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이었습니다. 박완서를 만난 것은.
지금은 태양이 뜨겁고 따갑고, 공기가 젖어 뜨거운 물을 끼얹는 느낌이라서.
오늘, 봄을 말하기에는 너무나 철지난 소리인 것을 잘 압니다.
그래도 다 저녁에, 집안 공기보다는 조금 차가워진 도봉산바람이
창으로 들이치는 이 새벽이라면
봄을 말할 용기가 나서.
지난봄에 박완서를 만나고 온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책보다 가까운 박완서아카이브

박완서는 1931년에 태어나 2011년에 죽었습니다.
십수년 전에 죽은 사람을 무슨 수로 만났단 말입니까?
그 자신이 스스로를 500년 산 것 같다고 해서 가능했을까요?
나를 스쳐간 문화의 부피를 생각할 때
500년은 된 것 같아요.
우리 할머니에 비하면
엄청난 체험 부피가
자꾸 울궈먹고 싶게 하거든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많던 싱아와, 나목과 함께 목마른 계절에 그 남자네 집에서,
박완서는 500년을 아직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찾아낸 그 비밀은 바로 기록에 있습니다.
방금 쓰고 놓은 것 같아 아직 온기마저 느껴지는 펜들, 종이들, 책장이 반질반질 닳은 장서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졌다는 책상에 나도 털썩 앉아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몸을 흔들흔들.
과연.
박완서를 담뿍 만났습니다.
책으로 만났던, 이야기로 만났던 그 사람보다 훨씬 가까이에서, 훨씬 긴밀하게 만났습니다.
한 사람을 아카이브로 만나는 맛이 이런 거였나 싶습니다.
일제강점기, 해방,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 한국전쟁, 산업화, 중산층, 20세기와 21세기, 1000년대와 2000년대...
박완서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은, 질곡의 널뛰기를 거듭해온 한국 근현대사의 시간과 나란합니다.
때문에 박완서아카이브는 작가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작가가 집필에 영감을 받았던 수많은 책들, 생전에 실제로 사용했던 물건들, 가족과 지인들과 오갔던 편지들, 일기와 사진들을 망라해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작품
박완서아카이브의 첫 관문은 역시 그이의 작품들입니다. 박완서는 1970년 첫 작품 <나목>을 시작으로 40여 년간 장편소설 15편, 중·단편소설 80여 편을 비롯해 다수의 산문집과 동화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뭐든지 조기착수가 미덕인 요즘의 세태에서, 다 살고 마흔이 넘어 쓰기 시작한 작가의 시작도 멋지고, 그 시작 이후, 죽을 때까지 어마어마한 양과 질의 창작을 해낸 것도 멋집니다. 그 경이로운 작업들을 그저 나열해놓기만 하여도, 말 다한 느낌.
#첫 소설집
박완서는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화가 박수근과의 일화를 다룬 <나목>이 당선되면서 등단했습니다. 그때 나이가 마흔이었습니다. 당시로서도 매우 늦은 등단이었는데, 첫 등단이 여성지였어서 과연 문예지에서도 원고를 청탁해줄까 하는 불안감을 갖기도 했답니다. 그러다 큰딸 호원의 지도교수였던 김윤식 평론가가 주선해 첫 소설집을 내게 되었습니다.
김윤식과는 그 뒤로도 계속 교류하면서 서로가 서로의 길동무를 자처했습니다. 더불어 김우종, 권영민 등이 박완서의 문학적 동료이자 연구자로서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만 개의 언어
1995년에 발표한 열두 번째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박완서 소설 가운데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다국적으로 번역된 작품입니다. 지금까지 13권의 번역서가 출간되었고, 12개국에서 10개 언어로 소개되었다고 합니다. 가장 많이 번역된 언어는 영어이고, 이어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멕시코어 등의 순으로 번역출판되었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가 가장 세계적인 이야기가 되는 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빛과 어둠, 대학과 전쟁
박완서는 1950년 5월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같은 해 6월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에 입학했습니다. 당시에는 문리대가 대학로 동숭동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채 한 달도 다니지 못하고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그 뒤로 다시 학교로 돌아오지는 못했습니다.
1951년 1.4후퇴 전후로 숙무와 오빠를 잃고, 박완서가 가장이 되어 어머니와 조카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처지가 되었던 겁니다. 1952년 미8군 PX(지금의 신세계백화점)의 초상화부에 취직했는데, 어두운 시기였지만 그때 박완서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두 인연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바로 박수근과 호영진이었습니다. 화가 박수근은 박완서의 첫 등단작 <나목>에서 '옥희도'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자전적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는 '박수근'이라는 동명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호영진과는 혼인의 연을 맺게 됩니다.
#결혼
박완서는 미군부대 PX에서 일하다 남편 호영진을 만났습니다. 결혼식은 1953년 4월 21일, 서울 중구 소공동 아서원에서 치렀습니다. 피로연까지 갖춘,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성대한 식이었다고 합니다. 이 결혼식의 모습은 박완서의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와 <그 남자네 집>에 재현되어 있습니다. 아카이브전시에서는 이 결혼식 실황을 담은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습니다.
#엄마
박완서는 종로구 충신동 62번지 한옥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네 딸을 모두 낳았지요. 이후 동대문구(지금의 성북구 보문동)로 이사하고 1963년에 막내아들 원태를 낳았습니다. 다섯 아이의 어머니로서 박완서는 평생 아이들을 보살피고 가르치는 데 정성을 다했습니다.
박완서는 사랑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찍고 인화해서 정기적으로 앨범을 만들어 둔 덕에 결혼과 출산, 자녀들의 어린시절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소중하게 보관해 온 앨범이 38권에 달한다고 합니다.
#일기
박완서는 2011년 1월 22일, 향년 80세 나이로 타계하기 이틀 전까지 일기를 썼습니다.
일기에는 대작을 '글쓰는 일'을 와중에도 밥을 하고 빨래를 돌리고 정원을 가꾸는 '일상의 일'을 멈추지 않은 생활인이자 작가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마감에 쫓긴 나머지 가족들과의 일정을 고사하던 날, 도시락을 날마다 챙겨보내고 빈 식탁에 원고지를 놓고 쓰던 날, 병을 얻고 이겨내려던 하루하루들, 작품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틈틈이 등장인물이며 세계관을 써넣던 짜투리 시간들이 이 성큼성큼한 글씨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이렇게 쓴 일기가 모두 11권입니다. 이 일기장이 한 장 한 장 꺼내어져 (물론 사본으로!) 낱낱을 살펴볼 수 있게 전시되어 있는데, 전시를 통틀어 가장 흥미진진한 대목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전업작가, 오로지 그 일을 하느라 삶의 다른 영역은 눈 닫고 귀 닫는 사람들을 만나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어딘가 한쪽이 고장난 사람 같은 느낌을 받곤 했는데, 박완서의 일기를 보면서 왜 그런지 깨달았습니다.
박완서는 밥을 차리고 상을 물리고 그 빈 자리에 원고지를 놓고 글을 써내려갔습니다. 작가이면서 엄마이고, 딸이고, 며느리고, 숙모였습니다. 그 어떤 삶도 다른 삶의 도구로 쓰지 않았습니다.
작가는 물론이고, 장사치도, 의사도, 판사도, 일이 대단하다고 먹고 누고 숨쉬고 하는 생명활동을 멈추는 법은 없는 것처럼, 글쓰는 사람도 먹고 누고 숨쉬고 애들 도시락 싸주고 정원을 가꾸는 일을 멈출 이유가 없다는 것을 박완서는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책상
엎드려서 글을 쓰다가 밥상을 놓고 글을 쓰니
이렇게 좋은 것을, 하고 좋아하던 게 엊그저께 같은
이젠 버젓하게 큰 책상에다 의자에 앉아서 쓴다.
40년간 글을 쓰고 책을 펴냈던 작가 박완서는 등단한 지 15년이 지난 1985년에야 처음으로 자기 책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들 원태와 함께 고른 것으로, 죽을 때까지 책상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이 책상이 그이의 처음이자 마지막 책상인 셈입니다.
책상이 있던 아치울 서재에는 문밖으로 살뜰하게 가꾼 박완서의 정원이 내다보였다고 합니다. 박완서아카이브 전시장에도 그러한 구조를 고스란히 재현해놓았습니다.
#방명록
박완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책상에 나도 가만히 앉아 봅니다. 그 자리에 앉을 수 있게 해 준 주최측에게 무한한 고마움이 입니다. 소설보다는 사실이 더 좋았던 저도, 이 전시에서는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박완서의 삶과 작품이 소중해졌습니다.
기쁨이 넘쳐 몇 글자 남겨 봅니다. 그날 하루에만 저와 같이 기쁨이 넘친 이들의 흔적이 여럿입니다. 많은 마음이 퐁퐁 샘솟았지만, 계절이 바뀌어도 마음에 남은 한 가지는,
일기를 쓸 때는 성큼성큼, 글씨를 크게크게 써야겠다는 거였습니다.
#전시는 8월 말까지
박완서는 1950년 봄이 막 왔을 때 서울대학교에 입학해 봄이 채 가지 않을 때 떠밀려 나갔습니다. 전쟁과 생활로 다시 학교에 가지 못했다가, 2006년 서울대로부터 명애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서울대학교의 '서울대인아카이브'의 일환으로 조성된 박완서아카이브전은 그 내용과 형식이 알차서 계속해서 사랑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벌써 두 번이 연장되어 8월 말까지 전시가 이어집니다.
제가 너무 샅샅이 다 말한 것 같지만,
실제 아카이브전시는 더 놀랍고 더 아름답습니다.
함께 전시되고 있는
서울대학교 보이는 수장고 조성 기념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우리 모두의 서재>
도 나란히 볼 만하고요.
펴낸 것에 비하면 읽은 것은 많지도 않고, 살아 있을 때는 한번 들여다볼 생각도 못했던 사람이었는데, 아카이브로 만나니 뭐랄까, 이제야 만난 느낌입니다.
한 사람의 아카이브가 이렇게 힘이 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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젬젬
보고 싶었던 전시인데 가질 못 해서 아쉽던 차에 뉴스레터로나마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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