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K-Pop)이 국내외에서 큰 주목을 받으면서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가 주목받고 있다. 특히 2021년 SBS <전설의 무대-아카이브K> 방영 이후, 우리가 즐겼던 대중음악도 우리가 살아온 일상과 역사를 기록하는 중요한 사료임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기 시작했다. 해당 방송프로그램이 방영된 다음 날 포털 검색창에는 ‘아카이브’, ‘아카이브 뜻’ 등의 검색어가 도배되기도 하였다. 이는 그전까지 ‘아카이브’란 단어는 대중들에게 낯선 단어였음을 반증하는 의미이며, 지상파 방송사가 기록의 중요성을 다루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해주는 경험이기도 하다. 지난 3월 15일 소극장 ‘학전’ 폐관을 앞두고 이러한 방송프로그램이 제작·방영되어 또다시 우리 시대를 기록한 대중음악에 대중들의 관심이 모인 바 있다. ‘학전’이 폐관되기 이전부터 제작되었다가 폐관 이후 4월 21부터 방송된 SBS 스페셜 3부작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2024, 이하 다큐 <학전>) 얘기다. 김민기 ‘학전’ 대표가 지난 7월 작고한 이후 7월 24일 추모방송으로 특별 편성되기도 하였다. 이미 공개된 지 좀 지난 방송프로그램이지만, 아키비스트들이 한 번쯤 되돌아볼 만한 시사점이 많은 작품이기에 이 글을 통해 그 의미와 가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침이슬> 등을 작곡한 故 김민기 대표가 1991년 설립한 ’학전(學田)‘ 소극장은 지난 33년간 이름 그대로 문화예술 분야 인재들이 성장할 수 있는 ’못자리‘ 역할을 해왔다. 다큐 <학전>은 소극장 ’학전‘을 비롯하여 한국 대중음악 관련 인물·장소·기억 등을 주제로 한 아카이브를 어떻게 수집하고 활용할 수 있는지 보여준 작품이다. 프로그램 제작에 합류한 제작진으로는 SBS <그것이 알고싶다> 이동원PD, MBC <놀러와-쎄시봉> 특집 등을 집필한 김명정 작가 등이 있다. 제작진은 지난 3월 15일 보도자료를 통해, “그동안 철저히 무대 뒤의 삶을 지향하며 방송 출연을 자제해 왔기에 김민기와 그가 일군 학전에 대해 제작되는 최초의 다큐멘터리가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해당 작품은 ’학전‘을 거쳐간 예술인을 비롯해 김민기 대표의 오랜 지인 등 100여 명이 김민기와 ’학전‘에 대한 기억을 인터뷰한 영상으로 구성되어었다. 유홍준(전 문화재청장), 송창식, 조영남, 김창남(노찾사/성공회대 교수), 임진택(연극연출가) 등 김민기의 오랜 지인들 뿐만 아니라, 박학기, 장필순, 강산에, 윤도현, 설경구, 황정민, 장현성, 이정은, 안내상, 이종혁, 김대명, 이선빈 등 ‘학전’이 배출한 아티스트들, 그리고 학전 스태프였던 강신일(총무부장), 정재일(음악감독) 등이 인터뷰이로 참여했다. 이에 따라, 다큐<학전>은 ’학전‘의 발자취를 아카이빙한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학전의 뒷것을 자처했던 연출가 김민기, 시대의 음악가로서 기억되는 음악인 김민기 등에 대해 조명하였다.
대중예술인의 기억의 터 ‘학전’
’학전‘을 거쳐 간 배우 중 한 명인 장현성 씨의 담담한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다큐 <학전>은 대중음악과 대중예술 아카이빙이란 작품을 관람하던 관객 등 제3자의 기억이 아니라 예술인들 스스로의 기록을 찾아가는 행위임을 보여주었다. 2023년 12월 31일 뮤지컬 <지하철1호선> 마지막 공연 이후 열린 ‘쫑파티’ 장면과 이에 참여한 배우와 스테프들의 현장 인터뷰에서 <지하철1호선>뿐만 아니라 ‘학전’에 상연된 여러 작품을 함께 한 이들이 공유한 기억을 읽을 수 있다. ‘학전’에서 공연을 앞두고 연습을 하면서 촬영되었던 연습 녹화영상과 과거에 공연된 작품을 녹화 영상 또한 큰 비중으로 활용되었다. 배우 설경구·황정민 씨 등은 각자가 <지하철1호선> 초연에서 연기했던 과거의 모습을 보며 젊은 자신을 낯설게 느끼기도 하고 당시에는 보지 못했던 모습을 새롭게 보기도 한다. 이 밖에도 김민기 대표가 출연한 SBS<주병진쇼>나 ‘학전’ 개관 2주년 기념 기자회견 등 뉴스프로그램이나 촬영원본 등이 다양하게 자료화면으로 활용되었다.
개인이 기억하는 김민기
다큐 <학전>에서는 음악인 또는 연출가 김민기에 대한 기억을 수집하는 한편 김민기 씨와 인연을 함께 한 개인의 기억 또한 중요한 비중으로 다루었다. 1970년대 김민기 씨와 함께 과거에 피혁공장 직원으로 일했던 곽기종 씨, 노래굿 <공장의불빛> 테이프 제작 작업에 참여하고 녹음된 노래를 부른 기억을 가진 공장노동자 장남수 씨와 YH무역 공장노동자 최순영 씨 등이 인터뷰이로 나섰다. 곽기종 씨는 인터뷰에서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음악 <상록수>는 사실 노동자 부부의 합동결혼식 축가곡으로 작곡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공장노동자이자 들불야학 선생님으로 활동했던 임낙평 씨는 동료 선생님으로 일하다 안타깝게 사망한 박기순 전남대 3학년생의 장송곡을 김민기 씨가 불러준 기억을 이야기한다. 김민기 씨가 반주와 녹음 혹은 녹화 장치도 없이 불렀기 때문에 이를 기억하는 임 씨의 인터뷰는 자신이 필요한 곳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김민기 씨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다큐 <학전>은 이처럼 예술가 김민기 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는 동료 김민기와 교류·소통한 다양한 개인의 기억을 다루었다.
"그 순간 그 노래는 그 사람들 것이긴 하죠"
다큐 <학전> 3부에서는 시대의 음악가 김민기와 어린이 연극 및 뮤지컬을 제작한 연출가 김민기를 다룬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故이한열 열사 노제에서 추모에 참여한 시민들은 <아침이슬>이 추모곡이자 민주화 운동을 위한 음악으로 부른다. 김민기 씨 또한 이 공간에 함께 있었는데, 자신의 노래를 거리에 나온 시민들이 부르는 광경을 보고 자기가 만든 창작곡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음악이 시민들의 곡이었다고 말한다. 대중문화 아카이빙이 창작자들의 저작권 등을 보호하기 위해서만이 아니고, 대중문화를 함께 즐기고 기억하는 이들의 기억을 저장하고 언제든 꺼내볼 수 있도록 해야 함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다음 세대에 전승해야 할 시청각 문화유산
한편, 다큐 <학전>에서 그 가치를 조명한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통해 시청각 문화유산(Audiovisual Heritage)의 개념과 범위를 이해할 수 있다. 노래굿 <공장의 불빛>은 1978년 한국도시산업선교협의회와 김민기가 제작한 노래굿으로 알려져 있다. 제작 당시 2천여 개 녹음 테이프 사본이 제작되어 노동조합, 대학, 종교단체 등에 배포되었다. 열악한 노동자 인권과 노동 환경을 고발하는 내용으로, 녹음테이프와 구전으로 전해지다 2004년 CD와 DVD로 출시되었다.
다큐 <학전>에서는 김민기가 이를 제작하게 된 과정에 대해 다루면서 제작에 참여한 노동자 장남수 씨와 최순영 씨, 당시 녹음실과 장비 등을 빌려 녹음을 함께 한 송창식 씨, 그리고 김민기 씨의 노래패 후배이자 대중문화 전문가 김창남 교수의 인터뷰를 통해 <공장의 불빛> 노래테이프 작품이 갖는 의미를 밝혔다. 이른바 ‘카세트(K7)테이프’로 알려진 공테이프는 비교적 저렴하고 접근성이 낮은 매체로서, 개인이 누구나 녹음하여 소장 가능하고, 여러 사람에게 전달과 배포가 가능하다. 이러한 매체와 녹음장비가 1970년대 우리 사회에 보급되면서 음악평론가 강헌 씨의 표현을 빌리면, 이른바 ‘한국 최초 비합법 언더그라운드’ 앨범이 제작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대중문화 아카이브를 논의할 때 특정 작품의 주제나 제작자, 연출가, 배우나 가수 등만 다루는 경우가 많은데, 다큐<학전>에서 다룬 <공장의 불빛> 노래테이프 사례를 통해 중장기적인 수집·보존과 다음 세대에 전승해야 할 시청각 문화유산 가치를 논의하는 데에는 이처럼 매체나 재생장비, 그리고 매체나 장비를 운용할 지식정보 차원도 인식해야 함을 알 수 있다. 1998년 호주의 원로 영상기록학자 레이 에드몬슨(Ray Edmondson)은 『영상아카이빙 철학』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공공 차원의 영상아카이브 보존을 논의할 때, 우리가 특정 작품을 위주로 논의하는 영상아카이브보다 포괄적인 범주화가 필요함을 주장하였다. 에드몬슨은 공공 차원에서 수집 및 관리되어야 할 대상은 ‘이미지와 소리를 녹화, 녹음, 송신·수신 및 인식, 이해하게 하는 장비 일체’와 이 장비를 통해 재생되는 ‘특정 길이로 제한된, 완결성 있는 콘텐츠’이다. 또한, 해당 콘텐츠의 생산 목적이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활용되었을 때, 그리고 결과적으로 공개되지는 않았어도 이를 목적으로 생산된 콘텐츠 일체는 공공 차원의 수집대상이 된다고 보았다(최효진, 2021).
이 글에서 다룬 다큐 <학전>은 지상파 방송프로그램 제작에서 기록영상의 활용 사례이기도 하다. 다양한 기록영상이 발굴되어 편집에 사용되었지만, 몇 가지 안타까운 점도 있다. <대한뉴스> 등 근현대사 기록영상이 편집에 활용될 때 매우 낮은 화질의 영상이 사용된 점, 그리고 국가기록원이나 서울기록원 등에서 찾은 공장이나 도시 모습 등을 담은 같은 사진과 영상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3부에 활용된 ‘국풍81’ 기록영상은 출처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특히 화질이 떨어진다. UHD방송 시대와 4K영화 상영이 가능한 시대에 뉴스프로그램과 같은 공공성 있는 기록영상이 여전히 과거 SD급 디지베타 테이프 자료를 변환한 영상이 제작에 활용되고 있는 점은 매우 아쉬운 점이다. 앞으로 활용 가능한 기록영상을 발굴하고 공개하여 다큐 <학전>과 같은 작품이 더 많이 제작될 수 있도록 아카이브 각 기관과 기록전문가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다. 지난 7월 극단 '학전'에서는 1991년 3월 개관 이후 소극장 무대에 올려 왔던 공연작, 김 대표의 작품 활동상 등 기록을 디지털로 보존하는 아카이브를 마련하고 저작권 관리도 맡는 사업체로 변모한다고 밝혔다. 이 작품을 계기로 우리 시대와 기억을 담은 대중문화 아카이브 자료가 적극적으로 수집, 관리되기를 기대한다.
덧1. SBS 스페셜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2024)는 SBS 홈페이지와 OTT WAVVE를 통해 볼 수 있다.
덧2. 지난 2024년 3월 17일 한국외대 정보기록학연구소에서는 SBS 스페셜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제작에 참여한 최정윤 (주)일일공일팔 대표의 강연을 온라인으로 진행한 바 있다. 강연영상은 연구소 유튜브 채널에 공개되어 있다.
참고문헌
최효진(2021). '공공영상문화유산'아카이브 구축 방안 연구:방송.영상 컬렉션 수집 및 활용 방향. 한국외대 정보.기록학과 박사학위논문.
Kofler, Birgit. (1997). “Legal Issues facing audiovisual archives”, In Helen P. Harrison 편. (1997). Audiovisual Archives : A Practical Reader. Paris:General Information Programme and UNISIST,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pp.43-54.
Edmonson, Ray. (1998), Une philosophie de l’archivistique audiovisuelle, Programme général d’information préparé par les membres de l’AVAPIN(Audiovisual archiving philosophy interest network), Paris: UNESCO.
Edmondson, Ray. (2016). Audiovisual Archiving: Philosophy and Principles (Third Edition). Bangkok: UNESCO Bangk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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