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이야기

제인 오스틴의 문체가 위대한 이유

소설의 역사를 바꾼 어떤 화법의 이야기

2025.01.22 | 조회 4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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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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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편지함

탄생 250주년을 맞는 작가 제인 오스틴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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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에 대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는 그가 문체의 혁신가라는 사실입니다. 제인 오스틴이 창안한 활용법을 버지니아 울프가 예술적으로 완성한 자유간접화법(free indirect discourse)은 소설의 역사를 바꾼 문학적 발명입니다. 이 위대한 혁신의 맥락과 효과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우리 시대의 소설에 새겨져 있는 그의 족적을 살펴볼게요.

 

일은 일일 뿐이야, 그가 나를 달래려고 했다.
당신이 내 돈을 다 갖는단 말이지, 내가 죽은 것도 아닌데. 농담처럼 말했지만, 막상 내뱉고 보니 소름이 끼쳤다.
쉿, 루크가 말했다. 여태 마루에 무릎을 꿇은 채였다. 내가 언제까지나 당신을 돌봐줄 텐데 뭘.
난 생각했다, 벌써 이이가 날 봐주는 척하고 있어. 그러고는 또 생각했다. 나 벌써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구나.

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 김선형 옮김, 민음사, 308쪽

 

20세기 후반 가상의 국가 길리어드(라고는 하지만 누가 봐도 미국인 나라)가 배경인 장편소설 『시녀 이야기』에는 쿠데타로 들어선 신정 독재 정권이 나라의 모든 여자로부터 재산을 몰수해 친인척 남자 명의로 강제 전환시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오브프레드 역시 독자적인 경제주체였다가 하루아침에 타인의 선의에 생계를 의탁하는 신세로 전락하는데, 위의 인용문을 보면 인물들의 심리적 변화가 매우 서늘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브프레드 입장에서, 남편과의 관계는 권력의 재배치가 이루어지자마자 감정적으로 왜곡됩니다. 분명 ‘사랑’이었을 남편에 대한 감정은 삽시간에 온정과 굴종으로 변색됩니다. 작가는 남편 루크가 이 변화를 은근히 즐기고 있다는 행간의 암시—‘나’의 피해망상—도 빼놓지 않으며 소름 끼치게 냉정한 현실 인식을 그려냅니다.

소설은 길지 않은 장면 속에서 이런 감정적 효과들을 모두 거둡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나’의 기억 속에서 루크의 발언과 심리가 주관적으로 재구성되면서 ‘나’의 감정이 하나의 체험으로 물 흐르듯 통합된 덕분입니다. 이런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장치가 바로 간접화법(indirect discourse)입니다. 간접화법은 개인의 내밀한 사유와 인물 간 대화의 경계를 흐리고, 독자로 하여금 ‘나’라는 서술자의 관점을 통해 현실을 체험하도록 이끕니다. 캐릭터와 거리를 유지하며 ‘관조’하는 전지적 시점 서술과 달리, 간접화법은 독자의 ‘동일시’를 감각적으로 유도하는 데 특화된 서술법입니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창조한 이 아득한 디스토피아의 가상현실은 역사적으로 전례가 있습니다. 바로 제인 오스틴이 살았던 18세기 말 영국 사회입니다. 그때 그곳의 여성들에게는 애트우드의 가상현실이 ‘자연스러운/당연한’ 현실이었습니다. 그 사회에서 딸은 토지와 주택을 상속받을 수 없었습니다. 장자만이 상속받을 수 있는 ‘부동산 한정 상속법(entailment)’이 존재했거든요. 이 장자상속의 원칙(primogeniture) 때문에 딸은 물론 차남도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일이 어려웠는데요, 그래도 남자는 직업 활동을 통해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금 융통이 뜸한 영주의 결혼하지 않은 딸들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아버지의 영지를 통째로 물려받는 형제나 남자 친척의 친절과 양심에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맡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물론 큰 재산을 물려받은 형제라면, 사촌이라면, 사람인 이상 당연히 가족을 따뜻하게 돌보아주겠지요? 오브프레드에게 루크가 말했잖아요. 내가 언제까지나 당신을 돌봐줄 텐데, 뭘.

이 질문에 대한 ‘화답’으로 나온 것이 1811년 “한 숙녀가(by a lady)” 익명으로 출간한 소설이었습니다. 『이성과 감성』이라는 제목의 이 당돌한 소설은 한정 상속법이라는 제도에 깔린 안일한 온정중의 또는 도덕적 안일함을 정면으로 겨냥했거든요. 소설 도입부부터 직접적입니다. 가족의 보호막이 되어주었던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아내와 딸들은 무산자의 신세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지요. 아버지는 (딸들과 어머니가 다른) 큰아들에게 전 재산을 물려줄 수밖에 없기에, 임종의 순간 아들을 불러놓고 애원하다시피 남은 가족을 부탁합니다. 이 간곡한 유언의 향방이 결정되는 과정을 묘사하는 데에 이 소설의 2장 전체가 할애되고 있는데, 여기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서술법도, 직접화법이나 간접화법도 아닌) 전례 없이 유동적인 서술법 하나가 소설의 역사에 힘차게 등장합니다. 

 

한편 존 대시우드 부인은 남편이 동생들에게 베풀고자 하는 친절을 전혀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어요. 소중한 아들 몫에서 3000파운드나 빼내버린다면 아이가 얼마나 끔찍한 수준으로 궁핍해지겠어요. 부인은 남편에게 제발 다시 생각해보라고 졸랐습니다. 친자식, 그것도 외동아들에게서 그런 거액을 빼앗다니 나중에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냐고요. 대시우드 자매들이 그 재산을 누릴 권리가 대체 어디 있느냐고요. 겨우 이복동생들일 뿐인데, 자기 기준에서 보면 친척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거액을 그렇게 너그럽게 베풀 수가 있느냐고요. 다들 알다시피 엄마가 다른 아이들끼리는 아무 정도 없는 사이가 아니냐고요. 그런데도 이복동생들한테 돈을 다 줘버려서 자기 신세도, 우리 불쌍한 아기 해리의 신세도 망치려 하는 거냐고요. (이탤릭체 강조: 원문)

제인 오스틴 장편소설, 『이성과 감성』, 2장, 김선형 옮김.

 

밑줄로 강조한 “소중한 아들 몫에서 3000파운드나 빼내버린다면 아이가 얼마나 끔찍한 수준으로 궁핍해지겠어요”라는 문장이 독특한데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눈치채셨을까요? 바로 이 순간, 자유간접화법과 아이러니가 손을 잡은 오스틴의 발명품, 오스틴표 소설 문체가 처음 등장했습니다.

첫 번째 레터에서 제가 오스틴의 초기작 화법을 경어체로 설정한 이유를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혹시 기억하시나요? 저는 오스틴 새 번역 작업을 시작하면서 『이성과 감성』의 ‘톤’을, 짓궂은 눈빛을 반짝이는 젊은 오스틴의 분신인 전지적 시점 서술자가 흡사 이웃의 뒷담화를 하듯 독자에게 속살속살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 즉 ‘가십’의 어투로 설정했다고 말씀드렸어요. 뒷담화란 원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기 마련이고요. 그런데, 보세요, 이 전지적 시점 서술자가 이 순간, 예고도 없이, 존 대시우드 부인이라는 조역에 ‘빙의’해 그의 생각과 말을 복화술처럼 읊조리기 시작한 거예요. 주인공도 아니고 악역에 가까운 캐릭터의 입장이 되어 말하기 시작한 거지요. 요정 퍼크처럼 짓궂은 이 화자는 다음 문장에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쏙 빠져나와 중립적 거리를 유지하는가 싶다가, 또 그다음 문장에서는 아예 문제의 캐릭터가 되어버린 듯, 다시 간접화법을 활용해 부인의 말을 미주알고주알 옮기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전지적 화자가 여러 다양한 캐릭터의 내면을 자유자재로 드나들기도 하고 캐릭터의 대사를 서술체로 재전달하기도 하면서, 전지적 3인칭, 1인칭 직접화법, 3인칭 간접화법을 마음대로 오가는 기발한 서술방법이 바로 ‘자유’간접화법이랍니다. 

이 짓궂은 화법 덕분에 독자는 매우 난처해지고 맙니다. 정신을 차려보면 그만 독자 자신이 (동일시를 유도하는 효과가 있는 간접화법 속에 들어와 있게 된 만큼) 본의 아니게 매정하고 이기적인 존 대시우드 부인의 편에 서 있다는 걸 깨닫게 되거든요. 흡사 자기가 존 대시우드 부인이 된 것처럼, 남편을 설득하는 부인의 따발총 같은 말을,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다다다다 읊조리게 되는 것이지요. 과연, 『이성과 감성』의 서술자는 존 대시우드 부인에게 빙의해 남편을 숨차게 들볶습니다. 설득하는 자이기도 하고 설득당하는 자이기도 한 이 부부의 입장에서 보면 그 말들이 얼마나 유혹적인지 모릅니다. 결국 2장이 끝날 무렵,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새어머니와 이복동생들의 생계를 충분히 보장해주려고 했던 존 대시우드 씨는 아들 몫으로 돌아갈 재산 중 한 푼과도 “이별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그 결정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구축합니다. 독자는 이 진부하고도 평범한 악의 공모자가 되어버리고, 동시에 한정 상속제라는 부조리한 제도가 기대고 있는 개인의 온정이 이기적 물욕 앞에서 얼마나 허약하고 위태로운 것인지를,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입장에서 알게 됩니다. 그렇게 2장을 거의 다 지나오면, 그사이 서술자는 이기적인 캐릭터들로부터 훌쩍 빠져나와 시치미를 떼고 있어요. 언제 그랬냐 싶게, 냉랭한 태도로 거리를 두며 이들을 비웃는 거죠. 그러니 이들의 심리에 잠시나마 공모했던 독자 역시 서술자의 비웃음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고요. 독자는 제도가 조장하는 이 평범한 악의 유혹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완벽하게 체험한 셈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스틴이 기발한 소설적 장치로 도입한 자유간접화법의 위력입니다. 독자와 캐릭터의 거리를 자유자재로 조절해서, 동일시와 아이러니라는 상반된 효과를 동시에 창출한 것입니다.

『이성과 감성』 2장은 풍자와 유머, 심리적 리얼리즘과 사회 비판이 완벽하게 결합된 위대한 문학적 성취입니다. 정의의 문제를 사회적 안전망의 구축 없이 개인의 온정에 맡기는 순간 약자에 대한 폭력이 얼마나 쉽게 판치게 되는지를, 『이성과 감성』 2장만큼 독창적으로 구현한 문학적 순간은 흔치 않거든요. 그리고 바로 이 순간의 문학적 후계자가 바로, 앞에서 인용한 『시녀 이야기』의 서늘한 한 대목입니다. 실제로 영국에서 여성의 재산권이 처음 법적으로 보장된 것은 1925년이었습니다.

 

*

 

번역자로서 저는 이 혁신적 서술의 효과를 구현하기 위해 몇 가지 과감한 선택을 했습니다. 먼저는, 간접화법으로 포착되는 대시우드 부인 특유의 잔소리, 그 숨 막히는 리듬을 포착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서술자의 문장에 입말의 생동감을 불어넣기 위해 “-고요”라는 어미를 각운처럼 되풀이해 사용했습니다.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냐고요” “대체 어디 있느냐고요” 이렇게 “-고요”를 반복함으로써 존 대시우드 부인의 다그치는 리듬과 서술자의 아이러니를 모두 표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다음으로, 간접화법에서 쓰이는 3인칭 대명사를 이따금 1인칭으로 번역함으로써 서술의 시점을 ‘자연스럽게’ 이동했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마지막 문장에 담긴 “그들의 불쌍한 아기 해리(their poor little Harry)”라는 구절을 “우리 불쌍한 아기 해리”로 옮기는 식으로요. 축자적으로 보면 서술자의 것인 이 표현이 “우리”라는 존 대시우드 부인의 입말로 읽히면, 영어 독자들이 이 문장 앞에서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감정이 끌려나올 수 있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단어 대 단어라는 일차적 대응 기술을 내려놓고 전략에 집중하면 좀 더 생생한 읽기 체험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문장과 문장이 연결되며 생겨나는 겹겹의 의미와 뉘앙스가 잡히는 방식으로요.

물론 이 읽기는 저의 읽기일 수밖에 없고, 이 선택 역시 저의 선택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저는 이 새 번역 작업을 통해 “충실한 번역”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개념을, 문학 읽기라는 복합적 체험의 본질에 최대한 근삿값으로 다가가는 노력으로 재정의할 수 있도록, 그 구체적 가능성들을 여러 갈래로 타진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성실하게 고민하고 연구하면서, 그 과정과 결과를 꾸준히 솔직하게 전해드리겠습니다.

 

                                                                                                          2025년 1월 22일에

                                                                                                                       김선형 드림 

 

P.S. 여러분의 답장을 늘 기다리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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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법고냥이의 프로필 이미지

    마법고냥이

    0
    15 days 전

    번역가님 덕분에 '자유간접화법'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그것을 오스틴이 처음 사용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이렇게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 정말 즐겁습니다. 레터 항상 잘 읽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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