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매우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한양도성-탕춘대성-북한산성이 연속유산(한양의 수도성곽(Capital Fortifications of Hanyang))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의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예비평가(Preliminary Assessment)에서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는 것이었다.(국가유산청 24.11.26.자 보도자료(「한양의 수도성곽」 세계유산 예비평가 결과 발표) 참고.)
한양도성의 세계유산 등재의 실패
사실 처음부터 세 유산을 하나로 묶어 등재 절차를 밟아온 것이 아니라, “한양도성”만 단독으로 등재를 진행했었다. 2012년 잠정목록 등재, 2016년 등재 신청서 제출 대상 선정을 거쳐 한양도성을 대상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신청서를 제출했다(문화재청, 「2014년 제2차 세계유산분과위원회 회의록」, 2014, 국가유산청 홈페이지 참고). 그러나 이듬해 ICOMOS로부터 한양도성의 세계유산 등재 “불가 권고” 의견을 받으면서 당시 문화재청(현재의 국가유산청)은 등재 신청을 자진 철회했다.(문화재청 17.3.21.자 보도자료(「한양도성」 세계유산 등재신청 철회) 참고.)
“불가 권고” 의견의 이유는 유산 관리 전통과 건축 유형 면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흔히 OUV라고 한다)’를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등재 신청을 “자진 철회”한 이유는 ICOMOS 심사에서 등재 불가 평가를 받은 유산을 그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올려 등재에 실패하면 해당 유산의 재신청이 불가능하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한양도성은 잠정목록 지위를 유지하는 선에서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국제 리그 출전을 접고 한발 물러났다. 이후 서울시는 한양도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를 발굴하기 위해 노력하여 2019년과 2020년에 등재 후보 선정을 신청했으나, 두 차례 모두 그 결과는 보류였다(얼굴에 점 하나를 찍어 보았으나, 바뀌는 것은 없었던 것 같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해답 : 유산의 통합 등재(연속유산)
그 사이 또 다른 성곽 유산인 북한산성도 2018년 국내 잠정목록 심의에서 부결을 받았는데, 이때 국가유산청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속유산으로 등재하는 방안이 대안으로 언급됐다. 이런 의견은 유네스코의 유산 등재 트렌드가 단독 유산보다는 연속유산으로 바뀐 것도 한몫한 것 같다. 어쨌든 위원회의 의견을 받아들인 서울시와 경기도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공동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준비에 돌입했고, 많은 학술 연구와 현장 조사, 국제 학술대회를 진행하며 정책 수립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의 연결고리, 탕춘대성
여기서 잠깐 두 성곽을 설명하자면, 한양도성은 서울의 내사산(백악, 타락산(낙산), 인왕산, 목멱산(남산))의 능선을 따라 쌓은 조선의 수도 성곽이고, 북한산성은 조선 후기에 북한산에 산성으로 쌓은 성곽이다. 두 성곽은 기능이나 성격 측면에서도 차이가 있고, 다들 알다시피 물리적으로도 각기 떨어져 위치한다.
그래서 이 둘을 연속유산으로 묶기 위한 논리적 장치가 필요했다. 바로 그 논리적 연결고리, 그것이 탕춘대성에 투여되어 있다.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하나의 기능 및 성격의 측면에서나, 물리적 측면에서나 하나의 체계로 연결하는 고리가 되기 때문에 두 성곽의 통합 등재를 위해서는 탕춘대성이 꼭 필요했다.
(〈도성연융북한합도〉《동국여도》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단순히 물리적으로 연결하는 성곽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조선의 중심인 왕도이자 수도를 공고히 지키고자 조선 초기에 축성된 한양도성과 조선 후기에 전쟁이 발생했을 때 임시 피난처로 축성된 북한산성은 그 목적과 의미가 완전히 다른 별개의 성곽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피난했던 남한산성이 도성과 거리가 상당히 멀기 때문에 이보다 가까운 거리에 임금을 비롯한 종사의 보전을 위한 보장처로 만든 것이 북한산성이었다. 이처럼 기능과 목적이 각기 다른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하나의 체계로 묶는 역할을 한 것이 탕춘대성이다. 즉,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의 통합 등재에서 탕춘대성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문제 제기: ’탕춘대성‘이란 명칭, 적절한가?
실제로 탕춘대성의 합류(?)로 한양도성-탕춘대성-북한산성은 “한양의 수도성곽”으로 국내 우선 등재목록 선정을 거쳐 등재 신청 후보에 선정되어 ICOMOS의 예비평가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의 요건을 충족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을 받아 등재 신청 대상의 절차를 밟아갈 예정이다.
그런데, 탕춘대성이라는 명칭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이 글을 쓰는 진짜 목적이 바로 이것이다). 탕춘대성의 이름은 연산군 대에 임금의 유흥을 위해 조성된 시설인 ‘탕춘대(蕩春臺)’에서 유래한다. 탕춘대가 어떤 곳이었는지 연산군 시기 실록 기사를 살펴보자. 탕춘대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연산군일기』의 기사는 총 3건이다.
1. 왕이 장의문(藏義門) 밖 조지서(造紙署) 터에 이궁(籬宮)을 지으려다가 시작하지 않고, 먼저 탕춘대(蕩春臺)를 봉우리 위에 세웠다. 또 봉우리 밑에 좌우로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돌기둥[石柱]을 세워 황각(黃閣)을 세우고 언덕을 따라 장랑(長廊)을 연하여 짓고 모두 청기와를 이으니, 고운 색채가 빛났다. 여러 신하들에게 과시(誇示)하고자 하여 놀고 구경하기를 명하였다.
『연산군일기』 61, 연산 12년 1월 27일 정미
2. 대비(大妃)에게 진연(進宴)하고 의정부(議政府)·육조 판서와 재추(宰樞) 1품 이상 및 승정원을 공궤(供饋)하도록 하였다. 잔치가 파하자, 왕이 탕춘대(蕩春臺)에 가서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와 전교하기를, "궐내에 출입하는 운평(運平, 기생, '흥청'이라고도 한다.)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밖에 전파해서는 안 된다. 만약 누설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엄한 법으로 처치하리니, 그 무리에게 알아듣도록 타이르라." 하였다.
『연산군일기』 63, 연산 12년 7월 2일 기묘
3. 왕이 미행으로 경복궁에 이르러 대비에게 잔치를 드리고, 잔치가 파하자 내구마(內廐馬) 1천여 필을 들이게 하여 흥청(興淸)을 싣고 탕춘대에 가 나인(內人)과 길가에서 간음하였다.
『연산군일기』 63, 연산 12년 7월 7일 갑신
위의 실록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탕춘대는 연산군의 유흥지 그 자체였다. 당시 공간의 성격은 ‘탕춘(蕩春)’이라는 이름 자체에서도 물씬 느껴진다.
그러나 탕춘대는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본래의 기능(?)을 잃고 잊혀져 갔다. 물론 탕춘대가 조성되었던 지역은 산세와 사천(沙川, 현 홍제천) 상류의 경관이 수려했기 때문에 문인들의 발걸음이 이어졌고, 그 결과 다수의 시(詩)가 남아있기는 하다.
그러다 탕춘대 지역이 역사 속에서 다시 급부상한 것은 연산군이 폐위된 1506년으로부터 약 190여 년이 흐른 후인 숙종 재위 시기이다. 그러나 숙종 때의 탕춘대는 더 이상 황음(荒淫)한 공간이 아니었다. 유사시 국가를 지키기 위해 조성된 보장처인 북한산성을 보조하는 공간으로서 위상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탕춘대성이 축조된 것도 이 시기 국가 방위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일이었다. 당시 성곽을 지칭할 대 연산군 시기의 명칭에서 유래한 '탕춘대성'이었지만, 성곽이 품은 지역의 성격은 이전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숙종 시기에는 관료들의 찬반 논쟁 때문에 탕춘대성의 축성이 끝을 맺지 못했고, 숙종에 이어 영조가 즉위했다. 영조는 탕춘대성을 이야기할 때 매우 중요한 임금이다. 탕춘대, 주변 지역과 탕춘대성이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면서 숙종 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새로운 정체성이 확립되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숙종 이후 시기의 탕춘대성에 대한 이야기는 문화유산의 정체성과 그 명칭의 문제 - 탕춘대성인가, 연융대성인가? (2)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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