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 공지사항

D.

기계제 생산을 마주한 '카메라를 든 사나이'

이형표 감독의 <우리의 공업>(1956)과 그 기록물들

2025.05.26 | 조회 770 |
0
|
from.
표본실의청개구리
기록과 사회의 프로필 이미지

기록과 사회

기록에 대한 모든 이야기

<우리의 공업>(1956)은 <서울의 지붕밑>(1961) 등으로 한국영화사에 잘 알려진 이형표 감독(1922~2010) 만든 기록영화다. 그는 신상옥이 설립한 한국의 최초의 영화사 신필름에 입사하여 기술부장으로 일하다 극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까지 영화 테크니션으로서 경력을 쌓는다. 경성사범학교와 서울대 영문학과에 다닌 그는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할 정도로 미술적 소양이 깊었다. 1949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주한 미공보원 영화과(USIS)의 영화 제작 보좌관으로 입사하여 영화 자막 번역 작업을 하고, 한국 전쟁 후엔 유엔 한국재건단(UNKRA)에서 일하면서 통역과 연출 조수를 맡게 된다. 특히 그는 녹음기사로 참여한 테드 코넌트(Theodore Conant, 1926~2015)와 교류하면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이후엔 <한국의 예술가(Korean Artist)>(1955), <위기의 아이들(Children in Crisis)>(1955)과 같이 당시 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다큐멘터리를 공동 작업하기도 했다. 1953년부터 이형표는 대한민국 공보처 영화과에서 기록영화 등의 제작을 담당하게 된다. 그러다 1955년 신상옥 감독의 극영화에 참여하다 61년에 신필름에 입하하기 전까지, 1950년대 초중반 약 5년 간 그는 공보처에서 기록영화를 만든다.

기록영화 <우리의 공업>은 UNKRA의 원조를 받아 공보처에 영화 기자재를 들여올 정도로 기술적인 전문성을 가지고 있던 테크니션이었고,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될 정도로 다큐멘터리적 촬영 기법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으며, 미술작가로서도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던 이형표 감독이 만들었고, 공보처가 이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프로파간다적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영화는 독특한 미학적 성격을 가진 영화가 되었다. 이와 관련되어 추가적으로 언급할 수 있는 흥미로운 비화 중 하나는, 1955년 <위기의 아이들> 제작시 이형표 감독이 이승만 정부의 전체주의적 교육을 비판하는 태도를 취하며 공동연출자로서 기명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56년 공업적 발전의 성과를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영화의 이미지들은 더 흥미롭게 다가온다. 당시 한국의 열악한 상황을 감안하자면, 기술적 성장과 발전에 대한 당시의 감각과 인식은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과 다른 차원의 문제일 수 있다. 

첨부 이미지
첨부 이미지
첨부 이미지
첨부 이미지
첨부 이미지

그렇다면 이형표 감독은 어떠한 조건 하에서 <우리의 공업>의 이미지들을 생산했을까? <우리의 공업>(1956)의 이미지들은 지난 글에서 대략적으로 살펴봤으니, 이 영화의 제작과 관련된 기록물들을 간략하게 훑어보자. 아래의 문서는 <우리의 공업>의 제작과 관련된 기록물이다. 단기 4289년인 1956년 10월과 12월에 걸쳐 대한영화사와 공보실, 그리고 공보실과 상공부 사이에 오간 문서들이다. 이 기록물들을 보면, 공보실이 영화를 어떻게 만드려고 했는지, 공장 선정과 이곳에 대한 촬영을 위해 상공부에게 어떻게 협조를 요청했는지, 대한영화사는 이를 만들면서 얼만큼의 예산을 사용했지, 영화 작업을 위해 촬영기사는 어떤 점을 요구했는지, 콘티와 내레이션을 어떻게 짜고 수정했는지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이 문서를 통해 볼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점은 공보실이 제일모방, 태창방직, 락희화학, 석산 나일론 공장, 고려제지, 흥아 타이어, 삼천리 자전거, 한국 화약, 삼척 시멘트, 문경 시멘트, 충주 비료공장, 영등포 조선중기공업, 장항 제련소, 삼척탄광 등의 공장을 선정하는 과정과 이 공장에 대한 촬영본을 편집하기 위한 순서, 이에 맞춘 내레이션 대본, 그리고 오프닝과 클로징 시퀀스 빼고는 공업 현장을 촬영하는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는 없다는 사실이다. 촬영 현장에서 어떤 방식의 지시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35mm 필름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영화를 촬영한다고 했을 때, 이미지 생산에 대한 권한은 연출을 책임지고 있던 이형표 감독이 쥐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공업>이 나타내는 기술적 숭고미를 내레이션과 편집이 차원이 아닌 무빙 이미지의 차원으로만 보자면, 이는 기계제 생산을 마주한 '카메라를 든 사나이'가 느꼈던 감정일 수도 있다. 

 

 

참고문헌

권용숙 (2019.01). 영화 테크니션이자 엔터테이너, 감독 이형표. 한국영상자료원 <KMDb>. URL: https://www.kmdb.or.kr/history/contents/2490

선전영화 대한의 새살림 (가제) 제1집 우리의 공업 제작의 건 (1956, 공보실 선전국 영화과) BA0791570(2-1). 국가기록원. URL: https://theme.archives.go.kr/next/movie/movieDtail.do?archiveEvntId=0052500951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기록과 사회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5 기록과 사회

기록에 대한 모든 이야기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로10길 6, 11층 1109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