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우리는 선한가, 악한가
도대체가 어렵습니다. 성선설이 맞는 건지 성악설이 맞는 건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선설을 믿다가도,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무조건적으로 성악설을 지지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보았습니다. 어쩌면 이해하기 어려운 타인을 이해하고 싶지도 않기에 아주 쉽게 성악설을 믿게 되버리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이란 참 알 수 없는 존재니까요. 착한 줄 알았던 사람이 알고 보니 나쁜 놈이었다던가, 나쁜 줄 알았던 사람이 의외로 따뜻한 사람이었다던가. 이 오래된 질문에 철학자들도 답을 내지 못했습니다. 동양에서는 맹자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선하다고 주장한 반면,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보았죠. 이 논쟁은 서양에서도 루소와 홉스를 통해 이어졌는데, 루소는 인간이 본래 순수하나 사회가 이를 타락시킨다고 본 반면, 홉스는 인간이 본래 이기적이며 폭력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기들에게서 찾은 인간 본성의 비밀, <선악의 기원>을 소개합니다.
*이번 뉴스레터는 폴 블룸 <선악의 기원> 독서모임 일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책 📕 폴 블룸, <선악의 기원>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도덕적인가: 6개월 된 아기의 선택
6개월 된 아기가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다니, 믿으실 수 있나요? 폴 블룸의 연구에 따르면, 아기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도덕적 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아기들은 착한 인형과 나쁜 인형이 등장하는 간단한 연극을 보고 나서, 착한 행동을 한 인형을 더 오래 쳐다보고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이는 아기들이 이미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기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점은, 선악에 대한 감수성에서 '나쁜 것'에 대한 감수성이 '좋은 것'에 대한 감수성보다 더 일찍 출현하고 더 강력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생존을 위해 위험한 것을 더 빨리 알아차려야 했던 진화의 흔적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발견은 사이코패스 연구를 통해 더욱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하는데요, 놀랍게도 사이코패스들은 길 잃은 아이를 구해주는 것이 '옳은 일'이고 의식을 잃은 여성을 성폭행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완벽히 이해합니다. 다만, 그들은 이와 연관된 도덕적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이는 옳고 그름을 '인식'하는 것과 도덕적 '감정'을 느끼는 것이 별개라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도덕적 판단 능력의 씨앗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온전한 도덕성으로 발현되기 위해서는 감정적 공감 능력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인간은 선악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나지만, 그것을 '느끼고' '실천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도덕적 감정을 느끼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아기들은 자신의 가족이 아닌 사람의 고통에도 반응하고, 타인을 돕는 행동을 보면 기뻐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공감과 배려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며, 이는 배고픔이나 성욕처럼 진화의 과정에서 발달한 우리의 본능이라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말이 통해야 마음도 통한다: 인종보다 중요한 것은 '언어'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도덕성은 어떻게 발현되고 발달할까요? 흥미롭게도 폴 블룸은 인종이나 외모가 아닌, '언어'가 도덕적 유대감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폴 블룸의 연구에 따르면, 5세 백인 아이들은 흥미로운 선택을 했습니다. 악센트가 있는 백인 아이와 악센트가 없는 흑인 아이 중에서 친구를 고르라고 했을 때, 아이들은 자신과 같은 언어를 더 유창하게 구사하는 흑인 아이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인종적 편견보다 언어가 더 강력한 유대감을 형성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연구 결과들은 3세 아이들에게 인종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지만, 자신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외국어 악센트가 없는 사람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가 타인을 판단할 때 겉모습보다는 소통 가능성이 더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것을 시사하는데, 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여서 비원어민 악센트로 말하는 사람들을 덜 유능하고, 덜 똑똑하게 평가하는 경향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한국인은 아닌데,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능에서 만나는 타일러 라쉬는 한국어를 너무 잘해서 '진짜 한국인 아니야?' 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예능 프로그램의 단골손님이 된 조나단도 마찬가지고요. 최근에는 유튜브에서 한국어 실력으로 화제가 된 핀란드인 레오까지, '이 정도면 한국인이다'라는 댓글이 줄을 잇습니다. 이들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외모가 아닌, 거침없는 한국어 실력이었죠. 이들의 사례는 폴 블룸의 연구 결과를 더욱 생생하게 입증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여는 건 결국 피부색이나 생김새가 아닌,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언어'였습니다.
도덕성의 어두운 그림자: 처벌하고 싶은 욕구
하지만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런 따뜻한 유대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사람이 벌을 받길 바란 적 있으신가요? 폴 블룸은 우리 안에 공존하는 이 복잡한 본성에 주목했습니다.
저자는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과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 다르다고 했는데요, 여기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질문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왜 나쁜 행동을 한 사람이 처벌받는 걸 보고 싶어 할까요? 저자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은 처벌을 통해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보다는 가해자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고 합니다.
철학자 파멜라 히에로니미는 이런 처벌 욕구가 단순한 복수심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철학자는 흥미로운 예시를 듭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차로 치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한 실수를 넘어 당신의 존엄성을 앗아가는 행위가 된다고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 한마디가 때로는 기적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는 그 사과가 당신을 한 사람으로서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저자는 여기서 인간의 본능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을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성욕이 존재하는 이유는 아기를 만들게 해주기 때문이지만, 성욕을 느끼는 심리는 아기에 관한 관심과는 무관합니다. 배고픔이 존재하는 이유는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이지만, 대체로 우리가 먹고 싶어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 아니죠. 마찬가지로, 우리는 처벌하길 원하지만, 처벌의 목적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이와 관련해 애덤 스미스는 "사람은 누구나 사기와 배신, 불의를 혐오하며, 그런 행위가 처벌받는 것을 보면 기쁘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처벌 욕구는 우리 본성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입니다. 겉으로는 정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표방하지만, 그 이면에는 더 원초적이고 어두운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중성은 우리의 일상적인 선택에서도 드러납니다. 저자가 관찰한 한 실험에서, 아이들은 다른 아이가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갖지 않겠다고 선택했습니다. 또한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의 도덕적 의무는 '우리 편'에게만 적용되었습니다. 파푸아뉴기니의 소규모 사회에서는 이웃 부족을 만나러 가는 것조차 "자살 행위"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는 정의를 추구하는 마음과 함께,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본성이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가며: 성선설일까, 성악설일까?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볼까요?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일까요, 악한 것일까요?
저자는 이 오래된 질문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성선설과 성악설이라는 이분법적 선택지 대신, 우리 안에는 두 가지 성향이 모두 존재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도덕적 감각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편견과 혐오의 씨앗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공감하고 배려하는 마음과 처벌하고 배척하는 마음이 공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 본성의 실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성선설이나 성악설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복잡한 본성을 이해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선하고 악한 본성이 공존하는 우리, 그 속에서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작은 이해의 시작. 이 의미 있는 대화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독서모임 안내
- 일시: 2월 28일(금) 오후 07:30
- 장소: 투썸플레이스 석촌역점
- 신청: 아래 '소모임 신청' 버튼을 눌러주세요
✍️ 작성자: 에이미
📮 오늘의 뉴스레터는 어떠셨나요?
아래 댓글에서 여러분의 생각을 들려주세요!
💬 오늘의 질문
- 여러분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 혹은 '악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타인의 잘못된 행동을 마주했을 때, 처벌보다는 이해와 용서를 선택한 경험이 있으신가요? 혹은 그 반대의 경험이 있으신가요?
- 언어가 다른 사람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한 경험이 있으신가요? 반대로 같은 언어를 쓰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경험은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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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파수꾼
선한지 악한지 고르기만 했는데 둘 다 존재했었네요. 서로서로 존중하는 사회가 되도록 저도 존종해보겠습니다. 좋은 글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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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잉
저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성악설에 공감했지만, 최근에는 인간이 완전히 선하거나 악하기보다는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회색에 가깝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특히 "옳고 그름을 '인식'하는 것과 도덕적 '감정'을 느끼는 것이 별개라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라는 문장이 정말 공감됩니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 옳고 그름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으로 더 나은 선택을 하기보다는 당장의 이득 여부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최근에는 프레임에 갇혀 작은 집단으로 파편화되는 사회적 흐름이 강해지고 있는데, 그런 시대에 꼭 읽어야 할 책인 것 같습니다. 좋은 책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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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리
저는 성선설이나 성악설보다는 성장하면서 겪게되는 교육,환경등에 의해서 사람의 성향이 언제든 바뀔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아기 시절부터 이미 선악의 구별이 가능하다니 아기들이 하는 행동이 다 의미가 있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인간의 본능적인 이타심과 이기심안에서 내가 조금 피곤하더라도 배척하고 혐오하기보다는 최대한 서로 배려하고 격려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악의기원 책에도 흥미가 생기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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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채
저도 사회생활을 하며 자주 성악설을 믿게 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게 악한 행동이 아니었으니 결국 선이냐 악이냐라는 기준 자체를 어떻게 정하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비록 처벌을 원하는 마음이 본능이라고 하더라도 잠시 멈춰서 처벌의 목적을 돌아보고 이해와 공감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나 생각해보는 게 인간이 생각하는 동물이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닌가 합니다. 옳고 그름을 인식하는 것과 도덕적 감정을 느끼는 게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걸 보고 인식과 감정을 동일시 해오던 저를 돌아보게 됩니다. 생각해 볼 거리가 많은 글이라 너무 흥미롭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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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키
너무 흥미로운 내용이 많네요! 저는 사이코패스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아예 모르는 줄 알았는데, 그저 그에 대한 도덕적 감정이 결여되었던 것이군요..! 언어가 도덕적 유대감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언어'와 '도덕'은 한 번도 연결지어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범죄자 처벌 욕구 관련해서도,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지은 부분이 인상깊네요! 결국, 성선, 성악은 우리에게 모두 존재하죠. 마치 엄마곰이 아기곰은 사랑스럽게 대해도, 포식자가 보이면 찢어 죽일듯이 공격하는 것처럼요. 인간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늘 재밌네요! 뉴스레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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