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400년 전에도 던져진 질문, '이것이 예술인가'

이전 뉴스레터 <이것이 새입니까?> 편에서 우리는 예술의 정의를 다시 물었습니다. 추상적인 현대 미술 작품 앞에서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고, AI가 만든 그림을 두고 이것이 예술인지 아닌지 논쟁은 여전히 뜨겁습니다.

그런데 이런 혼란이 비단 오늘날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약 400년 전, 1591년 오스만 제국(오늘날의 튀르키예)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서양의 화풍이 이스탄불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고, 전통 세밀화가들은 깊은 혼란에 빠졌죠. 신의 시선으로 그려온 그림에, 인간의 눈이 개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로맨스와 추리 스릴러, 그리고 예술사의 격변기를 모두 담아낸 소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이 바로 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오늘의 책 📕 『내 이름은 빨강』, 오르한 파묵

엘레강스를 죽인 범인은 누구인가
소설은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뒤통수를 맞고 우물에 던져진 채 죽어가는 엘레강스, 그가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범인은 그와 함께 술탄의 밀서를 제작하던 세 명의 세밀화가, 올리브, 나비, 황새 중 한 명입니다.
주인공 카라는 범인을 찾기 위해 세 명의 화가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그림에 관한 질문들이지만, 동시에 그들의 내면을 드러내는 심문이기도 합니다.
- 나비는 스타일에 대해 말합니다. "스타일이란 불완전함의 다른 이름이다. 결함 있는 그림을 그리고도 뻔뻔하게 하는 변명일 뿐이다."
- 올리브는 시간에 대해 답합니다. "완벽한 인생과 그림에 대한 생각을 버린 사람만이 자신의 시간이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있다."
- 황새는 ‘눈멂’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둠을 기억하는 것, 색을 통해 신의 어둠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당시 세밀화가들은 그림에 화가의 개성이 드러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익명성을 추구해도 흔적은 남기 마련입니다. 범인 역시 알고 있었습니다. 살인이라는 행위에도 자신만의 스타일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요. 그렇다면 엘레강스를 죽인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요?
세밀화vs베네치아 화풍: 신의 눈과 인간의 눈
16세기 말 이스탄불(오스만 제국이 수도)은 동서양의 교차로였습니다. 베네치아의 상인들, 외교관들, 예술가들이 드나들며 새로운 사조를 몰래 들여왔습니다. 전통 세밀화가들은 술탄의 밀서에 들어갈 그림을 서양식 화풍으로 그려야 하는 상황에 놓이며 깊은 갈등에 빠집니다. 과연 새로운 서양 화풍은 세밀화와 어떤 차이가 있기에 이토록 혼란스러워했을까요?

세밀화는 이상적이고 상징적입니다. 거장의 전통을 재현하는 것이 목표였고, 화가는 익명의 기술자 혹은 복사자로 남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베네치아 화풍의 초상화를 비종교적이고 이단적이라 여겼습니다. 특히 원근법을 신의 시선을 지우고 훼손하는 화법이라 경멸했죠.

반면 베네치아 화풍은 사실적이고 개성을 중시했습니다. 원근법과 생생한 색채로 인간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그렸고, 무엇보다 초상화를 통해 개인의 존재를 기념했습니다.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던 초상화는 점차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고 싶어하는 욕망이 확산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악마'의 변론

『내 이름은 빨강』의 독특한 점은 시점의 다양성입니다. 여러 등장인물은 물론이고, 밀서에 그려진 나무, 동전, 개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악마의 시점입니다.
당시 이스탄불에서 서양 화풍을 따르는 것은 이단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화가들은 악마에게 홀렸다는 비난을 받았죠. 하지만 소설 속 악마는 이 누명을 억울해합니다.
악마는 말합니다. 모든 일의 시작은 신이 천사들에게 인간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했을 때였다고. 다른 천사들은 따랐지만, 악마만은 정정당당하게 거절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이 때문에 끔찍한 형벌을 받고, 소외되고, 신의 눈 밖에 나고, 욕을 먹는 내가 이런 그림을 그리는 데 영감을 주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말 얼토당토않은 일입니다. (중략) 천사들을 인간에게 복종시켜서 그들을 자만심에 가득 차게 만든 이는 바로 신, 당신이 아니십니까? 그들은 지금 당신의 천사들에게서 배운 것들을 행하고 있고,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하며, 세계의 중심에 자기 자신을 배치해 놓고 있습니다.
『내 이름은 빨강 2』, p.167
악마의 변론은 단순한 풍자를 넘어섭니다. 누가 정통이고 누가 이단인가, 누가 신의 뜻을 따르고 누가 거역하는가 하는 질문 자체를 뒤흔듭니다.
나가며: 빨강이라는 이름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색, 빨강. 셰큐레가 사랑을 확인하러 갈 때 입은 옷도 빨강이고, 그녀를 욕망하는 하산이 든 검도 빨강입니다. 빨강은 사랑과 열정, 욕망과 질투, 그리고 피와 죽음을 상징합니다.
“저는 죽음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알고 있다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 두려움을 그려 보게나.”『내 이름은 빨강 2』, p.249
죽음은 필연입니다. 이 세상 어떤 생물도 피할 수 없는 것이죠. 이처럼 빨강이 상징하는 사랑, 열정, 욕망, 질투 역시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것들입니다.
『내 이름은 빨강』은 이 강렬한 색채를 통해 치열한 인간사를 보여줍니다. 등장인물들은 이야기의 결말을 한 치 앞도 모른 채 밀서 제작을 둘러싸고 비밀을 지키려 애쓰고, 신념과 갈등하고, 살인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 모습은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인생의 결말을 알지 못하지만 무언가를 열망하고, 그 과정에서 갈등하고 의심하면서도 나아갑니다. 400년 전 이스탄불의 화가들이 그랬듯이, 오늘날 우리가 예술 앞에서 혼란스러워하듯이 말입니다.
빨강은 여전히 우리를 부릅니다. 두려워하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을 향해.
✍️ 작성자: 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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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정통이고 무엇이 이단인지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 여러분의 삶을 상징하는 색깔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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