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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현행화에 대한 짧은 생각

2024.05.22 | 조회 1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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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lerance

기록과 사회

기록에 대한 모든 이야기

 우리는 모두 기록을 하며 살아갑니다.

 

 아카이브를 둘러싼 모든 문제의 시작점임과 동시에,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문자, 이미지, 부호, 데이터로 이루어진 정보를 발자국처럼 남겨온 개인과 집단의 본능적 행위가 바로 기록하기입니다.

 

 기록의 개념은 무엇일까요? 새로운 기록학 교과서 <기록관리의 세계>(한울, 2023)에 따르면 학문적 관점에서 기록은 활동의 증거입니다. 조직활동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뒷받침하는 권위 있는 정보원이며, 개인과 집단의 기억을 보존함으로써 인류의 지식을 풍요롭게 하고, 모든 영역의 인간 활동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담겨 있기 때문에 기록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거시적 관점에서 기록은 집단기억, 설명책임성, 사회적 정의와 같은 힘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힘을 갖고 있는 기록은 한편 매우 쉽게 매일 소박하게 쓰이는 그런 단어이기도 합니다.

 

 가장 대중적이라고 믿을만 한 사전인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기록의 뜻을 찾아보았습니다. 두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1. 주로 후일에 남길 목적으로 어떤 사실을 적음. 또는 그런 글. 
2. 운동 경기 따위에서 세운 성적이나 결과를 수치로 나타냄. 특히, 그 성적이나 결과의 가장 높은 수준을 이른다.

네이버 국어사전, '기록' 검색 결과

 

  기록관리 연구나 업무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위 두 가지가 보편 타당하게 이해 가능한 설명입니다. 1번의 의미처럼 기록은 우리 생활에 밀접한 행위 중 하나입니다. 네이버 사전 시소러스가 말해주는 기록의 유의어는 설명책임성, 조직의 투명성, 책임성과 같은 개념어보다는 마크, 기입, 노트, 글, 메모, 문서, 서류와 같이 기록물의 하위 개념 또는 기록하는 행위에 관한 단어입니다. 2번의 의미에서 누군가의 노력의 결과는 수치화되어 정량적 평가를 통해 네임 밸류를 높이기에 적절하겠습니다.

 

 물론 기록의 보편적 관념을 논하는 것과 단어 자체의 뜻을 파악하는 의미 찾기는 목적이 다릅니다. 다만 우리 모두가 잠을 자고 밥을 먹듯 자연스레 기록을 하면서, 과연 조직적, 사회적 관점에서의 중요성만이 기록의 존재가치를 평가하는 데 적합한 것일지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기록의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잘 관리된 기록을 통해 행위를 증거하고 사회문화적 가치를 후대에 남기는 것은 역사적으로 기록이 갖는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입니다. 작금의 몇몇 이슈에서도 알 수 있듯 기록관리 영역에는 아직도 숙제가 많지만, 전반적으로는 지난 25년 간 공공기록을 개방함에 따라 신뢰할 수 있는 정부와 감시하고 독려하는 시민사회로 향해 가고 있다고 우리는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록학에서의 ‘기록의 개념’과, 보편적 시각에서의 ‘기록의 의미’는 왜 차이가 날까요? ‘기록의 사원’ 속 아키비스트야 기록의 선별, 평가, 폐기, 접근통제에 대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로서 기록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하고 그 권력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데 전문성을 발휘할 것입니다. 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관리자 관점이 아니라 생산자 관점에서 기록에 접근합니다. 어떤 내용을 어떤 구조에 담을지 고민하며, 어떤 목적으로 자신의 정보를 기록할지 결정합니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찍든 새로운 구성원 영입 공고에 낼 이력서를 쓰든 말입니다. 

*랜달 C. 지머슨, <기록의 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6)에서 인용. 지머슨은 아카이브즈를 기록의 사원이라 표현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기록학은 법률 제정과 제도를 통해 위로부터 시작된 학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록학 전문가의 실천적 역량이 중요하다고 강조해 왔지만 기실 기록학 이론이 수입, 정착, 현지화, 적응되어 가는 와중에 오로지 ‘조직적, 사회적, 거시적 관점'에서 기록관리’의 중요성에만 집착해 온 것은 아닐지 조심스럽게 자문(自問)해 봅니다.

 

 이렇듯 기록은 쉘렌버그의 숲 속에서 관리와 통제가 필요한 대상이 됩니다. 이런 시각을 좀 비틀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영화 <아바타>의 판도라 행성에 사는 모든 동식물은 '에이와'를 중심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서로 먹고 먹히거나 공생하는 생태계를 이루는 것처럼 말입니다. 일상 속에서 매일 기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록은 ‘행위’이자 ‘행위의 결과물’이며, 잘 관리함으로써 집합적 지식의 총체로 발현되는 사회적 의미보다는 나의 공적, 사적 삶의 단편 속에서 우연히 발생하거나 또는 목적을 갖고 만들어 낸 읽어낼 수 있는 정보입니다. 모인/모은 기록은 거대 담론이나 사회의 요구와 관계없이 개인이나 집단에게는 매우 소중한 자산이 됩니다.

 

 개인과 집단에게 기록은 자기 증명과 PR의 영역입니다. 삶의 노력과 시간이 빚어내면서 켜켜이 쌓이는 것들 말입니다. 기록은 디자인 포트폴리오, 창업가의 아이디어와 사업화 과정을 그때그때 적은 메모집, 예술가의 작업 노트, 코카콜라 상표가 들어간 모든 것을 수집한 컬렉션, 연대기를 정리한 엑셀 목록, 깃허브의 커밋 그래프, 연구노트에 기록된 실험의 실패와 성과, 암 투병 과정에서 하루하루 변화하는 모습을 담은 유튜브 채널, 해가 바뀔 때마다 갱신하는 프로필, 유치원 어플에 쌓인 내 아이의 식단과 키와 몸무게와 교육활동, 현장학습 사진, 고등학교 3년 간 모의고사 성적표, 나의 숨겨진 정체성을 잔뜩 표출한 소셜 미디어 부계정, 스팀(Steam)에 쌓인 게임 이력과 랭킹, 우리 단체의 탄생과 질곡, 성장과정을 담은 자료집, 인스타그램에 모아낸 방석집 간판 모음, 우리 지역의 골목길만 모은 사진집, 50년 된 정미소의 열정과 노하우가 배어난 옛 사진과 단골의 증언 같은 것입니다.

 

 이런 시각은 종종 기록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타 분야 전문가들에게서 발견됩니다. 바이브컴퍼니(구 다음소프트)의 송길영 부사장은 최근 저서에서 핵개인의 출현을 시사하며 포용성이 담보된 다양성의 시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개인의 서사라고 표현했습니다. “가장 경쟁력 있는 상품은 ‘서사narrative’입니다. 성장과 좌절이 진실하게 누적된 나의 기록은 유일무이한 나만의 서사입니다.” 나의 기록은 나의 고유성을 보장함과 동시에, 축적되어 갈수록 진정성을 발휘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송길영,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교보문고, 2023)에서 발췌 및 인용

 

 다양한 영역에서 전문성을 발휘하고 있는 개인들이 '기록하기'라는 공동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집단이 되어 모인 적도 있습니다. 도시연대는 도시의 '기록자'를 스스로 규정해보고, 개개의 기록자가 도시와 기록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개별적 특수성은 인정하되 이런 활동 자체에 대한 사회적 필요성과 중요성을 고민하기도 합니다. 

 

 인천 개항로프로젝트의 ‘족장’ 이창길 대표는 로컬에서 성공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기록이 쌓여 서사가 되고 팬덤이 된다. (중략) 자료를 남기고 기록을 정리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중략) 비플의 그림과 인도네시아 대학생의 사진처럼 시간이 축적된 아카이빙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로컬에서 공간을 운영하고 싶은데 가진 것도 보여줄 것도 없다면 오픈 과정을 소소하게 사진으로 찍어 인스타그램 계정에 공유해보자. 동영상 툴을 다룰 줄 안다면 유튜브 채널에 브이로그 형식으로 기록하는 것도 좋다. 서사를 만들고 팬덤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창길, <로컬의 신: 서울을 따라하지 않는다>(몽스북, 2023)에서 발췌

 

 요즘 시대에 자신만의 서사를 보여주는 것은 남들과는 다른 차별성, 경쟁력 그 자체입니다. 이미 기록에 대한 니즈가 곳곳에 존재함을 우리는 확인해오고 있습니다. 기록을 보유한 개인이나 집단이 기록을 보유하지 않은 것보다 자신의 정체성과 고유성, 대체불가능한 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과정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기록의 내용과 맥락을 개인이나 집단이 스스로 오랜 시간 쌓아나갈 수 있게 도구를 제공하고 과정을 돕는다면 그것 역시 기록 전문가의 역량이지 않을까요?

 

 한편 우리는 빠르게 변해가는 정보매체, 정보 접근과 수록 방식, 기록 행위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거나/않으려 하거나, 데이터와 기록과 정보의 애매모호한 간극을 극복하지 못하고, 통일되고 통제 및 제어 가능한 환경에서 생산된 기록에 대한 수동적 기록관리만을 익숙하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요? 상상력과 기술을 이용해 만들어낼 수 있는 다양한 기록 행위가, 누군가의 납득과 수용이 가능한 형태로 생산되어야만 비로소 관리의 영역에 포함될 수 있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전문가의 시선에 서서 사람마다 제각기 달리 사용하는 기록이라는 이 단어에 대해서 냉철히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개개인과 집단이 경험하는 기록 행위와 패턴을 귀납적으로 읽어내고, 대중이 가진 기록에 대한 의미와 인식 체계,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효용가치를 새롭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기존에 기록이라 불렀던 관리의 대상과 무엇이 차이가 있는지 확인하고 현실에 맞게 현행화 해야 합니다.

 

 항상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동료 H과 가끔 이런 고민을 나눕니다. 우리는 기록의 중요성과 가치를 잘 알고 있지만 그닥 발휘할 수가 없어, 결국 기록 문화가 발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며 자조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 사회가 기록과 기록관리의 간극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명료한 단서를 하나 알려주었습니다. 공공기록물법을 비롯해 기록과 비슷한 영역에 있는 여러 법률의 제1조(목적)만을 모아봤습니다.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제1조(목적) 이 법은 박물관과 미술관의 설립과 운영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여 박물관과 미술관을 건전하게 육성함으로써 문화ㆍ예술ㆍ학문의 발전과 일반 공중의 문화향유(文化享有) 및 평생교육 증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도서관법] 제1조(목적) 이 법은 도서관 지식정보에 관한 국민의 알 권리 보장과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책임 등을 정하고 도서관의 운영과 서비스, 사회적 역할에 관한 기본적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국가 및 사회의 문화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공공데이터의 제공 및 이용 활성화에 관한 법률] 제1조(목적) 이 법은 공공기관이 보유ㆍ관리하는 데이터의 제공 및 그 이용 활성화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국민의 공공데이터에 대한 이용권을 보장하고, 공공데이터의 민간 활용을 통한 삶의 질 향상과 국민경제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국가유산기본법] 제1조(목적) 이 법은 국가유산 정책의 기본적인 사항을 정하고, 국가유산 보존ㆍ관리 및 활용에 대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을 명확히 함으로써 국가유산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국민의 문화향유를 통한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제1조(목적) 이 법은 공공기관의 투명하고 책임 있는 행정 구현과 공공기록물의 안전한 보존 및 효율적 활용을 위하여 공공기록물 관리에 필요한 사항을 정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도가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지는 못하지만, 기록계의 특성상 우리는 공공기록물법에 우리의 사명을 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 글은 공공기록물을 관리하는 일부가 아닌 한국의 기록계 전체에게 던지고 싶은 물음입니다. 당장 정답을 종용하고 주장하기보다 기록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을 달리 해보고자 합니다. 두서없음에도 불구하고 짧은 생각을 길게 쓴 이유는 기록학과 함께하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누구나 한 번쯤 고민했던 주제라고 믿기에 보다 자세히 문제의식을 나누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록'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독자 여러분의 생각과 방향성이 궁금합니다. 댓글이나 카카오톡 채팅방에 다양한 의견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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