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 최초의 기록물관리전문요원?!
약 2년 가까이 근무하던 공공기관에서의 계약 종료를 앞두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COVID-19 팬데믹 기간이라 그런지 채용공고가 거의 올라오지 않던 상황 속에서 우연한 채용공고 하나를 보았다.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계약직 직원을 뽑는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어떻게든 합격하여야만 했고... 결국 최종합격을 했다.
이 곳은 그동안 자체적인 문서관리(보관 - 폐기)만 하고 있었다. 당시 문서관리 담당자는 일반 행정직렬의 직원이었고, 그래서 난 기관 최초로 채용된 기록물관리전문요원(기록관리학 전공자)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큰 기관이고 아카이브를 구축하기 위해 직원을 채용하였기 때문에 최소한 사업을 통한 기반이 조금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그건 내 착각이었다. 하나도 없었다.
관련 규정은 ‘사무관리규정’에 있는 몇 개 조항이 전부였고, 분류체계도 ‘기능종별’과 하위 단계의 기능유형(기획·경영 관련 내용)이 끝이었다. 그 누구도 기관 문서고에 어떤 기록물이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당연히 기록관리시스템은 없었다. 멘붕 그 자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게 부여된 첫 일은 ‘연간계획’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아무 기반이 없는 이 곳에서 가장 필요한 일은 ‘기반 마련’이라 생각했고, 규정 제·개정과 비전자기록물 현황조사, 분류체계 개발(개선) 등을 추진하고자 했다. 물론 이 것들은 연간계획에 단 한가지도 반영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주어진 예산을 가지고 어떻게해서든 연말까지 아카이브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0순위라는 중간관리자의 의견 때문이었다.
주요 부서별 업무기능분석 및 사용 시스템 분석도 없었고, 시스템에 탑재할 기록의 목록도 없고, 시스템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능에 대한 파악도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중간관리자가 생각하는 아카이브시스템은 “그룹웨어 내 중요기록물 보존·관리 + 행정정보시스템 내 데이터 보존·관리 + 데이터세트 기록관리 및 서비스”였다. 정말 막막했다.
그렇지만 난 이 기관의 유일한 기록관리 전공자였다. 어떻게든 1년이라는 시간 안에 미션을 완수해야 했다. 그래서 최대한 중간관리자에게 타 기관의 아카이브시스템 기능을 설명하고 그를 설득하여 현재 보유하고 있는 예산 내에서 수행할 수 있는 범위를 인지시켰다.
지난 1년동안 생산한 전부서 전자문서 건목록을 입수해서 하나하나 분석하여 기관의 고유업무와 부서 공통업무 등을 구분했고, 몇몇 기관에 찾아가 기록연구사 및 아카이브 담당자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후 기록관리학 교수님과 아카이브 관련 전문가분들을 모신 자문회의를 추진하여 소중한 의견을 들었다. 또한 아카이브시스템 구축을 해본 적 없기 때문에, 야근을 하거나 퇴근 후 집에서 인터넷에 올라가 있는 각종 보고서와 제안요청서를 분석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라!
여러 아카이브 구축 사례(구축 과정 위주)와 현재 운영하는 아카이브시스템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조사하여 머릿속에서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지금 당장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였다. 이 해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기관에 필요한 기록관리 업무기능을 도출하고 시스템에 필요한 기능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또한 어떤 방식으로 시스템을 구축할 것인지, 어느 정도의 HW 및 SW, 어플리케이션이 필요하고 시스템 구축을 위하여 얼마의 예산을 들여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했다.
내부 연구과제로 아카이브시스템 구축을 위한 기반 만들기 과정을 시작했다. 학계에서 유명하신 민간기록 전문가 선생님을 연구책임자로 모시고 작은 연구팀을 꾸렸다. 내 역할은 ‘연구과제 수행+연구보조원 관리+연구과제 행정처리’이었기 때문에 매순간 정신이 없었다. 그렇지만 연구팀과 함께하는 순간에는 힘든 것도 잊을 정도로 좋았다. 결과물로 나올 연구보고서와 다음 해에 구축할 아카이브시스템만 바라보았다.
"연구원이 뭘 안다고!"
연구과제를 수행하면서 내외부 직원들을 만나고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실무TF 회의를 진행했다. 주요한 회의 참석자들은 기록관리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아카이브라는 단어는 조금씩 들어본 팀장들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10년 이상 근무한 중간관리자이고, 순환근무를 통해 자주 부서를 옮기며 다양한 업무를 해본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의 의견은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이들의 협조와 옹호/지지를 초반부터 바라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점점 기록관리에 대한 인식이 좋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연구원이 뭘 안다고!! 우리 기관의 업무기능을 분석한다는거죠? 필요성은 느끼지만 여기에 있는 우리도 못하는걸, 현장 업무를 하나도 안 해본 연구만 하는 사람이 어떻게 한다는 거죠?”
- TF 회의 중 모 팀장의 발언 -
연구팀에서 당시 받고자 한 의견은 ‘업무기능분석 기반의 분류체계’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한 팀장의 발언은 마치 기록전문가로 구성된 연구진을 무시하는 듯한 느낌을 들게 했다. 아무 기반도 없던 기관에서 어떻게든 아카이브시스템을 만들고 내부 기반을 다지기 위해 노력한 모든 것들이 헛수고가 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렇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우리 연구진은 어떻게든 과제를 잘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중단된 아카이브 구축 사업, 그리고 퇴사
이제 연구과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고, 다음 해 본예산에 아카이브시스템 사업 관련 예산이 배정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연초부터 비예산으로 수행할 여러 업무를 혼자 구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11월 말~12월 초 오후 5시 30분쯤 부서장님이 조용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불렀다. 이 기관에서 가장 아카이브에 대한 열정이 넘친다고 생각하고 개인적으로도 존경하던 분이었다.
“김기록 연구원 덕분에 기록관리에 대해서, 아카이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던 우리 직원들도 조금씩 관심을 가졌어. 이 연구과제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잠깐 중단되는 거야. 절대로 헛된 작업이 아니고 분명히 조만간 다시 추진될 거야. 그동안 노력해주어서 고마워.”
- 부서장과의 면담 中 -
그렇게 나는 계약 연장 불가 통보를 받았다. 당시 기관 내부 사정으로 인하여 잠정적인 아카이브 관련 사업이 중단되고, 이 때문에 나의 계약 연장이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이었다. 기관의 비영리적 사회 활동을 기록으로 남기고 잘 정리하여 디지털 아카이브로 보여준다는 생각에 모든 열정을 쏟았지만, 그 모든 것이 한 순간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부서장님의 말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다. 그리고 남은 근무기간동안 최대한 할 수 있는 것을 하고서 떠나기로 마음먹었고 퇴사 전날까지도 야근을 했다.
글을 마치며
난 사실 202N년에 석사학위를 받은 저년차 기록물관리전문요원이다. 짧다면 짧은 1년의 기간동안 한 기관의 기록관리 체계를 마련하고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여러 과정을 추진했다. 반면 몇개월 후 새롭게 채용된 분은 이미 다른 기관에서 아카이브 구축 경험이 있는 베테랑이다. 이 분이 만들어 주실 디지털 아카이브가 어떤 모습일지 한편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기관은 민간 단체/법인이고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이다. 그래서 앞으로 이 기관의 디지털 아카이브에서서 담을 기록정보콘텐츠가 우리 사회에 전해줄 모습을 상상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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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껄
많이 고민하고 힘을 쏟았다는 게 글에서 느껴집니다. 현명하게 사업 끌고가셨네요. 저는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게 지금도 많이 후회됩니다. 그래도 그때의 경험이 앞으로의 활동에서 어떤 식으로든 자양분이 될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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