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하늘이 아름답다고 느낀 때가, 그 파란 빛이 눈부시다고 처음 깨닫던 때가.
아마도 그때부터 슬픔을, 아픔을, 사랑을 조금씩 알아갔던 것 같다.
어릴 적 살던 집은 어째서인지 대문이 없었다. 그 집은 높은 둑 아래에 있었는데 둑의 반대편에는 남천강이 흐르고 있었다. 어스름한 저녁녘에 엄마와 얕은 강물에 발을 담그고 고동을 잡았고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여름날이면 불어난 강물이 둑을 넘어올까 무서웠다. 그 집은 여러모로 이상했다. 대문이 없던 탓일까? 골목을 끼고 둑을 마주하는 것은 대문이 아니라 집의 뒷면이었다. 그러니까 여러 가구가 세 들어 살았고 슬레이트 지붕을 인 시멘트벽이 길게 연결된 하나의 집, 그 뒷모습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려면 골목을 따라가다 벽이 끝나는 부분에 탁 트인 곳으로 돌아 들어가면 보잘것없는 집의 앞모습이 나오고 앞마당은 넓고 넓은 밭이었다. 그럴듯하게 말하자면 넓은 밭이 정원인 근사한(?) 집이었다. 밭은 얼음이 어는 한겨울을 빼고는 추운 날에도 시금치 같은 푸른 잎이 자랐다. 어린 나는 밭에서 자라는 푸성귀보다 그 위로 펼쳐진 드넓은 하늘이 좋았다. 그 이상한 집의 끝에는 마구간이 있었다. 정말로 말 한 마리가 살았다. 대여섯 살 난 여자아이는 거기 살았던 큰 동물인 말이 그저 신기했다. 조금 떨어진 데 서서 바라보기만 하고 가까이 다가가 먹이를 주거나 만져본 기억은 없지만, 분명 곁을 내준 친구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마구간이 비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골목에 친구가 없었던 여자아이는 그 집을 떠날 때까지 더는 그 말을 볼 수 없었다. 아이가 세상에서 본 가장 큰 동물은 자그마한 조랑말이었다.
내 어린 날 지루한 하루의 시간을 달래주었던 것은 넓은 밭이 배경이었던 파란 하늘이었고 끝 집 마구간에 잠시 살던 커다란 동물인 조랑말이었다. 긴 직사각형 모양의 어설픈 집의 좁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들린 발을 앞뒤로 까딱거리며 파란 하늘을 보며 놀았고 그래도 심심하면 마구간으로 달려가 조랑말을 지켜보았다. 그 집을 떠난 조랑말은 아마도 오래 살지 못했을 것만 같고 말이 어떻게 죽는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었던 나는 그때부터 어렴풋이 죽음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기온이 떨어지고 선선한 바람이 피부에 닿고 상상 못 했던 열기로 뜨겁던 긴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더불어 몸과 마음의 생기까지 사그라짐을 직감했다. 지난해 말부터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앓던 오른쪽 팔 통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몸에 기운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힘이 없었다. 지쳐가는 가운데 많이 좋아했던 동료가 건강 문제로 일을 그만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내 어딘가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것 같았다. 저절로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는 날이 이어졌다. 구월 가고 시월이 한창일 때 하늘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한순간도 고정되지 않고 흐르는 하늘을, 그 파란 빛을 오래 바라보는 일이 깊어지는 나의 구멍을 메우고 있었다.
내가 베껴 그린 <골반뼈 Pelvis Ⅳ, 1944.>는 미국의 화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1887년 11월 15일 ~ 1986년 3월 6일)의 작품이다.
주제는 뼈다. 하늘이 아니다. 뼈의 아름다움을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더 부각하고자 했다.
“골반뼈를 그리기 시작했을 때 대부분 나의 관심은 뼈의 틈새 구멍에 있었다. 마치 사람들이 이 세상의 땅보다는 하늘에 마음을 둘 때 그러하듯이, 뼈를 들어 하늘을 배경으로 들여다볼 때 그 구멍을 통해 파란색을 보았다. 뼈는 그러한 파란색―인류가 멸망한 후에도 언제나 지금처럼 있을 것 같은―을 배경으로 볼 때 가장 아름답다.”
오키프는 실제로 뼈의 구멍을 통해 파란 하늘을 보았고 뉴멕시코 하늘의 강렬한 파란색을 사랑했다. 그리고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 뼈의 아름다움을 단순함과 우아함으로 표현했다.
오키프 그림의 주제가 지닌 기본 형태는 모양과 세부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하는 데 있었다. 또한 색채와 선을 통해 주제를 표현하고자 했다.
조지아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커다란 꽃 그림이었다. 꽃을 확대해 그린 그림들. 너무 가까이 들여다보아 기괴하게 느껴지는 꽃이었다. 더욱이 사두초라(蛇頭草) 불리는 천남성을 표현한 작품에서 검은 빛깔과 흰 무늬는 정말로 뱀이 머리를 세운 것처럼 보였다. 꽃을 단순히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었다. 트리필룸천남성을 그린 작품만이 아니라 꽃을 주제로 한 많은 작품이 매혹적이면서도 어딘가 불편함을 주었다. 꽃은 식물의 생식기다. 꽃(생식기)의 형태를 강조하고 크게 확대해 중앙에 배치시킨 것은 꽃이라는 사물에 대한 깊은 경외감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사물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 핵심이었고 꽃을 확대해 그린 이유에 대해 오키프는 이렇게 설명했다.
“꽃은 비교적 자그마하다. 모든 사람은 꽃을 통해 많을 연상을 한다. 여전히 아무도 꽃을 보지 않는다. 너무 작아서 우리는 꽃을 볼 시간이 없다. 친구를 사귀는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다짐했다. 내가 보는 꽃, 꽃이 내게 의미하는 것을 그리겠다고. 하지만 나는 크게 그릴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놀라서 그것을 바라보기 위해 시간을 낼 것이다.”
오키프는 1929년 처음으로 뉴멕시코 여행을 떠났다. 자연의 경이로움이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대지는 오키프에게 큰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1930년대부터 뉴멕시코의 고스트 랜치와 아비퀴우에서 지내면서 주변에 보이는 사물이나 자신을 둘러싼 자연을 작품 안에 담았다. 꽃, 돌, 뼈, 나무, 사다리, 하늘, 구름, 집, 마당, 절벽, 언덕이었다.
사람들이 잘 눈여겨보지 않는 사소한 일상의 것들을 그는 아주 세세하게 들여다보고 만지고 느끼며 그 의미를 발견하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통해 본질을 탐구하고자 했다.
오키프는 열두 살에 친구에게 화가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게 된 것은 열여덟 살부터다. 현재 미국의 최고 미술대학으로 꼽히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대학에 다녔고 뉴욕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가정 경제 상황의 악화로 잠시 상업미술가로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 버지니아 대학에서 그림을 다시 시작하고 뉴욕의 컬럼비아 사범대에 입학해서 혁신적인 미술교육자 아서 웨슬리 다우(Arthur Wesley Dow, 1857-1922) 밑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 오키프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오키프는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오랫동안 학업을 이어나갔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수직을 얻고, 캐니언의 웨스트 텍사스주립 사범대학에서 미술과 학장을 하기도 했다.
오키프의 삶에서 앨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1864-1946)를 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스티글리츠는 미국의 사진작가로 근대 사진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오키프의 목탄 드로잉이 스티글리츠의 시선을 끌고 작품 전시회를 열어주면서 둘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의 뮤즈이자 아내가 되었다.
“파괴를 향한 그의 힘은 창조력만큼이나 강렬했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하는 법, 나는 그 둘을 모두 경험했고 살아남았다. 살아남아야 했을 때 비로소 그를 넘어설 수 있었다.”
오키프는 스티글리츠로 인해 신경쇠약을 겪으며 작업을 중단하기도 하며 급기야 병원에 입원해 요양하게 된다. 그 후 뉴멕시코의 사막으로 발을 옮긴 오키프는 아무도 없는 건조하고 광활한 황무지를 헤매고 다니며 돌멩이와 동물 뼈를 주워 모았다. 그것들은 아름다웠다. 오키프는 그 아름다움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만 같은 시가 있다.
한강 시 <파란 돌>의 일부다.
살아남아 그(스티글리츠)를 넘어설 수 있었다는 오키프의 말에 나는 먹먹했다. 스티글리츠의 뮤즈가 아니었다면 오늘날 오키프의 명성은 없었을 거라 말하는 사람이 아직 존재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화가 조지아 오키프를 제대로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 편협과 무지의 결과일 뿐이다.
“평범하게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문득 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내가 원하는 곳에 살 수도 없고, 갈 수도 없으며 하고 싶은 것을 할 수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말하고 싶다고 모두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남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진짜 중요한 것,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바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키프는 내가 12살이 되는 해인 1986년 3월 6일 샌타페이에서 98세에 자연으로 돌아갔다. 3월 9일생인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난 3일 후에 엄마가 끓여준 미역국에 밥을 말아먹었을 것이다. 장례나 기념식은 없었다. 오키프의 바람대로 유골은 뉴멕시코의 풍경 위로 뿌려졌다고 한다.
"죽음을 생각할 때, 내가 이 아름다운 땅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만 아쉬워, 인디언들 말이 맞아떨어져서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이곳에서 걷고 있지 않는다면 말이야."
고독과 조용함을 오랫동안 소망했던 오키프에게 뉴멕시코에서의 삶은 오롯이 그림으로 채워졌다. 누구보다 자연과 자연의 색을 사랑했던 화가 조지아 오키프, 아비퀴우의 작업실 커다란 창밖으로는 차마 강 유역의 광활한 절경이 펼쳐진다. 물감과 붓, 동물 뼈가 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조용히 작업에 몰두했을 그의 오래되고 마른 등이 눈앞에 그려진다.
주어진 삶이 틈새나 구멍을 만들지라도 그 사이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리도록 아름다운 파란 빛에 감동하며 살아내고 싶다. 결국 그 시린 아름다운 자연으로 돌아가는 일이 남았다. 번잡한 장례 없이 조용히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소망이 내게도 생겼다.
<참고 책>
조지아 오키프 –브리타 벵케, 마로니에북스.
조지아 오키프 –알리시아 이네즈 구즈만. 김선지 옮김. 북커스.
내 안으로 들어온 명화를 보고 느끼고 베껴 그리며 생각한 것으로, 시와 짧은 단상들이다.
글_오랑
추웠던 어느 저녁, 누군가 내민 재킷의 온기를 기억하며 따스한 일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 안의 온도를 높이려고 읽고 쓰고, 그림을 그리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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