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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기록에 애정이 있어서 그래요

- 그 말의 이면에서

2025.03.25 | 조회 7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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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파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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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사회

기록에 대한 모든 이야기

가볍지 않았던 한마디

“기록에 애정이 있으시네요.” 

얼마 , 직장 동료에게 들었던 말입니다. 분명 선한 의도로 건넨 말이었겠지만, 저는 말을 칭찬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마음 한켠이 씁쓸했습니다. 기록에 관심을 갖는 일이 마치담당자의 특별한 성향처럼 치부되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기록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개인의 취향이나 성격으로만 이해되는 현실이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그저 흘려들을 수도 있었던 한마디였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켠에 오래 남아 며칠 동안 곱씹게 되었습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저는 수집기록물을 주로 다루는 기관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업무 특성상 기록물 열람, 이용, 대여 요청을 자주 받습니다. 최근에는 이틀에 한 번꼴로 문의가 들어오고, 전시나 홍보가 집중되는 시기에는 하루 종일 응대 업무만으로 하루를 보내기도 합니다. 

물론 귀찮거나 피곤한 순간이 없는 아니죠. 가끔은, 아니 솔직히 말하면 종종 귀찮은 마음이 올라오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장고 속에서 잊힌 잠들어 있는 기록들을 꺼내어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 일이라고 생각하며 최대한 성의 있게 응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기록물이 ‘공간 채움용 오브제’가 된 순간

그런 저에게 기록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만드는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작년, 기관 내부의 기획 전시에서의 일입니다. 내부 소장 기록물과 예술 작품을 함께 전시하는 행사였습니다. 

기록물이 많은 사람에게 보여지는 건 굉장히 의미있는 일이었지만, 원본 기록의 반출은 여러모로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해당 부서의 협조 요청과 원본 기록을 고집하던 기획자의 적극성, 그리고 상부의 의견에 따라 협조하게 되었습니다. 

굉장히 많은 기록물을 열람하고 반출하는 과정 속에서 전시에 대한 기대감도 커져갔습니다. 하지만 전시 오픈 당일, 저는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대부분의 기록물에는 설명이 없었고, 단지 전시장을 채우기 위한 공간 채움용 오브제로 사용된 듯한 인상이 강했습니다. 부피는 커졌지만, 내용의 밀도는 얕아졌습니다. 기록물을 신성시하려는 것도, 박물관의 유물처럼 조명하길 바란 아니었습니다. 다만, 쇼핑하듯 기록을 고르고, 내용이나 맥락 없이 배치하는 태도에 불편함을 느꼈던겁니다.

 

또다시 반복된 무심함

번째는 얼마 , 다른 내부 전시에서의 일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서의 협조 요청을 받아 기록물을 반출했고, 전시된 모습을 확인했을 비슷한 불편함이 다시 들었습니다. 설명 하나 없이 전시대 위에 겹겹이 놓인 기록물은, 어떤 의미와 맥락보다도 마치 허전한 공간을 메우기 위한 소품처럼 보였습니다. 기록물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과 태도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그런 무성의함에 안타까움이 남았습니다. 

 

기록을 대하는 마음의 온도

가벼운 자리에서 동료들과 넌지시 이 문제의식을 나누었는데, 그때 돌아온 말은 “○○선생님이 기록에 애정이 있어서 그래요” 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따뜻한 말일 수 있지만, 그 속에는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으니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암묵적인 권유가 담겨 있었습니다.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술 전시나 유물 전시를 맡은 학예연구사는 과연 이런 말을 들을까?’ 기록에 대한 관심이 특별한 애정으로만 해석되는 현실이  씁쓸했습니다.  

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기록물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를 종종 마주하게 됩니다. “기록물이 그렇게 대단하냐 반응에 마주할 때면, 나름의 소신으로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내보지만, 그런 순간마다 마음 한켠이 괜히 무거워집니다.

 

내 몫의 책임을 인정하며

그러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난 그저 ‘불편함’을 느끼고만 있었던 건 아닐까? 

문제의 원인을 사회 탓, 타인 탓, 외부로 돌리면서도, 정작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지 않았다는 걸요. 불만만 토로하고 있는 제 자신이 성숙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카이브 전시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거나, 기관의 기록물 활용에 대해 담당자로서 최소한의 기준을 고민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예컨대, 전시에 활용되는 기록물에 대해 기본 설명 문구를 제공한다거나, 전시 맥락과 보존 조건에 대한 사전 협의 절차를 제안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기관 내에서 단 한 명의 담당자일지라도, 기록물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바꾸는 일은 제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 하나만 애써서 뭐가 달라지겠어’라는 생각은 이제 조금 내려놓고, 작은 변화부터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퇴근 후 기절하듯 소파에 기대 영상을 보며 하루의 피로를 푸는 시간이 일상의 낙입니다만, 이 일에 연차가 쌓여가는 만큼 조금 더 부지런해져야겠다는 다짐도 함께 듭니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타학문에 비해 기록학의 전문서적이나 논문이 적다는 현실을 안타깝게만 보았는데, 정작 나는 지금껏내가 한번 써보자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대학원 시절, 동료들과 함께 공부하며 느꼈던 열정과 설렘을 떠올리며, 내가 직접 무언가를 해볼 있다는 가능성도 조금씩 열어보려 합니다. 

 

남는 마음, 담담히 걷기

이런 긴 글을 쓰며 마음을 털어놓는 건, 현장에서 일하시는 선생님들께서 분명 비슷한 경험으로 제 마음에 공감해주시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기록문화 속에서 묵묵히 하루하루를 견디고 계신 분들게 조용히 응원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글을 마무리하며, 얼마 전 본 드라마의 한 장면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사람에게 상처받은 한 여인이 새로운 삶을 위해 도망치듯 정든 마을을 떠나려 할 때, 이웃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녀에게 다시 시작할 용기를 건넵니다.

"배고픈 채로 가지 말고, 마음 상한 채로도 가지 마. 울면서 가면, 가는 너도 힘들고, 남는 사람 마음도 오래 아파. 꼭 가야 한다면, 마음 조금 괜찮아지고, 웃으면서 갈 수 있을 때 가.“

이 대사처럼, 저 역시 속상한 마음만으로 이 일을 외면하고 싶진 않습니다.

기록을 둘러싼 고민과 일상의 무게 속에서도, 함께 담담히, 그러나 꾸준히 걸어나갈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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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미의 프로필 이미지

    매미

    0
    16 days 전

    공감갑니다.ㅠㅜ제 마음 그대로인 글 같네요. 혼자가 아닌 것에 위안받고 갑니다.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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