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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동덕여자대학교를 둘러싼 뉴스가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지난달 7일, 동덕여대의 대학 발전 계획 수립 회의에서 여남 공학 전환 논의가 이루어진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었는데요.
동덕여자대학교가 21일 '여공학 전환' 논의를 중단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학생들의 본관 점거와 수업 거부 시위에도 학교가 한발 물러선 이유는 지난 20일 열린 학생총회에서 2,000명 가까운 학생들이 공학 전환에 반대표를 던진 결과로 분석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덕여대의 '공학 전환 반대 총력대응위원회'는 학교가 전면 철회를 발표할 때까지 농성을 계속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사태는 학령인구 감소, 대학 내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소통 부재, 여성 차별과 혐오 시선 등 여러 구조적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 동덕여대를 넘어 사회적인 이슈로 확산하였죠. 그렇다면 동덕여대 학생들이 이렇게 강력하게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전히 여대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지, 오늘 뉴스레터에서는 그 역사적 배경과 의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세계 최초의 여자대학교: 거턴 칼리지의 역사
1986년 10월 10일, 영국 케임브리지의 모들린 칼리지에서는 남학생들이 여학생의 입학을 반대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는 동덕여대에서 발생한 논란과 정반대의 상황으로, 대학 측이 여학생을 받아들이려고 하자 기존 남학생들이 강력히 반대했던 것입니다. 이 시위는 '검은 10월(Black October)'이라는 클럽을 만들어서 전개되었습니다.
모들린 칼리지는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성만을 받던 전통을 가진 칼리지였는데, 개교 444년 만에 여학생 입학을 허용하려는 시도에 남학생들이 강력하게 반발한 것입니다. 이 시위는 단순히 한 대학의 문제를 넘어, 영국 사회에서 여성의 교육 기회와 권리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하는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냈습니다. 이보다 앞서 1979년, 올 소울스 칼리지에서 처음으로 여학생을 받아들였고, 그 이후 남성 중심의 전통적인 칼리지들이 여학생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남학생이 이를 거부하며 반발했으며, 이들은 대학 내에서 남성의 권리와 전통을 지키려는 투쟁을 벌였습니다. 남학생들은 "여성에게 가운을 입히지 말라"와 "남성을 위한 대학" 등의 슬로건이 적힌 현수막을 들고 행진했으며, 다른 시위자들은 계란, 오렌지, 색종이, 꽃을 던지거나 폭죽을 터뜨리기도 했죠.
대학이 여성 학생들에게 정식 학위를 수여하는 안건을 철회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1,707표 대 661표로 패배) 학생들은 그 인형의 머리를 자르고 몸을 훼손한 후, 그 머리 없는 몸을 모든 여성 대학인 뉴넘 칼리지의 문을 통해 집어넣으며 기뻐한 충격적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킹스 퍼레이드 끝에 걸린 여성 자전거 선수의 인형이었습니다. 학생들은 대학의 결정에 반발하며 그 인형의 머리를 자르고, 몸을 훼손한 뒤, 그 머리 없는 몸을 뉴넘 칼리지의 문을 통해 집어넣으며 이를 축하했다고 합니다.
영국의 칼리지는 원래 수도원에서 비롯된 제도였으며, 학문을 추구하는 남성들만의 공간이었습니다. 그동안 칼리지 내 규정에서는 여성의 입학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었고, 이는 여성의 지성보다 가정적이고 따뜻한 이미지를 중시하던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여성에게도 고등교육의 기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1879년 케임브리지의 거턴 칼리지가 세계 최초로, 여자대학교로 설립되었으며, 이는 여성 교육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거턴 칼리지의 첫 입학생은 5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후 19세기 말에는 옥스퍼드에도 여학교들이 설립되었고, 이는 점차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지성에 대한 인식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거턴 칼리지는 여성 교육을 선도한 중요한 기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1977년부터 남학생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여남공학으로 전환되었고, 이 변화는 세계 여러 나라의 여자 대학교에서도 비슷한 흐름을 보였습니다.
영국의 대표적인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은 1928년 거턴 칼리지와 뉴넘 칼리지에서 강연한 내용을 토대로 쓴 에세이입니다. 여학생들은 강의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대학 구성원 자격을 인정받지 못해 학위도 받을 수 없었던 시절이었죠. 강연 주제는 '여성과 픽션'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여자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의 탄생
1886년 5월 31일은 조선에 파송된 미국 선교사 스크랜튼 선생님께서 단 한 명의 여학생과 첫 수업을 시작한 날이었습니다. 그 학생은 '김 여인'이라는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꿈을 가진 젊은 여성이었는데요. 그는 왕비의 통역관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화의 여성 교육이 시작된 1886년 5월 31일은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진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매우 뜻깊은 날이었습니다. 김 여인이라는 첫 학생과 함께 시작된 이화학당의 역사는 한국 여성 교육의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 순간이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화의 창립일로 기념되고 있습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 출신의 메리 스크랜튼은 1885년,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WFMS)의 파송을 받아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과 함께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한국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가진 그는 일본에서의 생활보다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의지를 밝히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 한국 땅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는 1886년 이화학당과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인 보구녀관을 설립했으며, 아들과 함께 동대문감리교회, 아현감리교회, 상동감리교회 등을 세웠습니다. 1885년 6월 30일 정동에 도착한 스크랜튼 선교사는 8월에 미국 공사관 근처에 큰 집을 매입하여 여성 선교의 기지로 삼고, 재정 확보를 위해 편지를 통해 친구들에게 기부를 요청하며 교육 기구들을 확보했습니다. 그 결과 1885년 10월 23일, 정동 일대에 19채의 한옥과 6,200평의 대지를 구입하며 학교 설립을 위한 기초를 다졌습니다.
이화학당 설립 초기, 학생을 모집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집안일을 배우거나, 하층민의 딸은 매매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또, 남자 선생님이 있다는 소문에 부모들이 딸의 교육을 반대하자, 스크랜튼은 학생들과 교사들 사이에 휘장을 설치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1886년 5월 31일, 단 1명의 학생을 시작으로 이화학당이 문을 열었고, 그 후 3명의 학생이 더 입학하면서 학교는 점차 성장했습니다. 1887년에는 고종으로부터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의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1914년, 제1회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식에서 이화숙, 신마실라, 김앨리스는 한국 여성 최초의 학사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이화가 배출한 세 명의 여학사는 한국 여성의 무한한 가능성을 증명하는 중요한 인물들로, 이들은 각자 4년간의 연구 결과물을 한국어와 영어로 발표하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죠. 이화숙은 ‘미국 시인 롱펠로우’, 신마실라는 ‘한국 미술 탐구’, 김앨리스는 ‘교육 요소로서의 놀이’를 연구 주제로 발표했습니다. 이들 세 명을 비롯한 수많은 이화의 졸업생들은 이화학당에서 배운 가르침을 바탕으로 지식인으로서 사회에 기여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화여대는 단순한 학문적 성취를 넘어, 여성들이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현실로 만든 기관이었습니다.
이화여대의 계보를 잇다: 숙명여대, 동덕여대
숙명여대, 동덕여대는 한국 여성 교육의 중요한 기둥이자, 여성 인권과 평등 교육을 선도해 온 대학들입니다. 각 대학은 다양한 역사적 배경과 교육 이념을 가지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여성의 사회적 역할 확대와 교육을 통해 여성 인권 신장에 기여해왔습니다.
1906년 5월, 고종의 계비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지원을 받아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현재의 숙명여자고등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설립 초기 명신여학교는 여성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당시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며 중요한 교육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학교는 1909년 숙명고등여학교, 1911년에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편되었고, 그 후 숙명학원이라는 재단법인이 인가를 받았습니다. 이후, 이정숙 교장은 여성을 위한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목표로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35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사망 후, 숙명학원과 숙명고등여학교 졸업생들이 주도한 숙명여자전문학교 창립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습니다. 이들은 숙명여전 설립 모금 운동을 벌였고, 그 결과 숙명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숙명여자전문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숙명은 학생들에게 창의력과 리더십을 함양시키고, 변화하는 세계에서 여성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교육적 목표를 지니고 있습니다.
동덕여자대학교는 1908년, 춘강 조동식 선생이 국권 회복을 위해 설립한 동원여자의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일제 침략으로 민족의 운명이 절망적이던 상황에서, 춘강 선생은 여성 교육이 민족의 재건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같은 해 설립된 동덕여자의숙을 1910년 인수하고 교명을 동덕여자의숙으로 변경했으며, 이 과정에서 의암 손병희 선생도 참여했습니다. 동덕여대는 6·25전쟁 직전인 1950년에 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고, 전쟁의 상흔으로 인해 1957년에서야 첫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1967년에는 하월곡동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본격적인 성장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에는 대학원 설립을 시작으로, 1987년에는 인문과학대학,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 예체능대학 등으로 구성된 종합대학 체제로 개편되었습니다. 이후 김종협 총장부터 김영래 총장까지 여러 총장을 거쳐, 동덕여대는 여성 인재를 배출하며 문화예술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분량 문제로 모든 여대를 다룰 수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국제적 상황과 여대 감소:여대의 감소 현상
전 세계적으로 여자대학의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습니다. 25년 전에는 300여 개의 여자대학이 존재했으나, 현재는 58개로 줄어들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40년 사이에 여자대학의 수가 190여 개에서 28개로 급감했으며, 한국에서도 상명여대, 성심여대, 효성여대 등 3개 대학이 남녀공학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여자대학이 처음 설립된 이유는, 당시 대부분의 대학이 여학생들의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대학들이 여학생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여자대학의 존재 이유가 점차 사라졌습니다.
여자대학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과거에는 여학생들이 남자들과 동등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 절실했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는 시선도 존재합니다. 또한, 여성들만의 공간이 남성중심 사회와의 거리감을 심화시킬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여자대학 졸업생들이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여자대학의 학생들과 지도자들은 여전히 미국 고등교육에서 여자대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여자대학이 여성들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뛰어난 여성 리더십 교육을 통해 여성들이 과학, 경제, 선출직 공무원 분야에서 남성들과 경쟁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말합니다. 메레디스 칼리지 총장인 조 앨렌은 21세기 여성 지도자의 수가 증가하고 있으며, 고전적인 남성 위주의 리더십 모델은 이제 퇴화하고 있다고 언급합니다.
메레디스 칼리지는 2,000여 명 이상의 학생이 재학 중인 미국에서 큰 여자대학 중 하나이지만, 10년 전보다 학생 수가 약 400명 줄어들었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학교는 직원의 10%를 감축하고 몇 개의 학과를 통폐합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앨렌 총장은 향후 5~10년 내에 새로운 학위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학교가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발전을 도모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메레디스 대학 2학년인 케이티 넬슨은 "만약 수업 중에 남학생이 있다면, 우리는 의견을 충분히 자유롭게 개진하지 못할 것 같다"며 여자대학을 선택한 이유를 밝혔습니다.
앨렌 총장은 여자대학이 제공하는 독특한 환경에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으며, 남녀 공학에서는 여성들이 종종 남성에게 억압당하거나 경쟁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설명했습니다. 여자대학들은 학생 충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수 인종 출신이나 외국인 유학생을 유치하고, 수업료 인하와 장학금 확대 등의 노력도 기울이고 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여자대학 졸업생들이 남녀공학 출신 여성들보다 리더가 될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여자대학 졸업생들이 미국 의회 여성 의원의 23%, 경제계의 부상하는 인물 30%를 차지하죠.
여자대학교의 정체성과 미래
한국에서도 일부 여자대학이 여남공학으로 전환된 사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상명여대는 1996년 여남공학으로 전환하며 상명대학교로 개명되었고, 성심여대는 가톨릭대와 통합되면서 여남공학으로 변화했습니다. 대구의 효성여대도 대구가톨릭대와 통합하면서 여공학으로 바뀌었죠. 현재도 여자대학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4년제 대학 7곳과 2년제 전문대학 7곳입니다.
한국에서 여대가 설립되었을 당시, ‘여(女)’라는 접두사는 여성 고등교육기관의 독특한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붙여졌습니다. 과거에는 대학이 남성들만을 위한 공간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남대’라는 표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여성 교육은 매우 새롭고 특별한 일이었기 때문에 ‘여대’라는 명칭이 그 존재를 드러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죠.
오늘날 여성의 대학 진학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이제는 ‘여대’라는 이름이 계속해서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최근 여대의 존재를 두고 역차별이라는 논란이 일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차별’이라는 개념은 과거에 차별이 존재했음을 전제로 성립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여성의 교육과 권리가 제한되었던 역사를 돌아보면, 여대를 둘러싼 역차별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습니다. 이는 과거의 차별을 간과하거나 축소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뿐입니다.
여대는 여전히 여성들에게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공학 대학에서는 여성 총학생회가 사라지거나 여성 관련 학문과 권리 강화 논의가 축소되고 있지만, 여대는 여성학 강좌를 확대하고 관련 서명운동을 진행하며 여성의 문제를 꾸준히 사회적 논의의 장으로 끌어내고 있습니다.
잊혀진 여성들 팀은 동덕여대 학생들의 공학 전환 반대 시위의 목소리에 공감하며 그 의미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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