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예술레터(연대)

엄마의 플랜 B(Being)

‘엄마’라는 말을 내게서 떼어 놓고 불러보았다.

2024.03.01 | 조회 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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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예술

가부장제에서 막 빠져나온 여성이 자기 돌봄과 자녀 돌봄의 균형을 새로이 찾아가는 이야기, 지금까지와 다른 구성의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시도

새 천년의 초입에 많은 여성들의 마음 속에 깔린 가장 주된 욕구는 아마 욕구에 대한 욕구일 것이다. 자신의 진짜 욕구가 무엇인지 있는 그대로 밝힐 수 있을만큼 충분히 안전하고 안정되었다고 느끼고 싶고 그 욕구를 만족시킬 충분한 자격과 힘을 갖추었다고 느끼고 싶은 갈망 말이다.

욕구들/캐럴라인 냅

 

모아일체(母我一體), 엄마라는 비상벨이 울릴 때. 

ㅇ과 ㅁ을 가지고 놀던 옹알이를 거쳐 귀여움을 한껏 머금은 작은 입술이 ‘엄~마!’ 라는 호칭을 발화한다. 상호애착의 탄생, 그 첫 순간을 기억한다. ‘나는 당신이 필요해요.’ 대체할 수 없는 관계의 강력한 필요가 ‘엄마’라는 단어로 정의되는 순간, 나는 마치 그 역할이 내 존재 가치인 듯 그 옷을 바로 입었다. 모아일체(母我一體), 옷과 나는 점차 하나 되었다. 모성 역할 옷을 입는 순간 나는 개인적 욕구를 지우기 시작했다. 절제, 보류, 포기의 방식으로.

'엄마’ 라는 비상벨이 울리면 내 몸은 수신기가 된다. 아이 욕구에 즉답하기 위한 상시 대기 상태, 만성 긴장으로 이완이란 느긋한 감각을 지워버린 경직된 몸. '엄마’ 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차오르던 경이로운 기쁨은 희미해진지 오래, 무수한 욕구들을 응축한 '엄마'라는 호칭은 듣기만 해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경고음이 되었다. 엄마라는 경고음에 눌리면 불안과 지긋지긋함이 피부 밑에서 지글거리기 시작한다. 움직이기도 전 이미 구조에 임할 준비를 마친 긴장 가득한 몸이 한 발 내딛기를 저항한다. 그것도 잠시, 피로의 무게를 진 발은 숨쉬기를 잊은듯 가쁘게 움직일 것이다. 

이번엔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나, 실은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모르는 예측불가능한 혼돈으로 뛰어들 용기가 남아있는가. 마음 속 동요를 감추고 평온한 척, 괜찮은 척, 담담한 척, 자제력을 그러모아 완전히 연소시켜야 할 상황이 한 치 앞에 있다. 이번엔 적절히 반응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러지 못할 것이다. 이미 소진된 몸은 혼란의 파도를 함께 타며 휘청이겠지. 인내심과 차분함을 잃은 모습을 무방비하게 노출하겠지, 그런 자신을 보며 실망하고 자책하겠지, 왜 이런 상황에 혼자인거지 분노하겠지. 결코 완수하지 못할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온 몸을 억압하다가 마침내 폭발하고 탈진하겠지. 이 고통을 앞으로도 무수히 반복할 생각에 절망하겠지. 이게 바로 모아일체(母我一體)의 몸이다.  

지난 1월 말, 결혼졸업여행으로 3박 4일 홀로 여행을 떠났다. 별거기간 동안 1년에 한번은 친구를 만나러 갔다. 절제의 일상이 모든면에서 습관으로 자리 잡은 시기였음에도 이 여행을 위한 시간만큼은 확보했다. 그건 우정이 나의 두 어깨를 감싸 안아 모아일체가 된 기진한 여자에서 특별한 여성인 자신을 되돌려주었기 때문이다.  

여행 첫날 저녁 숙소로 가는 길, 서울에 올 때면 찾는 독립서점에 들렀다. 이미 여행을 함께 할 두꺼운 책 한권을 챙긴 터에 기력도 없었으니 이번엔 둘러만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샛노랑 표지에 광택을 빛내고 있는 책 한권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는데 바로 데버라 리비의 <살림비용>이었다.  갓 결혼졸업을 마친 기력없는 여자였던 나는 그 책에서 '기진한 여자'를 찾았고 그 단어를 갈피 삼아 여행의 남은 날들을 보내기로 했다. 

남자와 아이의 안위와 행복을 우선 순위로 두어 오던 가정집이라는 동화의 벽지를 뜯어낸다는 건 그 뒤에 고마움도 사랑도 받지 못한 채 무시되거나 방치되어 있던 기진한 여자를 찾는다는 의미다. 

데버라 리비/살림비용

책을 구입하려는데 뜻밖에 4천점의 포인트가 쌓여있어 만원의 행복을 누렸다. 덕분에 책값을 치르는 과정은 특별한 의례처럼 느껴졌는데 두가지 내면의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하나는 앞으로 매년 홀로 여행 할텐데 책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 참새인 자신을 마침내 받아들이는게 어떠냐는 소리로 다음 여행에는 반드시 빈 가방으로 책방에 들를 것! 이란 다짐을 일으켰다. 또 하나는 '결혼졸업을 축하합니다. 책벗님, 이 책과 함께 새로운 삶을 꾸려갈 기운을 회복해 보세요. 파탄한 건 가정이 아니라 가부장제가 지어낸 이야기 입니다. 대안이 될 이야기를 새롭게 써가는 힘겨운 싸움을 해갈 당신이 <살림비용> 을 기꺼이 치르고 그간의 배역을 벗은 자신을 새로이 확보  하기를 적극적으로 권합니다.'라는 인정어린 응원 소리 였다. 

데버라 리비는 내가 결혼과 출산, 별거, 양육, 이혼이라는  방치의 서클 에서 어떻게 기진한 여자가 되어 갔는지를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정치적 문제로 바라 보게 이끈다. <살림비용>이 생활자서전 2부라면 1부 <알고 싶지 않은 것들>에서는 여성이 자신의 삶의 활력 가운데 상당량을 아이와 남자들을 위한 가정을 꾸리는 데 투입함으로써 기진한 여자가 되어가는 과정이 사회구조가 정치화한 ‘어머니’라는 망상의 결과임을 밝힌다.  

온 세상이 죽도록 상상해온 '여자'가 '어머니'였다. 향수에 젖은 환상으로 우리 삶의 명분을 바라보는 이러한 현상을 재조율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작 우리부터가 어머니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온갖 활개 치는 환상을 품고 있었으며, 한 술 더 떠 그에 못 미치거나 실망을 주고 싶지 않다는 욕망을 저주처럼 달고 있었다.  '사회 구조'가 상상하고 정치화한 '어머니'는 망상임을 미처 납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세상은 어머니보다 이 망상을 더 사랑했다.  

데버라 리비/ 알고싶지 않은 것들

데버라 리비는 <살림비용>에서 남자가 쓰고 여자들이 연기해 온 이 여성성이 21세기 초입에도 여전히 기웃거리는 기진한 유령이라고 명명함으로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하는 여성성의 신화가 아직도 잔존함을 실감하게 한다. 

여성성이라는 유령은 허상이자 망상이자 사회적 환상이다. 연기하기 매우 까다로운 인물이며 그 역할(희생, 감내, 고통의 와중에도 발랄함을 잃지 않기)을 연기하다 끝내 이성을 잃고 만 여자도 수두룩했다. 그런 이야기라면 결단코 다시 듣고 싶지 않았다. 

데버라 리비/살림비용

리비가 말한 이성을 잃고만 여자들의 감정적 상태를 에세이스트이자 저널리스트였던 저자 캐럴라인 냅은 <욕구들>에서 분노서린 피로로 포착한다. 

지금의 나는 그 뼛 속 깊이 느껴지는 기진맥진함이 거의 전적으로 감정적인 피로였음을 안다. 그것은 사람이 주고 또 주고도 자신의 몫으로는 거의 아무것도 받지 못했을 때 느끼는 분노 서린 피로다. 

캐럴라인 냅/욕구들

'여성은 왜 원하는가' 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욕구들>은 저자가 거식증으로 고통받았던 시절을 회고하며 식욕, 성욕, 애착, 인정욕, 만족감 등 여성의 다양한 욕구와 사회 문화적 압박에 대해 정밀하게 발굴해 언어로 펼쳐낸 책이다. 분노 서린 피로는 이 책에서 주목하는 여성들이 겪는 대표적인 심적혼합물이다. 캐럴라인은 여자들이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이 어두운 감정들은 여자들이 태어나 자라는 동안 줄곧 주입 받은 '남자는 먹고 여자는 먹인다.'는 규칙이 학습된 결과물이라고 단언한다.

어머니의 어머니가 너무나도 열렬히 고수하고 지지했던 명령들_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었고 나는 어머니나 그 시대의 많은 여성들이 그랬듯 중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태였을 것이라고 또 어머니도 마음 한 편에서 어떤 규칙들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들(구체적으로 말해 아내들과 어머니들)은 뒤로 물러나 남들의 뜻을 따라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고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할지 예상해야 하며 자기 존재의 정의를 가족을 통해서 찾아야 하고 그리고-어쩌면 무엇보다-자신의(사랑, 일, 성적표현)추구들을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고 그들에게 반응하는 일로 전환해야 한다는 규칙말이다. 

캐럴라인 냅/욕구들

3살 터울의 두 자녀 돌봄에 한참인 ‘엄마’ 하는 나는 사회적 망상을 착실히도 학습하여 아주 쉽게 ‘모아일체(母我一體)’가 되곤 한다. 차 마시기, 산책 하기처럼 무위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갈망이 올라올 때마다 죄책감이 그 뒤를 스멀스멀 따라온다. ‘내가 엄마로서 이런 시간을 가져도 되나, 아이들과 더 놀아주는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게 아닌가.' , '주말에 너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게 말이 되니? 그럼 아이들은 누가 돌보겠어. 아이들이 엄마를 필요로 하는 시기인데 하고 싶은 것들은 나중으로 미뤄야 하지 않겠어? 왜 엄마로서의 역할 만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거니.’ 이런 죄책감이나 자기비난은 엄마라는 역할을 제외하고 ‘독립적 개인으로서의 나’의 욕구와 ‘엄마 역할을 하고 있는 나’의 욕구 충돌이 일어날 때 나타난다. 그리고 그 충돌 상황에서 대체로 이기는 건 이타적인 욕구가 아름다운 욕구라는 모성에 비대칭적으로 주입된 명령들이다. 의식적으로 검토하다보면 원하지도 동의하지도 않을 헌신적 모성이라는 무의식적인 여성성/모성은 너무도 쉽게 욕구 충돌 순간에 나를 장악한다. 그러나 기진한 여자와 분노서린 피로 사이를 빈번히 오가다 보면 결국 반응을 거부하는 몸을 직면하게 된다. 

무언가를 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원하는 몸이 반응하지 않을 자유를 갈망한다. 언제나 끝과 시작이 가장 힘든 법, 침대 위에 비로소 누인 몸이 다음 날에도 일어나지 않는다. 깨어나면 해야할 연쇄적 돌봄노동이 그려져 압도된다. 내가 기꺼이 입은 모성 역할옷은 언제 이렇게 무거운 갑옷이 되었지. 숨도 못 쉬겠네. “엄마, 일어나!” 꿈쩍도 안하는 몸, 마침내 하루의 시작마저도 거부하는 몸을 목도한다. 모아일체-수신기 고장. 이제 침대 위에서 깨어나야 할 것은 새로운 여성성/모성이다. 

 

투명 아이, 엄마
 투명히 빛나며 반짝이던
 경이로운 감탄의 무지개도
 모두 잠든 밤, 홀로 뒤틀거리며
 날카롭게 찌르던 눈물의 가시도

 순간, 얇은 막이 되어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나는 그 옅어진 투명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엄마구나.’
 나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아이에게 숨을 불어넣어주고 싶었다.
 그 아이에게 온기를 주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다면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내게서 떨어진 막을
 핥아주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에게 말했다.
 ‘엄마’를 소중히 대해줘.
 ‘엄마’가 너희들을 도와줄 수 있게
 너희들도 ‘엄마’를 도와줘.

 하루의 해변을 걸어
 감사의 조약돌을 주어
 아이들 작은 손에 살포시 건네듯
 꼭 똑같이
 투명 아이 엄마에게도
 감사의 조약돌을 주었다.

 아이는 처음 받은 조약돌을
 발그레하며 움켜쥐었다.

 

To. 모두 다 돌봄예술가!

'엄마’라는 말을 떼어 놓고 불러보았습니다. 마치 한 명의 또 다른 아이의 이름처럼. 계속해서 관심을 기울이고 돌보고 사랑으로 대해야 하는 소중한 한 존재(Being)인 엄마를.

캐럴라인 냅은 <욕구들>에서 자신의 가치를 다른 사람에게 양분을 공급하는 일과 갈등을 피하고 자기의 필요와 실망을 감춰둔채 남들을 기쁘게 하는 일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학습 했던 과거의 어머니 세대로부터 우리를 구조합니다. 

어머니가 능동적이고 욕망하는 존재, 힘있는 존재, 목소리있는 존재라면?

자신만의 진정한 열정과 독립적인 욕망을 지닌 여자는 어떤 모습일까?

'먹이다'라는 말의 모든 의미에서 자신의 가족에게 먹이는 만큼 자신에게도 충실하고 한결같이 먹이는 여자는 어떤 모습일까? 라는 그녀의 질문들은 사회적 망상이 아닌 주체적 존재로서 대안적 존재 방식, 새로운 여성성/모성에 대한 상상력을 열어줍니다.

3월 1일, 모아일체-수신기가 고장난 내 몸을 목도하며 애도합니다.

데버라 리비를 통해 발견한 '기진한 여자'가 이제는 책임감과 의무감을 비우고 자신의 존재를 되찾기를. 캐럴라인 냅을 통해 발견한 '분노서린 피로'가 충분한 쉼과 휴식을 통해 씻겨 나가기를. '투명아이, 엄마'로 호명한 대안적 여성성/모성성이 숨 돌리는 틈새, 분리와 연결의 균형잡기 시간과 함께 꾸준히 모색되기를.

오늘, 엄마하는 나를 위한 플랜 B를 선언합니다.


엄마하는 나를 위한 플랜 B

하나. 충분한 존재감을 위하여(Being)

     책임감 안에 의무감을 비우고 존재감을 채워라. 

둘. 조화로운 감정을 위하여(Breathing) 

     들숨과 날숨, 숨 돌리는 순간들을 통해 깊은 호흡을 되찾고 나 자신과 연결을 회복하자. 

셋. 균형잡힌 욕구를 위하여(Balance)

     자녀의 욕구만큼 나 자신의 욕구도 충분히 충족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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