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무너지고 바다가 폭발하고 땅이 끊어지는 상황에서 뭔가를 읽을 수 있다면(그럴 수 있다면 말이지만), 당신은 어떤 책을 고르시겠어요? 여기, 자의로 타의로 멀리 파병되어, 총알과 포탄을 피해 참호 속에서 숨어 지내면서, 한순간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와중에, 소설책을, 그것도 제인 오스틴을 읽은 군인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제인 오스틴을 읽으며 버텼던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전쟁과 문학이라니, 낯선 듯 너무나 당연한 조합인데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정부에서는 영국군들에게 문고판 책자를 지급했습니다. 독서를 통해 고통스럽고 지루한 참호 생활을 견딜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덕분에(?) 병사들은 참호 속에서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인기를 누렸던 것은 제인 오스틴이었다고 합니다. 참호의 제인 오스틴은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조지프 러디야드 키플링의 소설 소재가 되기도 했답니다.
“팍팍한 데서는 작가들 전부 제인 발끝도 못 따라온다니까요.” 키플링의 단편소설 「제인 오스틴 비밀결사단(The Janeites)」(1924)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입니다. 이 소설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뒤 전투 스트레스 반응, 이른바 셸 쇼크로 고통을 겪는 미용사 험버스톨이 자신의 전쟁 경험담을 (제인 오스틴에 얽힌 일화를) 들려주는 이야기 속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인지, 한번 들어보세요.
험버스톨은 먹고사니즘에 치이는 런던 하층민의 전형이기도 해서, 문학에 대한 지식이 그리 깊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복무하던 부대에 이혼 전문 변호사 출신 장교와 잘나가는 흥신소 주인 출신 사관이 배치됩니다. 장교와 사관은 어디서나 붙어 다니며 자신이 맡았던 외도 사건이며 이혼 이야기를 쑥덕거리곤 했지요. 우리의 험버스톨은 호기심과 재미를 참지 못하고 그 두 사람의 이야기를 매번 엿듣습니다. 그런데 듣다 보니 이들의 대화라는 게 늘 ‘제인’이라는 여자의 ‘지혜’ 운운으로 흘러가는 거예요. 험버스톨은 어느 이야기에서건 빠지지 않는 그 여자가 대체 누구인지 궁금해집니다.
그 시기에 또 다른 사관 하나가 험버스톨의 부대로 배치됩니다. 변호사 장교와 흥신소 사관은 기세를 제압한답시고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며 ‘제인’을 아느냐고 을러댑니다. 그랬더니 이 신입 사관이 얼굴을 환히 빛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겠어요. “제가 있던 곳은 언제나 ‘즐거움이 보글보글(bubbly)’했답니다!” 이 한마디에 게임 끝, 환대가 끝이 없었죠. 험버스톨만이 어리둥절해하면서 ‘즐거움이 보글보글’이란 것이 이 ‘제인’이라는 사람과 관련된 상류사회 비밀결사단의 암호인가 보다 하고 짐작합니다. 이들의 대화 중에 (사교계, 학회, 비밀단체 등의 뜻이 담겨 있는) 소사이어티(Society) 같은 단어가 한 번씩 나오기도 했고요. Bubbly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 자주 나오는 단어라는 걸 어떻게 알았겠어요.
시간이 흘러 흘러, 험버스톨도 제인의 정체와 제인의 소설을 알고 읽고 사랑하게 됩니다. 제인 오스틴을 향한 다른 부대원들의 애정과 열정에 젖어들며 함께하게 된 것이지요. 부대원들은 모두 제인 오스틴 팬클럽의 회원이 되어 오스틴 소설의 내용과 인물을 토대로 한 농담과 수다를 주고받으며, (계급에 상관없이) 서로 더할 수 없이 친밀해집니다. 기존의 계급의식이며 수많은 부조리가 무의미해졌던 그 “팍팍한” 참호 속이었기에 가능한 관계이긴 했지만요. 이 작은 유토피아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험버스톨을 제외한 부대원 전원이 독일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하게 되거든요. 혼자 살아남은 험버스톨은 영원히 비밀결사단의 '제이나이트Janeite'로서 두고두고 제인 오스틴의 책을 읽으며 살아갑니다.
키플링이 이 단편을 집필한 배경에는 비극적인 사연이 심겨 있습니다. 1915년 가을, 열여덟 살이었던 외아들 존 키플링이 루스 전투에 참전했다가 실종되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루스 전투는 영국이 독가스를 무기화했던 최초의 전투로, 영국군 사상자만 5만 명을 기록했습니다.) 전장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라면 누구라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을 테지만, 아버지 키플링의 통한은 조금 복잡했습니다. 사실 아들 존은 지독한 약시라서 군대에 갈 수 없었는데 아버지 조지프의 체면과 고집 때문에 억지로 자원하여 입대한 것이었거든요.
당시 키플링은 ‘애국’ ‘보수’ 골수 제국주의자로서 정치 선전에 열심이었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나서서 청년들에게 입대를 독려했습니다. 그런 만큼 자기 아들이 신체적 조건 때문에 입대를 거부당하고 있다는 상황을 견디지 못했어요. 결국 기어이 윗선에 손을 써서 아일랜드 근위대(이름은 이러하지만 사실 영국의 엘리트 보병연대입니다.) 소속으로 군대에 보내고야 맙니다. 그런 무모한 이상주의와 권력욕의 대가로 돌아온 것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시신도 없는 부고였지요.
뭐라 말할 수 없이 큰 충격을 받은 키플링이 이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은, 아들이 “사망으로 추정되는 실종자” 명단에 오른 지 4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아내 캐럴라인 키플링의 일기에 따르면, 키플링 부부는 내내 아무도 만나지 않고 저녁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함께 읽었다고 해요. 일종의 가족 독서 심리치료였던 셈이지요. 1915년 아들의 죽음 이후 1924년 「제인 오스틴 비밀결사단」을 발표할 때까지, 그사이에는 거의 10년이라는 시간이 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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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1916년 프랑스 전장으로 파병된 신호장교 앨런 밀른은 정말로 키플링의 단편소설처럼 제인 오스틴을 매개로 쌓은 우정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아꼈던 어린 상병이 눈앞에서 폭사하는 장면을 목격한 뒤로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밀른 장교는 사병들과 가까워지기를 몹시 꺼리게 되었지요. 다시는 그런 마음의 상처를 입고 싶지 않아서 마음을 닫아버리고 만 거예요. 하지만 그의 최애 작가인 제인 오스틴을 열렬히 사랑하는 그레인저 상병만큼은 예외였답니다. 오스틴 소설과 인물들의 이야기를 늘 함께 나누다 보니 그만 자기도 모르게 친해지고 만 거죠. 그러던 어느 날, 신호 장교였던 밀른은 적의 통신 장비를 제거하는 위험한 임무를 맡게 됩니다. 당연히 아무도 따라오지 않겠거니 생각했는데, 문득 돌아보니 바로 뒤에서 그레인저 상병이 자기를 엄호해주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자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가?” 내가 말했다.
그가 수줍게 웃었다.
"그냥 따라오고 싶어서요.”
"하지만, 도대체 어째서?"
"뭐, 그냥 장교님이 꼭 무사하셨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그건 내가 들어본 중 제인 오스틴에게 바치는 최고의 찬사였다.A.A.밀른, 『이제는 너무 늦었어: 어느 작가의 자서전』 중에서
김선형 옮김
앨런 밀른이라는 이름이 낯설다면, ‘곰돌이 푸’는 어떠세요? A. A. 밀른은 곰돌이 푸와 푸의 친구 크리스토퍼 로빈을 창조한 작가거든요. 제인 오스틴을 매개로 맺게 된 우정이 밀른의 목숨을 살렸고, 제인 오스틴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곰돌이 푸를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뭐 그런 이야기죠.
아, 한 마디만 더요. 이후 1936년 전쟁의 위협이 다시 유럽 대륙을 뒤덮었을 때, 밀른은 제인 오스틴으로부터 다시 한번 위안을 얻습니다. 그 시기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씁니다. “세상은 썩었어. 나는 프랑스의 이기적인 쇄국정책이 싫고, 독일 정부를 증오해. 무솔리니는 혐오스럽고, 공산주의는 징그러워.”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요즘 나에게 위로를 주는 유일한 일은 제일 좋아하는 책을 희곡으로 각색하는 작업이라네.” 그 책은? 물론 『오만과 편견』이었지요.
그런데 왜 하필 제인 오스틴이었을까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한 선전 애니메이션은 북소리에 맞춰 팔다리를 쭉쭉 뻗는 독일 청소년의 영상 위로 이러한 해설을 달았습니다. “이 젊은이에게는 웃음, 희망, 관용, 자비의 씨앗이 없다. 만세와 행진, 행진과 만세밖에 없다.” 이 해설은 파시즘과 기계화 전쟁이 인간성을 말살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우리가 대체로 고귀한 인간성과 연관 짓는 가치들을 불러냅니다. “웃음, 희망, 관용, 자비의 씨앗”을요.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 속에서 병사들이 제인 오스틴을 읽었던 것은, 스스로 인간임을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제인 오스틴의 웃음, 희망, 관용, 자비의 씨앗에 기대어서요.
2025년 2월 12일에
김선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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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염
흥미진진합니다.. "The Great Gatsby"도 2차대전에서 군인들에게 보급되는 것을 계기로 인기 있는 소설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이 책이 먼저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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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lsare
너무 재밌어서 순식간에 읽어내려갔네요♡ 이렇게 정성스럽고 재밌기까지 한 글을 매주 메일로 받아볼 수 있다니 너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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