들 사이에 포켓몬 빵처럼 게임도 유행이었다. (여전한가?) 아이는 게임 대신(휴대폰이 없으니) 애니메이션을 보기 시작했다. 포켓몬의 진화를 나름대로 찾아보곤 외우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소통하는 접점을 찾은 듯했다. 그러던 주변에 마술하는 아이들과 친해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아이 손엔 책 대신 늘 카드가 들려있었다. 가는 곳이 어디든 카드를 담은 가방을 메고 다녔다. 카드를 보관하는 은색 보물 가방만 세 개다. 미처 담지 못한 카드들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다. 용돈을 받으면 오로지 마술 도구만을 산다. 열두 살 아이의 세상은 온통 마술로 가득해졌다. 그러면서 책은 뒷전이 된 게 못내 아쉬웠다. 새 책을 사주지 않아서 그런가 싶어 장바구니에 새 책을 담아두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등교 전 아이의 말에 옳다구나 싶어 바로 4권의 책을 주문했다. 창고에 넣어두고 한 권씩 건네볼 요량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를 뒷전으로 두고 있었던 것 같아 내심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독서습관을 만들어주고자 한 건 '혼자 있는 시간의 비밀' 같은 것을 알면서 크길 바랐기 때문이다.

아이만의 퀘렌시아
아이만의 퀘렌시아
해리포터 마법주문
해리포터 마법주문

책에 몰입하던 시간

옷장 벽에 붙여 놓은 마법주문서
옷장 벽에 붙여 놓은 마법주문서

아이를 등교시키고 난 후, 휴대폰에 있는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아이 방에 있던 특별한 공간. 두 개의 옷장 중 하나를 꾸민 사진이었는데 당시에 아이는 해리포터에 심취해 있었다. 벽 좌측에 잔뜩 프린트한 해리포터 마법 주문서들이 붙어 있다. 그 앞으론 미술관에서 함께 만든 전등이 얇은 목도리 같은 것으로 씌워져 있어 아늑한 동굴 같다. 가장 안쪽 모퉁이에 전천당이 10권쯤 쌓여있고 바닥엔 얇은 이불이 여러 겹 접혀 있다. 그리고 앉아 있을 때 허리를 기대기 좋게 해둔 파란색 차량용 허리 받침대가 있다. 여기가 진정한 아이만의 방, 아늑한 퀘렌시아가 아닌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이가 언어를 재미있어하는 건 책을 취미로 읽은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해리포터에 심취하면서 그 마법 주문서들을 외우느라 시간을 보냈던 때의 아이를 기억한다. 마법 용어들이 엉뚱하고 영 터무니없는 말 같지만, 라틴어의 조합들이라 그 어원들을 찾아 뜻을 알고 외운 시간들이 있었다. 모두 아이가 자발적으로 놀던 방식이다. 그런 시간들이 아이를 언어와 가깝게 만들어준 것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아이의 공간은 자신의 방 안에 작게 마련된 아늑한 동굴에서 더 큰 세계로 확장된 듯싶다. 열두 살이면 한창 친구와 시간을 보낼 때다. 나의 열두 살을 떠올리면 집보다는 늘 밖에 나가서 놀았던 기억이 난다. 마술에 빠진 아이는 어쩌면 맞는 친구를 찾은 것일지도 모른다. 같은 관심사로 종일 얘기해도 지겹지 않고 늘 즐거운 친구 말이다.

전천당
전천당

걱정하지 말자

결국, 니체로 시작한 아이는 학교 다녀와서 읽겠다며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라는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갔다. 아이가 책 읽는 습관을 잃어가는 것 같아 걱정되던 시간이었기에 다시 찾아온 날을 기록한다.

내가 반성해야 할 점은 아이와 도서관 갈 시간을 할애하지 않은 점, 새 책을 자주 사주지 않은 점. 책을 솎아주지 않은 점. 그래서 4권의 새 책을 주문했다. 긴긴밤, 안녕 우주, 기억 전달자, 마지막 이야기 전달자. 이렇게 4권이다. 아이가 흥미로워할 만한 내용이 담긴 책을 선별했고 잔잔하게 읽을 책도 한 권 정도는 넣었다.

지금은 책보다 친구가 좋을 때다. 아이에게 친구는 곧 마술이다. 그 세계를 인정하자.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아이가 하는 마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재미있는 책 선물과 도서관 갈 시간을 만들자. 어른이 되면 어린 시절로 회귀하기 마련이다. 돌아갈 추억 속에 기왕이면 재미있게 책 읽던 기억들이 송송 박혀 있으면 좋겠다. 마술하던 친구들과 즐거운 기억처럼.  

신랑과 내가 읽으려고 샀던 만화책/아이가 꺼내 읽고 있다
신랑과 내가 읽으려고 샀던 만화책/아이가 꺼내 읽고 있다

글쓴이 김상래

융합예술 연구센터 <아틀리에 드 까뮤> 대표, 인문·예술 커뮤니티 <살롱 드 까뮤>를 운영하고 있다. 국회도서관 <상상예술관> 칼럼니스트로 미술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블로그 <까뮤의 그림 배달>을 통해 그림을 나누고 있다. 학교와 도서관, 박물관 및 여러 기관에서 유아부터 시니어까지 문화·예술 관련 지식을 나누고 있다. 초등학교에서 창의융합예술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문화·예술로 가득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하루를 알차게 살아내고 있다. 여러 권의 미술 서적을 집필 중이며, 저서로 <실은, 엄마도 꿈이 있었어>,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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