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당신에게 일곱 번째 편지를 쓰고 있네요. 오늘은 제가 어떻게, 또 어째서, 제인 오스틴의 모든 작품을 번역하면서 그 과정 내내 독자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마음먹었는지를, 조금은 용기를 내어 아주 솔직하게 들려드리려 합니다.
*
제인 오스틴의 첫 소설과 마지막 소설은 말하지 못한 마음이 봇물 터지듯 나오는 이야기, 침묵하던 생각에 드디어 목소리가 생기는 이야기입니다. 『이성과 감성』의 엘리너와 『설득』의 앤은 누구보다 사리 판단이 지혜롭고 누구보다 사무치는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지만 여러 이유로, 특히 결혼하지 않은 여자라는 이유로, 가족과 사회에 마음을 드러낼 길이 막혀 있어요. 사회적 발화는 언제 어디서나 권위와 규범의 문제이지요. 엘리너의 동생 메리앤처럼 규범을 무시하고 거침없이 속내를 드러낼 수도 있지만, 그랬다간 철저히 무시당할 뿐 아니라 가혹한 처벌을 받을 위험에 처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앤의 언니 엘리자베스처럼 아름다운 외양으로 아버지/남자의 권위를 차용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엘리너와 앤의 꿈은 보다 야심 차고, 그들의 실천은 보다 금욕적입니다. 뉘앙스가 풍부한 자신의 자아를 온전히 세계에 새기고자 분투하되, 그것이 불가능하다 해도 끝까지 세계를 관용하고 용서하고 연민하고, 사랑할 태세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는 부당한 세계의 섭리를 무조건 따르는 태도도 아니고, 손해를 참고 퍼주기만 하는 호구의 선의도 아닙니다. 제인 오스틴에게 세계는 곧 다른 사람들이고 삶은 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기에, 관용과 용서와 사랑은 자기와 세계를 지키는 마음입니다. 현명한 제인 오스틴과 그가 창조한 아름다운 사람들은 오랜 시간 고립과 고독과 침묵에 맞서 절망도 원망도 없이 부단히 분투하며, 끝내 목소리를 낼 자격을 쟁취하고 찬란하게 발화(發話)하고 발화(發花)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또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기어코 두 번째 기회를 허락하고 뒤늦을지언정 만개합니다.
제인 오스틴의 전작을 번역하고 싶다는 꿈을 품은 것은 아주 아주 오래전부터였지만, 실행에 옮겨야겠다 작심한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제가 더는 직업인으로서의 번역가로 살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하던 때였습니다. 50년에 걸쳐 모르고 살아왔지만 저는 신경다양성 장애가 있었어요. 중년에 들어서며 힘겹게나마 통제하고 살아오던 온갖 문제가 서서히 악화되더니 급기야 터져버렸습니다. 시간이 제멋대로 흐르고, 기억이 엉망진창이 되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고, 아무 때나 눈물이 나고, 컴퓨터 화면을 켜고 하얀 여백이 떠오르면 무서워서 죽어버릴 것만 같았어요. 더구나 평생 읽고 쓰는 사람으로 살아왔는데, 바로 그 읽고 쓰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었지요. 아무리 읽어도 이해할 수 없고 아무리 고쳐 써도 문장이 만들어지지 않았지요. 저는 그때 오른손의 기능을 잃은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를 아주 많이 생각했습니다. 손가락을 잃은 피아니스트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머릿속은 뒤죽박죽인데 마감은 닥쳐오고 또 닥쳐오다 끝내는 도미노처럼 우수수 무너졌지요. 가슴에 늘 엄청나게 무거운 바윗돌이 얹힌 기분으로 날마다 선잠을 설치며 악몽을 꾸었습니다. 낙인도 두려웠지만 무엇보다 끔찍하게 외로웠어요. 언제나 세계와 나 사이에 얇지만 절대 통과할 수 없는 피막이 있고, 나는 결코 세계에 소속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 있었거든요. 특히 사람들과는, 어떻게 해도 진짜로 사람들과는 연결될 수 없다는 좌절이 있었는데, 이제 그 좌절은 절망이 되어 덮쳐오고 있었지요. 분명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었기에, 항상적인 그 단절의 감각은 스스로 차마 불가해한 것이었고요. 그때 나는 분명 직업적 능력을, 인간적 연결을, 통합적 자아의 감각을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세계는 내게서 점점 더 멀찍이 물러섰고, 나는 혼돈 속에 꽤 오래 혼자 남겨져 화를 내고 짜증을 내며 점점 더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그럴수록 점점 더 그런 나를 타박하고 미워하고 소외시켰지요. 어떻게 해야 그 악순환의 구렁텅이에서 헤어 나올 수 있을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시기를 놓치지 않고 내가 특정한 형태의 신경다양인임을 깨닫고, 진단과 치료를 받은 건 천운이었어요. 삶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세계와 연결될 수 없었던 건 나 자신과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자아에 대한 핵심적인 앎이 없이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말, 나 자신을 관용하고 용서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세계를 관용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다는 어쩌면 상투적인 그 말들의 진의도 뼈저리게 체득했지요. 그래서 제인 오스틴을 다시 펼치고 읽었습니다. 이번에는 『오만과 편견』이 아니라 『이성과 감성』과 『설득』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은 동화 같은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 말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결렬과 상처, 잔인한 홀대와 모욕, 편견과 이기주의, 불안과 상실감, 자기 의심과 자기혐오, 서로 갈라놓는 모든 장벽을 넘어 발화하고 세계와 재결합하는, 치열한 투쟁의 기록이자 희망의 전갈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작가로서 인간으로서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성취인지를 과거에 알았으나 차마 알지 못했던 방식으로 새삼스레 알았습니다.
지난 편지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제인 오스틴은 언제나 고립되어 있거나 깊은 절망에 빠져 있거나 상실을 애도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오스틴을 읽은 몇 해: 다섯 권의 소설로 쓰는 회고록(The Austen Years: A Memoir in 5 Novels)』은 작가 레이철 코언(Rachel Cohen)이 아기의 출산과 아버지의 죽음이 겹친 인생의 한고비를 거치며 아무것도 읽지 않고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만 읽고 또 읽었던 기록입니다. 허구와 현실, 태어남과 죽음의 기록이고 독창적인 문학비평이며 애도와 치유의 증언이고 한 작가가 다른 위대한 작가에게 바치는 헌사입니다. 코언에 따르면 오스틴의 세계는 언제나 애도하고 있습니다. 『이성과 감성』에서는 아버지를 애도하고 사랑의 불가능성을 애도하고 빼앗긴 고향을 애도합니다. 나폴레옹 전쟁의 후유증으로 가득 차 있는 『설득』 또한 말하지 못해 잃어버린 사랑을 애도하고 먼 전장에서 전사한 아들을 애도하며 서서히 잃어가는 과거의 영광을 애도합니다. 처음부터 열린 적 없는 문, 이미 닫혀버린 문들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오스틴의 웃음과 관용과 자비의 씨앗이 꽃을 피웁니다. 엘리너 대시우드도 앤 엘리엇도 웃음과 관용을 잃지 않습니다. 부당하게 홀대하고 상처 주고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는 가족을 미워하고 화를 내지도 않습니다. 세계를 통제하려 들지 않고 다만 부단히 설득의 길을 찾습니다. 『이성과 감성』 3장에는 엘리너 대시우드가 사람의 마음을 너무 쉽게 믿고 딸을 위험한 상황으로 내모는 어머니에게 항상 “불신의 영감을 불어넣으려(inspire with distrust)”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벼락처럼 떨어지는 예술적 영감을 신봉하는 낭만주의를 비틀어 겨냥하는 이 표현은 이 속 터지게 답답한 불통을 깨뜨려 한 줄기 웃음의 빛살을 비춥니다. 오스틴의 문장에는 늘 이처럼 햇살 같은 유머가 날카로운 끌처럼 단단히 심겨 있어 언제나 관용이 숨 쉴 틈새를 넓힙니다. 만연한 슬픔과 절망과 불안의 대기를 관통해 불가능한 희망을 설득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 있음을 말해주고, 그들도 나도 불완전하지만 더불어 사는 삶은 노력해 쟁취할 가치가 있음을 깨우쳐줍니다.
꿈처럼 이 기획이 현실화된 건 2년 전의 일입니다. 몸과 마음은 차차 나아지고 있었지만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문학 번역을 지속할 수는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지요. 이왕 그렇다면 모든 걸 그만둘 각오로, 꼭 해보고 싶던 한 가지 일을 해보겠노라 마음을 먹었습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두려움이나 불안이 아니라 희망과 사랑을 쏟아 일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릴까 봐, 이 일을 거절하면 다시는 일할 수 없을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냥 번역이 하고 싶어서 일하고 싶었어요. 새로운 방식으로 번역을 발화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작가를 함께 읽고 함께 사유하고 싶어서, 그 과정에서 슬픔과 고독과 절망을 관통해 제인 오스틴과, 나 자신과, 문학과, 독자와, 그리고 세계와 연결되고자 분투하고 싶었어요. 늘 그 생각을 품고 다니다가 우연한 자리에서, 직접 출판사를 만들어 펀딩을 해서라도 이런 작업을 해보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놀랍게도 바로 다음 날 편집자님이 연락을 주셨지요. 우연찮게 그 시기가 제인 오스틴의 250주년과 맞아떨어졌고, 그래서 저는 이렇게 날마다 오스틴의 문장을 옮기며 수요일 밤마다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비평이자 고백이자 번역인 이 과정은 레이철 코언의 작업을 많이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앤이 “앤 엘리엇다운 무언가”를 웬트워스 대위에게 끝내 전달할 길을 찾았듯, 웬트워스 대위가 앤에게 “당신이 내 영혼을 관통했다”라고 고백할 길을 찾았듯, 이것은 제게 허락된 두 번째 기회입니다. 하지만 불완전한 나를 이해하고 불통의 세계와 화해하고 관용과 용서를 배우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과업이고, 두려움과 불안으로 얼룩진 지금의 세계 속에서 우리 모두에게는 두 번째 기회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오른손의 기능을 잃은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왼손만으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을 연주하고 후배를 양성하며 살면서도 꾸준히 재활 치료를 했어요. 희박한 희망을 붙들고 음악을 향한 사랑을 지켰습니다. 수십 년 후 그는 기적처럼 양손으로 연주한 새 앨범을 발표합니다. ‘두 손(Two Hands)’이라는 제목의 이 앨범에는 슈베르트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가 실려 있고, 그건 제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입니다.
마지막으로, 미국 드라마 『테드 래소』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가장 약할 때 저지른 짓이 아니라 가장 강할 때 성취한 것을 기준으로 평가해주는 세상이면 좋겠어”라고요. 레이철 코언도, 레온 플라이셔도, 또 제인 오스틴도 아마 고개를 주억이며 동의했을 겁니다.
2025년 2월 19일에
김선형 드림
P. S. 레온 플라이셔의 슈베르트 소나타 D. 960을 다음 링크에서 들어보세요.
의견을 남겨주세요
플라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의견을 남겨주세요
루씨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의견을 남겨주세요
Choi
번역하며 고민하고 생각한 걸 이렇게 나눠주셔서 감사해요. 이번 편지는 특히나 감동이었어요. 이제서야 제인 오스틴의 매력을 발견하고 있었는데 더 알고 싶어지네요. 번역가님이 번역한 제인 오스틴을 기대합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
플랫화잇
오스틴 작품을 원서로 꾸준히 읽어오고 있어요. 그런데 번역서는 늘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아직까지 한 권도 구입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마음에 드는 번역서가 나올 때 까지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선생님의 편지를 읽은 첫 날, 깨달았습니다. 이 분의 번역서 전체를 읽고 싶다. 그 시리즈를 사려고 기다린 거구나 하고요. 건강 잘 지키셔서 저 같은 독자에게 꼭 선물을 받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드립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