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월, 스페셜 레터에서 들려드릴 이야기
이번 달 스페셜 레터에서는 에듀테크를 '사용하는 사람'에서 '만드는 사람'으로 진화한 서울 서이초등학교 제수연 선생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교실 현장에서 선생님은 어떤 문제를 발견했고, 왜 직접 에듀테크를 만들게 되었을까요?
제수연 선생님의 고민과 실험 이야기를 지금 만나보세요!
✍️ From. 제수연 선생님
📚 교과서엔 있는데 교실엔 없는 것
5학년 실과 「동물 기르기」 차시에서 교사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대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영상과 사진으로 설명하고 넘어가는 길입니다. 안전하지만 돌봄이라는 경험은 빠져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실제로 길러보는 길입니다. 작년에 옆 반에서는 장수풍뎅이를 길렀습니다. 그러나 주말과 연휴의 관리가 만만치 않았고, 키우던 곤충이 죽으면 그 일을 수업에서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경험은 분명했지만, 그 경험이 어디로 흘러갈지는 교사가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영상은 안전했지만 경험이 부족했고, 실제 사육은 경험이 분명했지만 예측하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찾던 것은 그 두 가지의 중간 지점이었습니다. 돌봄의 경험은 실제로 일어나되, 그 흐름의 큰 줄기는 교사가 설계할 수 있는 형태였습니다. 그런 도구는 시중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 한 시간 만에 만들고 며칠에 걸쳐 고친 게임
제가 만든 것은 반려견 돌봄 시뮬레이터입니다. 학생은 강아지를 입양하려는 보호자가 되어, 데려오기 이전의 준비 단계부터 시작합니다. 가족의 반대를 설득하고, 생활 환경을 점검하고, 필요한 물품을 갖춘 뒤에야 강아지를 데려올 수 있습니다. 그 뒤로는 강아지가 한 살일 때부터 늙을 때까지 견생 전체를 돌봅니다.
이름을 직접 지어주고, 매일 산책과 식사, 위생 관리를 선택하며 행복, 포만, 청결, 체력 상태를 살핍니다. 그렇게 쌓인 선택이 강아지의 일생을 만들고, 마지막에는 그동안의 돌봄에 따라 엔딩이 갈립니다. 네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만 소홀해도 좋은 엔딩에는 닿지 못하도록 해 두었습니다.
설계에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입양 이전 단계입니다. 반려동물을 다루는 콘텐츠는 보통 강아지를 데려온 다음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차시가 가르치려는 것은 귀여움이 아니라 책임입니다. 강아지를 좋아하는 마음과 한 생명을 끝까지 책임지는 일은 다르고, 그 차이는 설명만으로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데려오기 전에 따져야 할 것들을 먼저 겪게 한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만드는 과정 자체는 길지 않았습니다. 실과 교과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챗지피티로 활동의 뼈대를 잡고, 클로드로 코드를 작성했습니다. 처음 작동하는 형태를 갖추기까지 한 시간 남짓 걸렸습니다. 시간이 걸린 것은 그다음이었습니다. 실제로 강아지를 기르는 동료 선생님들께 보여드리고, 어떤 상황이 현실과 다른지, 어떤 선택지가 빠졌는지, 어떤 결과가 과장되었는지를 들으며 고쳐 나갔습니다. 그 일이 며칠 이어졌습니다. 현장의 경험을 모아 다듬어 가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습니다.
🐶 쿠키가 벌써 노견이 됐어요
수업에서 학생들은 강아지의 상태에 곧바로 반응했습니다. 한 아이는 ‘초코가 밥먹으니까 행복하대요, 너무 귀여워요.’ 하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다른 아이는 시간이 흐른 뒤 ‘쿠키가 벌써 노견이 됐어요. 슬퍼요.’ 하고 말했습니다.
노견이라는 말이 죽음을 떠올리게 할지 모르지만, 이 게임에서 강아지는 죽지 않습니다. 강아지는 아기 강아지에서 활발한 강아지를 거쳐 지혜로운 노견으로 늙어 가고, 노견은 그 성장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그런데도 아이는 노견이 된 강아지를 보며 시간이 흘렀음을 실감하고 아쉬워했습니다. 저는 그 반응이 이 차시가 본래 겨눈 자리에 닿아 있다고 보았습니다. 돌봄에는 시작과 한창때와 노년이 있다는 것, 한 생명을 처음부터 끝까지 곁에서 책임진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아이가 짧게나마 통과했기 때문입니다.
엔딩은 그동안의 돌봄이 누적된 결과에 따라 갈라집니다. 이 게임에서 학생들은 돌봄의 성실도에 따라 ‘반려인 자격 박탈’ 엔딩과 같은 실패를 겪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설정이 제가 담임이었기에 내릴 수 있던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널리 파는 제품이었다면 아이가 실패하거나 속상해하는 경험은 가능한 한 덜어냈을 것입니다. 어느 교실에서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알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책임을 가르치려면 행동에 따른 결과를 맞닥뜨려야 합니다. 우리 반의 아이들을 알고 이 차시가 무엇을 건드려야 하는지를 가까이에서 보고 있었기에, 저는 실패가 있는 게임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문제가 일어나는 자리와 그것을 푸는 자리가 같았던 셈입니다.
🤔 내가 원하던 에듀테크는 왜 없었을까?
저는 기성 도구를 충분히 써온 교사입니다. 특히 배틀 퀴즈 플랫폼을 즐겨씁니다. 다만 형식이 늘 같다 보니 결국 단순한 퀴즈가 되고, 그 형식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매번 앞섭니다. 다른 도구로 퀴즈나 방탈출을 꾸려도 무료로 쓸 수 있는 폭이 좁았고, 무엇보다 제가 끌고 가려는 이야기를 끝까지 밀어붙일 수 없었습니다. 정해진 형식이 그대로 한계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제가 교실에서 마주한 문제들은 대부분 너무 구체적이었습니다. 인권의 의미를 설명이 아니라 경험으로 만나게 하는 일, 관용표현을 지루해하는 아이들을 붙드는 방탈출, 영양소를 흥미롭게 익히는 게임, 출처를 왜 밝혀야 하는지 직접 겪게 하는 활동, 익힘책을 일찍 끝낸 아이들이 기다리는 대신 몰입할 수 있는 수학 게임.
초등 5학년 실과의 「동물 기르기」 차시에서 개를 기를 수 없다는 문제를 해결해 줄 회사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시장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반의 담임에게는 그 문제가 바로 그해에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내가 원하던 도구가 없었던 까닭은, 그 도구가 시장에 비해 너무 작은 자리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려견 게임이 감정과 책임을 다뤘다면, 결이 다른 경험도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인생 게임을 하던 중에 아이들이 스스로 논쟁을 시작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가족이 있지 않으냐는 편과, 나라가 있어야 가족도 지킨다는 편으로 갈렸습니다. 교과서에서 글자로만 읽던 식민지의 삶이 그 순간 아이들의 입에서 토론으로 살아났습니다. 우는 일도 따지는 일도 본래 교과서 안에서는 글자에 머무릅니다. 교과서 속 글자를 경험으로 바꾸는 일은 대개 그 교실의 사정에 맞닿아 있어서, 기성품으로는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 맞춤형 에듀테크와 제도의 한계
여기까지면 교사가 만들면 다 풀린다는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만드는 만큼 다른 벽이 따라옵니다.
한번은 학생들이 실시간으로 응답을 주고받는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사용량이 늘자 서버 한도가 금세 찼고, 계속 운영하려면 비용을 내야 했습니다. 결국 그 게임은 접었습니다. 만들 수는 있어도 꾸준히 굴릴 여건은 없었던 것입니다. 수업 준비에 쓰는 인공지능 도구의 구독료도 개인이 부담하고 있습니다. 맞춤형 수업을 해보려 해도, 정작 필요한 지원은 비어 있고 방향이 다른 지원만 주어진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제도와 관련해 한 가지를 더 짚고 싶습니다. 학생이 사용하는 학습지원 소프트웨어는 사전에 학교운영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합니다. 학운위는 몇 달에 한 번 열립니다. 오늘 만든 것을 오늘 수업에서 쓸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는 한편으로 교사를 위한 개발 직무연수는 활발히 열립니다. 교사의 개발 역량은 장려하면서도, 그렇게 만든 도구를 실제 수업에 적용하는 과정에는 여전히 긴 절차가 남아 있는 셈입니다.
심의가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새로운 기술을 들일 때 교육적 효과와 개인정보 보호, 학생의 안전을 함께 따지자는 취지에는 공감합니다. 다만 검증의 잣대가 하나뿐이라는 점이 걸립니다. 여러 학교가 오래 쓸 상용 제품을 살피는 절차와, 한 교사가 자기 반 한 차시를 위해 만든 일회성 도구를 살피는 절차가 같습니다. 제가 만든 게임은 대개 그 반, 그 차시의 것이라 한 번 쓰고 나면 다시 쓸 일이 없습니다. 수업 중에 아이들이 빈틈을 찾아내 고쳐 두어도, 더 나아진 판본은 늘 이듬해 아이들의 몫입니다. 해법은 그 교실만큼 작은데 절차는 시장 제품의 크기에 맞춰져 있을 때, 교사는 만들기 앞에서 한 번 더 망설이게 됩니다.
방금 빈틈이라고 했지만, 아이들이 그 빈틈을 찾아내는 모습에는 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정답 버튼을 빠르게 연타해 점수를 중복으로 쌓거나, 힌트 버튼을 거듭 눌러 선택지를 하나씩 지운 끝에 문제를 풀지 않고 답에 이르는 식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아이들은 주어진 것을 그대로 받는 대신 그 안의 규칙을 살피고 시험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쓰는 사람에서 만드는 사람으로 한 걸음 옮겨간 것처럼, 아이들도 그 게임 앞에서 비슷한 걸음을 떼고 있었습니다.
💡 마지막으로 남는 생각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말해 둡니다. 경험하게 하려고 만든 게임인데, 어느 순간 아이들이 친구나 교사와 이야기하는 대신 각자 화면에만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머릿속에서는 많은 것을 느끼고 있었겠지만, 교실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주고받음도 그만큼 중요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모둠이 함께 겪는 게임, 토의를 전제로 교사가 진행하는 게임을 만듭니다. 일제강점기 게임에서 아이들이 저절로 논쟁하던 그 장면이, 어쩌면 처음부터 제가 닿고 싶었던 자리였습니다.
이 글은 교사도 코딩을 배우자는 주장이 아닙니다. 모든 교사가 개발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이 사례를 지나며 한 가지가 분명해졌습니다. 좋은 수업 도구는 기술이 아니라 문제에서 출발하며, 그 문제 앞에 가장 가까이 선 사람이 이제는 그 도구를 직접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그다음으로 넘어갑니다. 교사가 만들 수 있게 된 시대에, 학교와 제도는 그 만듦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만들기를 권하는 속도와 만든 것을 쓰게 하는 속도가 같은지, 한 교실만을 위한 작은 도구에는 어떤 검증이 맞는지를 이제는 함께 따져볼 때입니다. 저는 아직 답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수업이 끝난 뒤 ‘쿠키가 벌써 노견이 됐어요’라고 말하던 학생의 표정은 기억합니다. 교과서를 읽고, 동영상을 보고 난 얼굴이 아니라, 한 생명을 오래 돌본 것 같은 아쉬움이 그 얼굴에 남아 있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만들고 싶었던 것은 번듯한 게임이 아니라 그런 몰입의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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