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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모친과 반려자가 빠져있다면 누구를 구해야 할까요? 비슷한 질문들, 들어본 적 혹은 생각해본 적이 있지 않나요? 잊혀진 여성들 서른여섯 번째 뉴스레터는 유명하고 악명 높은 윤리적 딜레마인 트롤리 딜레마 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트롤리 딜레마와 이를 제시한 필리파 풋, 그리고 트롤리 딜레마의 광범위한 사용을 발견한 주디스 자비스 톰슨의 이야기. 지금 시작해볼게요.
도무지 답이 없다! 트롤리 딜레마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굿플레이스에는 여러 철학적 질문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 인상깊은 질문 중 하나는 트롤리 딜레마이죠. 트롤리 딜레마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입니다.
윤리학에서는 해당 문제를 공리주의적인 관점에서 판단할 것인가, 의무론을 따라 판단할 것인가로 나뉘죠. 그리고 많은 이들이 철로를 바꾸는 것을 선택한다고 합니다. 1명을 희생해서라도 5명을 구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죠. 하지만 파생되는 다음 질문에서는 조금 그 대답이 다르다고 합니다.
두 상황 모두 한 사람을 희생하고 여러 사람을 살리는 점은 같은데, 파생 문제에 대해서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답을 많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파생 문제에서의 뚱뚱한 남자를 '밀어 떨어뜨리는 것'을 허용하는 것은 누군가를 '직접 죽음으로' 몰아 넣는 행위로 여겨져서 그렇다고 합니다.
어쩌면 너무나 익숙한 이 윤리적 딜레마는 1967년에 윤리학자 필리파 풋(1920 - 2010)에 의해 제기되었고 주디스 자비스 톰슨(1929 - 2020)에 의해 확장되어, 도덕 철학 뿐 아닌 경제학, 신경 과학, 진화 심리학을 연구하는 여러 분야의 학자들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영감을 주었습니다.
인공지능과 트롤리 딜레마
최근 트롤리 딜레마는 인공지능의 딜레마로 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2018년 세계적 과학저널인 네이처에서는 자율주행차 AI의 윤리적 문제와 관련하여 트롤리 딜레마를 230만명에게 조사하여 분석 및 발표했습니다. 해당 조사는 탑승자와 보행자의 성별과 숫자 그리고 애완동물 동승 등을 조건으로 13가지 시나리오를 만들어 응답자의 선택을 조사한 것이죠.
설문 결과, 동서양 응답자의 선택 경향이 달랐습니다. 서구권에서는 사람 숫자가 많고 어린아이 또는 몸집이 작은 사람을 구하는 쪽을 선호했고, 동양권에서는 사람 숫자와 관계 없이 보행자와 교통규칙을 지키는 쪽이 더 안전해야 한다는 선택을 한 것이죠. 그리고 남미권은 여성과 어린아이,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더 안전하도록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이는 문화에 따라 윤리적으로 옳다고 여겨지는 선택이 달랐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흥미롭지 않나요?
(출처 : 한국일보)
"도덕 철학에서 식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필리파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서머빌 대학에서 철학과 정치 그리고 경제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 그는 왕립 국제 문제 연구소에서 일하였고, 석사 학위를 마친 후에는 모교인 서머빌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도 철학 교수를 하며, 철학자이자 교육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동시대의 다른 철학자들과는 다소 다른 관점을 갖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자연과 도덕에 대한 연결성 입니다. 그는 '도덕 철학에서 식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라 믿는다'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연과 도덕이 대조되는 개념으로, 인간을 자연과 구분하는 것이 바로 도덕(morality)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지금까지도 인간을 자연과 분리하여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걸 보았을 때, 필리파의 관점은 상당히 독특합니다. 특별한 관점으로 도덕 철학을 주장하면서도 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항상 여성 동료 학자들이 곁에 있었고, 그들과 함께 목소리를 냈죠.
세계 대전 이후 사회과학에 큰 변화가 있고, 철학계도 변화를 겪게 된 1960년대. 기존의 형이상학과 언어-분석철학에서 벗어나, 현실적 질문과 주체적 사회윤리를 살피기 시작한 시기. 필리파가 제기한 트롤리 딜레마는 '트롤리학(트롤리學, trolleyology)'이라 불리기도 하면서, 이후 많은 철학자들이 체계화하여 분석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트롤리학을 최고조로 달리게 만든 이로 꼽히는 철학자인 주디스 자비스 톰슨이 있습니다.
임신중단을 논할 때 중요한 것은 태아가 아닌 여성이다
필리파가 트롤리 문제를 제기한 것은 사실 임신중단(낙태)에 관한 윤리적 논의를 이끌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광의의 임신중단 찬성론자였으나, 태아의 생명권에 대한 사회적 합의로 그 허용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죠.
하지만 주디스는 임신중단에 대해 옹호하였고, '낙태에 대한 옹호'라는 에세이를 출간하였습니다. 그의 에세이는 임신중단의 윤리적-논리적 정당성을 밝힌 최초의 철학적 고찰이자, 낙태 윤리이론의 고전이 되었습니다.
"강간으로 인한 임신의 경우에 예외적으로 낙태를 허용한다면, 강간으로 수정된 태아(인간)의 생명권은 다른 인간의 생명권보다 가벼운가"
"환기하려고 열어둔 창문으로 절도범이 들어왔다고 그에게 집을 사용할 권리가 있는가"
"어떤 사람의 희생을 요구할 권리가 없는 타인의 생명을 지속하기 위해 큰 희생을 치르기를 도덕적으로 요구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주디스의 에세이는 임신중단 논쟁의 중심을 '태아의 지위'에서 '여성(산모)의 권리에 대한 이해'로 이동하게 하였고, 에세이 출간 2년 후 로 대 웨이드 판결로 미국은 임신 6개월 이내의 임신중단에 대한 헌법적 권리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트롤리 딜레마를 제기한 필리파와 딜레마를 학문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주디스. 두 학자는 당시 드문 여성 철학자로 철학계의 성별이라는 벽을 허무는 데에 기여했습니다. 그들은 현실의 난제에 대해 윤리적 해법을 모색하고 공유하며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죠.
미국 연방 대법원은 올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공식 폐기하며, 임신중지권의 존폐 결정을 각 주에 맡기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판례는 다른 나라에도 큰 영향을 주기에, 참 분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주디스 자비스 톰슨을 알고, 그의 발자취를 밟아보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필리파와 주디스가 던진, 그리고 여전히 난제로 남은 트롤리 딜레마. 구독자님은 어떤 선택을 하실 건가요? 어떤 선택이 옳은 선택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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