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종교'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믿음이 사라진 시대의 믿음에 대하여 

2025.10.22 | 조회 1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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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마음 둘 곳을 잃은 인간에게


요즘 세상이 너무 빠릅니다. AI의 속도는 인간의 불안을 앞질렀고, 경제는 그 불안에 불을 붙이고 있죠. 다들 바쁘고 지쳐 있습니다. 그러다 문득, 마음 둘 곳이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이 말이 종교인에게는 실례일 수 있겠지만, 비종교인의 입장에서는 솔직한 고백입니다. 누군가는 믿음을 통해 위안을 얻고,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공동체를 만듭니다. 때론 외롭기도 하겠지만, 완전히 혼자가 되지는 않죠. 그게 종교의 가장 현실적인 힘입니다. 믿음의 내용보다, 함께 믿는 구조가 사람을 지탱하니까요.

(출처: 영화 <두 교황>)
(출처: 영화 <두 교황>)

한편 인간은 달에 다녀오고, 이제는 화성을 인간의 땅으로 만들려 합니다. AI와 대화하고, 기계에 판단을 위임합니다. 이건 단순한 기술 변화가 아닙니다. 문명의 교체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이토록 ‘신 없는 시대’에도 여전히 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거의 모든 자연현상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음 한켠에는 설명되지 않는 경이로움이 남습니다. 이성으로 다 헤아릴 수 없다는 걸, 인간은 본능적으로 압니다.

오늘 소개드리는 『내 안의 엑스터시를 찾아서』의 저자, 성해영 교수는 이렇게 묻습니다.

“인간이 달나라까지 갔다 온 현대에도 사람들은 왜 종교를 믿을까요? 미래에도 종교는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할까요?” 

p.14

이 질문은 신앙의 유무를 묻는 게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감각 자체가 인간의 본능임을 환기하는 질문입니다. 엑스터시(exstasy). ‘내 밖에 선다’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입니다. 성해영 교수는 이 단어가 종교를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무당은 흔히 비일상적인 의식 상태인 엑스터시로 들어가는 능력을 지녔다고 여겨집니다.” 

p.14

엑스터시는 자신을 넘어서는 경험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세계와 접속하려는 인간의 충동이지요. 그래서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종교적 감각은 완전히 낯선 것이 아닙니다. 결국 종교란 인간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왜 살아야 하는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성해영 교수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종교란 ‘인간이 물을 수밖에 없는 삶의 궁극적 물음에 대한 해답을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과의 관계에서 찾으려는 시도’ 정도가 되겠지요.”

p.45

AI는 미래를 예측하고, 인간의 감정을 계산합니다. 하지만 인간만이 묻습니다. 삶의 의미를, 존재의 이유를, 죽음 이후의 세계를. 종교는 그 질문을 잊지 않으려는 오래된 언어입니다.

새로운 문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신의 자리를 기술이 대신하고, 믿음의 자리를 데이터가 점령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종교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오늘의 책 📕 <내 안의 엑스터시를 찾아서>


(출처: 불광출판사)
(출처: 불광출판사)

인간은 왜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가


자연현상 중 하나인 일식과 채운(출처: youtube “랭크존” https://youtube.com/shorts/POXOoCVA7oQ?si=by2YUfjldugya9kP)
자연현상 중 하나인 일식과 채운
(출처: youtube “랭크존” https://youtube.com/shorts/POXOoCVA7oQ?si=by2YUfjldugya9kP)

비종교인으로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인간은 왜,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까요? 과학이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일몰 앞에서는 여전히 ‘무언가’를 느낍니다. 그건 지식이 아니라 감각입니다.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무력한 경외심이죠.

성해영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종교란 ‘인간이 물을 수밖에 없는 삶의 궁극적 물음에 대한 해답을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과의 관계에서 찾으려는 시도’ 정도가 되겠지요.” 

p.45

과거의 인간은 계기일식이나 천둥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늘은 두려움이었고, 설명되지 않는 현상은 곧 신의 목소리였습니다. 그건 무지가 아니라,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인간의 해석 능력이었습니다.

비행기(화물)을 신으로 믿은 사람들
비행기(화물)을 신으로 믿은 사람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남태평양의 원주민들이 미군의 비행기를 보고 신의 선물이라 믿었던 ‘화물 신앙(Cargo Cult)’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들은 활주로를 흉내 내고, 나무로 모형 비행기를 세우며 신이 다시 오길 기다렸습니다.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낯설지만, 그 당시의 인간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설명되지 않는 현상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해석을 시도했고, 그 해석의 언어가 곧 ‘신’이었습니다.

(출처: unsplash)
(출처: unsplash)

과학은 자연의 원리를 밝혔지만, 인간의 불안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세계 앞에서 서성입니다. 지식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것’의 크기도 함께 커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알고 싶을수록 더 많이 묻습니다. 이제 그 질문의 상대가 신이 아니라, 인공지능이 되었을 뿐이죠. 그 틈 사이에서 종교는 여전히 작동합니다. 신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이유는 여전히 같습니다. 세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의 자리를 대체한 것은 ‘개인’이다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성해영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경제적 풍요, 높은 교육 수준, 민주주의 제도의 확산은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켜 최종적으로는 ‘개인’의 존엄성과 가치를 강조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개인이 자기 삶을 결정하는 주체로 등장한 것이지요.” 

p.80

20세기 이후, 인간은 신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집니다. 신이 아닌 내가 중심이 된 시대입니다. 하지만 자유에는 언제나 무게가 있습니다. 자유는 책임을 요구하고, 책임은 불안을 낳습니다. 신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모든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개인의 불안이었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이를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불렀습니다.

“자유를 감당할 수 없는 개인이 타인에게 자신의 자유를 양도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p.81
이슬람교의 가장 신성한 성지,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카바(Kaaba)’를 중심으로 한 하즈(Hajj, 순례) 장면(출처: unsplash)
이슬람교의 가장 신성한 성지,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카바(Kaaba)’를 중심으로 한 하즈(Hajj, 순례) 장면
(출처: unsplash)

인간은 자유를 얻자마자, 다시 누군가에게 그 자유를 돌려줍니다. 전체주의와 근본주의는 그 공허한 자리에서 피어났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종교 역시 개인의 자유를 둘러싼 구조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자유로운 존재라 생각하지만, 사실 사회가 만든 구조 안에서 믿고 행동합니다. 이란의 이슬람교, 미국의 기독교는 신앙 이전에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문화적 구조’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세계관 속에서 인간은 선택한다고 믿지만, 그 선택마저 구조가 허락한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사고와 믿음은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언어·문화·종교가 엮인 구조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 바로 이것이 구조주의가 말하는 세계의 방식입니다.

“인간의 불완전함이 집단적으로 투사된 결과가 신의 존재라고 여긴 포이어바흐, 아버지에게 품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심리적 투사가 가부장적 신이라고 본 프로이트, 종교가 인간과 사회의 존속에 도움이 되는 문화적 고안물이라는 도킨스…” 

p.90

이들의 말처럼, 신은 인간이 만든 개념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이 사라졌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신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다만, 형태가 달라졌을 뿐입니다. 신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개인입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의 신이 되어, 스스로의 세계를 창조합니다. 그러나 그 신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불안하고, 흔들리고, 자신을 의심합니다. 결국 인간은 신의 부재 속에서 또 다른 신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 이름이 자유든, 자아든, 혹은 구조든 말이죠.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그 신에게 묻습니다. “내가 옳은 선택을 하고 있는 걸까?”

 

공동체의 빈자리, 그리고 신의 귀환


“美 텍사스주
“美 텍사스주 "모든 공립학교에 '십계명' 게시한다"
미국의 한 고등학교에 놓인 십계명 석판.(사진출처=연합뉴스)
출처 : 데일리굿뉴스(https://www.goodnews1.com/news/articleView.html?idxno=448892) 

인간은 혼자 설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건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개인이 신의 자리를 차지한 시대에, 인간은 다시 외로워졌습니다. 자유는 늘 고립을 낳고, 고립은 다시 연결을 원합니다. 이 틈에서 종교가 다시 돌아오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합리적인 사회에서 가장 비이성적인 욕망이 다시 살아납니다.

최근 미국 루이지애나주에서는 공립학교 교실에 십계명을 게시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그 외 여러 주에서도 같은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죠. 이는 단순히 종교적 복고가 아니라, 혼란한 시대에 절대적 기준을 회복하려는 집단적 본능으로 보입니다. 불안할수록 사람들은 다시 규칙을 찾고, 그 규칙이 곧 신이 됩니다.

성해영 교수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종교가 사회에 주는 도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개인과 공동체의 행복일 겁니다.” 

p.218

현대의 종교는 더 이상 ‘구원’의 언어로만 작동하지 않습니다. 대신 ‘힐링’의 언어로 다시 등장합니다. 명상, 요가, 순례, 치유 여행. 이 모든 것은 비종교인의 일상 속에서 이미 ‘세속화된 종교 행위’로 자리했습니다.

성해영 교수도 이렇게 지적합니다.

“종교적 공간을 방문할 뿐만 아니라 명상과 순례와 같은 종교적 활동에 직접 참여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종교가 힐링의 역할을 오랫동안 맡아왔다는 사실을 비종교인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p.202
"더이상 AI 못 막는다" 지금은 현실적으로 '이것부터' 하세요 (김대식 교수 풀버전)
(출처: https://youtu.be/v5jWMfqKcus?si=z4LMLhBJWPh-a_oS)

결국 종교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습니다. 형태는 달라졌지만, 기능은 같습니다. 과거에는 구원이었다면, 지금은 치유와 연결입니다. 하지만 그 연결조차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KAIST 김대식 교수는 “10년 내로 인간 간의 대화의 99%가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AI가 인간의 대화를 대신하는 시대. 우리는 점점 더 많은 대화를 나누지만, 정작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다시 믿음을 찾습니다. 그것이 신이든, 명상이든, 공동체든, 인간은 결국 ‘함께 있음’의 감각을 갈망합니다. 신은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다만, 다른 방식으로 돌아왔을 뿐입니다. 우리가 다시 종교를 찾는 이유는 단순히 믿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잃어버린 연결을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곧, 인간끼리의 대화가 어색해지는 시대가 올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가 ‘함께 있음’을 갈망하는 건 어쩌면 과도기의 본능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더 이상 인간과 함께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오면, 우리는 무엇을 믿게 될까요?

 

나가며: 문명의 전환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믿을까


우리는 신의 시대를 지나, 개인의 시대를 거쳐 이제 기술의 시대에 서 있습니다. 신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인간은 여전히 무언가를 믿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AI가 세상을 예측하고, 인간의 감정을 대신 분석하는 지금도 사람들은 다시 십계명을 교실에 걸고, 잊힌 믿음의 언어를 되살리려 합니다. 종교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또 한 번 다른 얼굴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문명의 한가운데서, 인간은 다시 ‘초월적 믿음’이라는 감각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 작성자: 에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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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질문

  • 당신에게 ‘믿음’이란 어떤 감각인가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붙잡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 기술이 신의 자리를 대신하는 시대에, 당신은 여전히 인간에게만 남은 ‘초월적인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 신앙이든 철학이든, 결국 우리가 찾는 것은 ‘안심’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의지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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