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80 시간) 동안은 물과 소금만, 이후 4일 동안은 보식을 했습니다.
1일 차
일상적인 배고픔. 별다른 괴로움은 없다. 평소에도 밥을 잘 안 챙겨 먹기 때문에.
의사 면허 있는 친구에게 7일 단식한다고 했더니 24, 36시간 단식부터 해보란다. 그런 건 어려서부터 귀차니즘이 많이 시켜줬기 때문에 건너뛰었다.
그런데 아뿔싸. 일상이라고 했지만 음식 냄새만은 황홀했다. 카페에서 카모마일 차를 한 잔 시켰다. 내 앞의 주문은 크로플과 아이스크림과 아이스 아메리카노. 음식이 준비되는 걸 보며 킁킁 냄새를 맡는데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우리는 정말 그걸 다 먹어야 하나? 싸구려 도파민에 지나지 않는 것들을 몸 안으로 밀어 넣는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함은 절대 아닌 것.
천상의 음식, 크로플.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넥타르를 탐낸 인간의 최후는 처절했다.
왜 종교적인 이유로 단식을 하는 줄 알겠다. 내 육신의 한계가 절절히 느껴진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지나친 풍요를 누려왔나. 감사함이 뼈에 새겨진다.
2일 차
종이 인형처럼 나풀대다 풀썩 침대에 쓰러진다. 속이 메스꺼워서 먹고 싶다는 생각은 아예 들지 않는다. 어지럽다. 빈혈약 먹고 단식 시작할걸. 손발이 저리고 살짝 식은땀이 난다. 같이 단식 중인 애인은 차분히 먹방을 보고 있다. 음식 포르노 소리를 듣으니 토할 것 같다.
어지러울 때마다 소금을 꼬집어먹었다. 더럽게 짰다. 나는 '체지방 늘리세요' 진단을 주로 받는 멸치이기 때문에 살짝 걱정도 된다. 하지만 오토파지 원해요. 세포가 먹을 게 없으면 주변의 늙고 병든 세포를 잡아먹는다고 한다. 세포 단위로 굶기려면 나라는 세포 총집함은 얼마나 굶어야 하는 걸까. 내 몸을 리셋하고 싶다는 욕심에 시작했다.
나의 모든 움직임이 엄청나게 느려진다. 생각의 속도도. 신체 기능의 몇 퍼센트까지 발휘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일상생활을 해줘야 효과가 있다는데. 움직임 자체가 고역이다. 해가 지면 산책을 해야지.
신체 나이를 거꾸로 돌려준다는데 왜 단식하는 사람이 많이 없는지 알겠다. 토할 것 같다. 눈꺼풀이 무겁다.
3일 차
아침에 일어났는데 어제보다 훨씬 몸이 가벼웠다. 심장이 두근두근대는 건 똑같다. 꾹-꾹- 눌러서 뛴다. 어이 심대리 욕봤네 더 이상 어지럽고 메스껍지 않다. 대신 배고픔이 찾아왔다. 단식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배고프고 뭐든 먹고 싶었다.
벌떡 일어났다가 몇 걸음 걷고 풀썩 쓰러졌다. 중심을 잃었다. 웃긴 건, 그렇게 쓰러지고 나니 몸이 진짜로 생존 모드에 돌입했는지 에너지가 넘쳤다. 음식을 먹을 때 보다 활기가 돌았다.
처음 단식을 시작할 땐, 귀찮게 뭐 준비해서 먹고 치우고 양치하고 안 해도 되니까 개이득이다!라고 생각했는데, 그야말로 굶어본 적 없는 사람의 '다른 나라 이야기'였다.
나는 단식을 선택으로 누린다. 이걸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배고픔을 끝내기 위해 악착같이 움직여야겠지. 끔찍하다. 방종과 생존 사이. 그들은 허기를 도둑맞았다.
아무튼 쓰러진 것 때문에 내일부터는 사골국물과 방탄코코아를 마실 계획이다.
4일 차
팔굽혀펴기 10개 가능. 단식 전에는 가볍게 10개를 했고, 1일 차에도 별 차이 없었는데, 지금은 살짝 힘들긴 했다. 아침에 동네 설렁탕집에서 아무것도 넣지 않은 사골국물을 포장해 왔다. 4 국자 떠서 마셨는데 너무 배불렀다. 식곤증이 왔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2 국자 더 먹었다. 그랬더니 본격적으로 허기가 몰려왔다.
단식 1, 2일 차에는 메스꺼워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3일 차부터 또랑또랑해졌고, 배가 살짝 고픈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4일 차에 음식이 들어가니 눈이 돌아가게 배가 고팠다. 견과류 한 봉지를 사 먹었다. 엄청나게 맛있었다. 이빨이 잘게 부순 음식 조각 하나하나가 내 살에 스며든다.
입맛이 없을 때, 삶이 무료할 때, 세상이 원망스러울 때 36시간만 굶어보세요!
일단 겨울마다 3-5일 단식을 하고 싶다. 물단식은 멸치에게 위험한 것 같아 하루 사골 4 국자 마시기! 엄마가 고아주던 뽀얀 사골이 그리운데 여름에 그 짓을 할 수는 없으니 겨울마다 사골을 한 솥 고아야지.
저녁에는 남은 사골에 매생이와 양파를 넣어 끓였다. 너무너무 맛있었다. 이렇게 맛있을 일인가? 신에게 감사를 올리는 무신론자가 되었다.
5일 차
여전히 심장이 우렁차게 뛴다. 심대리 고생해!
보식이 너무 맛있다. 사골국에 들어간 파가 설탕을 바른 듯 달착지근. 삼키기 아쉬워 오물거린다. 보식 둘째 날이라 먹고 싶은 대로 먹었더니 얹혀버렸다. 폭식이라고 해봐야 순두부지리탕에 견과류 한 봉지, 사골 매생이 참치국 한 그릇이다. 평소 한 끼 분량인데.
6일 차
더위와 배고픔에 눈을 떴다. 찢어지는 배고픔. 내가 남반구의 운도 지지리 없는 동네에 태어났더라면 매일 느꼈을 슬픔일까?
이상하다 배고픔은 추위랑 같이 간댔는데.
순한 맛의 탕을 허버허버 먹는다. 반그릇 먹고 좀 쉬었다가 다시 반그릇 먹고. 폭식은 힘들다(?)
7일 차
단식 3일 + 보식 4일 해서 일주일의 마지막 날. 보식 1일 차에 폭발했던 식욕은 다시 사그라들었다. 그때는 양파돈가스 한 입, 찐만두 한 입이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리라는, 감당 못할 환희에 쓰러질 줄 모른다는 의심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그거나 지금 먹는 보식 메뉴나 다 맛있다. 양배추와 닭가슴살과 파를 넣고 끓인 탕을 맛있다고 외치며 먹었다.
30년의 식습관을 초기화하는 데 3일밖에 걸리지 않는다니. 감사한 일이다. 물론 나를 둘러싼 환경을 바꾸지 않는다면 초기화해봤자 소용없다. 다시 돌아가는 데는 3일도 걸리지 않는다.
단식할 때 몸이 너무 힘들어 억지로 산책을 다녔고 (엄청 느릿느릿), 보식 기간에는 자전거 운전이 위험할 것 같아 버스 타고 공유오피스로 출퇴근을 했는데, 그때마다 놀란 것은, 정말 우리 주변에 식당이 엄청나게 많다!
도시에서 상가가 차지하는 비율, 상가에서 식당과 카페가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될까? 우리가 이렇게 많이 먹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길을 걸을 때 보이는 도시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질까?
우리는 정말 그렇게 많은 것들을 먹고 싶은 걸까?
물론 난 단식이 끝나면 슴슴한 평양냉면에 얇은 피 만두를 입안 가득 욱여넣을 것이다. 사람들을 잔뜩 모아 인도 커리 집 가서 모든 커리 메뉴를 하나씩 다 시킨 뒤 손으로 느낄 것이다.
같이 상수에 커리 먹으러 가실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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