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오스틴의삶과소설

여행을 사랑했던 제인의 "노트북"

이동 기술력의 폭발적 성장, 글쓰기의 호흡을 바꾸다

2025.01.29 | 조회 4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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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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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편지함

탄생 250주년을 맞는 작가 제인 오스틴의 모든 것

영화 <미스 오스틴의 후회Miss Austen Regrets>(2007) 중에서 
영화 <미스 오스틴의 후회Miss Austen Regrets>(2007) 중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긴 휴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여행을 계획하신 분들도 많겠지요. 벌써 길을 떠난 분들도 계실 테고요. 플랫폼을 빠져나가는 기차, 고속도로로 막 진입한 자동차, 땅에서 떠오르기 직전의 비행기에 올라탄 당신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오늘은 길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제인 오스틴의 여행과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제인 오스틴은 주변에서 알아주는 여행 애호가였답니다. 『오만과 편견』의 다음 장면만 봐도 오스틴이 얼마나 여행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어요. 소설이 한창 전개된 어느 시점, 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은 위컴에게 실연을 당하고 빙리에게 실망을 느끼고 다아시를 퇴짜 놓게 되는데요(마음이 얼마나 복잡했겠어요), 바로 이즈음 외삼촌 부부로부터 더비셔 여행에 동행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신이 나서 이렇게 외칩니다. “바위와 산이 있는데 남자가 다 뭐래요!(What are men to rocks and mountains!)” 여행은 모든 고뇌를 씻어 내리는 묘약이지요. 물론 오스틴이 자신의 취향을 엘리자베스 베넷에게 씌워 입힌 것이기도 한데요, 실제로 오스틴은 여행을 좋아해서 고된 마차 여행도 불평 없이 즐겼고, 건강과 재정이 허락하는 한 언니 커샌드라와 영국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설적 장치로서의 ‘여행’은 작가가 등장인물에게 투사하는 취향에 그치지 않습니다. 여행은 엘리자베스의 운명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지요. 오스틴의 소설에서 여행은 플롯의 엔진이자 연료입니다. 누군가 어디론가 떠나야 사건이 일어나고 이야기가 진행되거든요. 주인공들은 어린 시절 내내 살던 고향에서 쫓겨나 새로운 고장으로 떠나게 되거나, 오랫동안 비어 있던 어느 시골 저택에 살러 온 런던 사람들을 만나게 되거나, 친지의 초대를 받아 다른 지역을 방문하거나 멀리 유람을 떠나면서 비로소 뜻밖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인생의 행로가 뒤바뀌지요.

*

이처럼 여행을 사랑했던 제인 오스틴에게는 길을 떠날 때마다 한 번도 잊지 않고 챙겨 갔던 소중한 반려 물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테이블이나 무릎에 올려둘 수 있을 만큼 자그마한 나무 상자인데요. 아버지 조지 오스틴 목사가 제인의 19살 생일 선물로 준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가죽을 덧댄 상판은 기울기를 조절할 수 있어서 종이를 받쳐두고 글을 쓸 수도 있었고 독서대로 사용할 수도 있었어요. 상자 속 수납공간은 잉크병과 깃펜을 담을 수 있을 만큼 제법 넉넉했고, 편지지와 원고를 보관할 수 있는 서랍까지 달려 있었습니다. 비밀 일기장처럼 뚜껑을 닫고 잠가둘 수도 있었다고도 하고요. 작고 가벼워서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었다고 하니 아마 그 시대의 이동식 타이프라이터라고 해야 할까요? 읽고 쓰는 이들에겐 제 몫을 톡톡히 하는 상자였던 거죠.

 

제인 오스틴의 글쓰기 상자 (영국도서관 제공 사진)
제인 오스틴의 글쓰기 상자 (영국도서관 제공 사진)

 

글쓰기 슬로프(writing slope)’ ‘랩데스크(lap-desk)’ ‘글쓰기 상자(writing box)’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던 이 휴대용 책상은 이동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한 18세기 말 영국의 신문물이었습니다. 『진짜 제인 오스틴: 소품으로 보는 삶(The Real Jane Austen: A Life in Small Things)』의 저자 폴라 번은 이 상자를 두고 “조지 왕조 시대의 노트북 컴퓨터”라고 표현하기도 했답니다. 포장도로가 처음 깔리고 우편 마차를 통한 통신 시스템이 갖춰지고 나폴레옹전쟁으로 군대의 국외 파견이 급증하면서 서재나 거실뿐 아니라 마차에서, 여관에서, 상선과 함선에서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하는 이들이 늘어났으니까요. 즉, 이 작은 책상은 산업혁명에 시동을 걸며 세계로 돌진했던 영국의 최신 테크놀로지였던 셈입니다. 오스틴은 바로 이 작은 책상 위에서 자신의 위대한 소설들을 전부 썼을 뿐 아니라 지중해부터 서인도제도, 동인도제도, 그리고 멀리 아프리카 해안까지 누비고 다닌 해군 오빠 프랜시스와 남동생 찰스에게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편지를 썼답니다. 덧붙이면, 편지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여행만큼이나 중요한 플롯의 촉매이지요.

전례 없는 이동 가능성이 열린 제인 오스틴의 시대에 오면, 세계는 급격히 재편됩니다. 오스틴의 소설 자체도 당시 급속도로 발전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산물이지요. 빨라진 삶의 속도는 플롯뿐 아니라 간결하고 흡입력 있는 문체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작가는 잔잔한 일상을 그리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문체를 구사해 의아하리만큼 긴박한 리듬을 만들어내는데요. 독자는 어서 다음 문장으로, 다음 챕터로,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고 싶어 손에서 책을 내려놓을 수 없게 되어요. 어찌 보면 제인 오스틴의 이 빠른 템포는 우리 시대 숏폼의 호흡과 비견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들, 앤 래드클리프나 월터 스콧 경과 비교해보면 이런 제인 오스틴의 템포가 얼마나 새롭고 독창적인 것이었는지를 더 뚜렷이 체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템포가 래드클리프나 스콧 경의 소설과 달리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이 현대 독자들에게 꾸준히 읽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

하지만 ‘휴대용’이라는 이름이 붙은 모든 물건이 분실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만큼, 이 귀한 휴대용 책상도 영영 사라질 뻔한 적이 있었어요. 오빠 에드워드가 새로 이사한 집에 다녀오는 길에 들른 여관에서 착오로 글쓰기상자를 비롯한 제인의 소지품을 다른 마차에 실어 보내버린 것이죠.

 

도착하자마자 편지를 쓰기 시작했어야 했는데, 작은 소동이 있어서 늦어졌어. 여관에 도착하고 십오 분쯤 지났을까, 내 글쓰기 소품과 옷이 든 상자들이 착오로 우리가 들어올 무렵 떠난 마차에 실려 나갔다는 걸 알게 됐지 뭐야. 짐들은 그레이브센드를 거쳐서 서인도제도로 보낼 예정이었대. 내가 가져본 소지품 중에서 가장 귀한 것들이었는데. 글쓰기 상자 안에는 내 전 재산, 7파운드가 들어 있었거든. […] 노틀리 씨가 하인에게 당장 말을 타고 가서 마차를 따라잡으라고 시켜서 반시간 후에는 모두 되찾을 수 있었어. 이젠 그 어느 때보다도 큰 부자가 됐지.

1798년 10월 24일 제인 오스틴이 언니 커샌드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선형 옮김


1798년이면 제인이 한창 왕성하게 평생의 걸작을 쓰던 시기인데요. 7파운드만이 아니라 당시 집필하던 소설 초고가 들어 있었을 거라 추측하는 학자들이 많아요. 그러니까 하마터면 『오만과 편견』의 초고가 서인도제도로 실려 갈 뻔했는지도 모른다는 얘기, 우리가 엘리자베스 베넷도 다아시도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어휴, 세상에, 큰일날 뻔 했지요? 여행할 때는 언제나 소지품을 잘 챙겨야 한다니까요.

 

2025년 1월 29일에

김선형 드림

p.s.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휴대용 책상에서 편지를 쓰는 19세기의 숙녀
휴대용 책상에서 편지를 쓰는 19세기의 숙녀
휴대용 책상에서 편지를 쓰는 다아시 - 영화 『오만과 편견』(2005) 
휴대용 책상에서 편지를 쓰는 다아시 - 영화 『오만과 편견』(2005) 
휴대용 책상에서 편지를 쓰는 캐서린 몰랜드 - 영화 『노생거애비』(2007)
휴대용 책상에서 편지를 쓰는 캐서린 몰랜드 - 영화 『노생거애비』(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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